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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엘리너 파전, '보리와 임금님'

딸기21 2002. 12. 2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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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좋아하는, 오래 전 그 동화.

제로보드가 거의 기능을 상실하여 '베리베리 라이브러리'의 글들을 하나둘씩 블로그로 옮기고 있습니다. 홈피 처음 만들던 시절 올려놓고 있다가 게시판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이 글도 이사를 참 많이 했지요. 다시 이사를 시키면서, 한번 더 읽어봅니다. 



<보리와 임금님>

엘리너 파아전


우리 마을에는 윌리라는 바보가 살고 있었다. 이 아이는 그저 마을 사람들 심부름이나 다니는 마을의 보통 바보들과는 달랐다. 윌리는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었고, 한 때는 장래가 촉망되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윌리의 아버지 역시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무척 많은 책을 읽혔다.
그러나 윌리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기대가 물거품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저 윌리의 머리가 나빠졌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윌리는 아예 보통 사람들처럼 생각을 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사실일까?

그 아이는 마을의 밭에 앉아서 실실 웃기만 할 뿐 좀처럼 입을 열어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열고 혀를 놀리기 시작하면 마치 닫혀 있었던 뮤직박스가 느닷없이 열려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처럼 끝없이 얘기를 계속하곤 했다.
멍청이 윌리가 언제 입을 열어 말을 끄집어낼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윌리는 이제 더 이상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교장 선생님은 가끔 윌리가 전에 좋아하던 책을 슬며시 그 아이의 눈앞에 내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윌리는 슬쩍 그 책에 눈길을 보낼 뿐, 옛날 이야기나 전설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그리고는 털레털레 걸어가서 신문을 집어들곤 했다. 그나마 그 신문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내 싫증을 내고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가끔, 어쩌다... 신문 기사의 한 부분에 관심이 쏠리는 듯 한 시간 이상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들이었다.

윌리의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아들을 '바보 윌리'라고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윌리를 그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윌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 찾아온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바보 윌리를 가리키면서 자랑하는 일도 있었다.
윌리는 눈이 무척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머리칼은 옅은 갈색이었고, 피부는 희었다. 그리고 그 하얀 살결에 주근깨가 살짝 박혀 금빛으로 보였다. 장난기를 띤 푸른 눈동자에는 악의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고, 모양이 좋은 입술로 빙긋 웃으면 보는 사람들이 시선을 끌어당겨 놓지 않는 힘이 있었다.
내가 윌리를 처음 보았을 때 윌리는 16살이나 17살쯤 되어 보였다. 나는 8월 한 달을 그 마을에서 보낼 작정이었다. 두 주일 동안 윌리는 내가 아는 척을 해도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할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4분의 3 가량 베어진 보리밭 가장자리에 길게 누워 졸린 눈으로 밭 가운데 놓인 보릿단을 옮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윌리가 다가오더니 바로 내 옆에 기대고 앉았다. 윌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어 내 시계줄을 잡고 거기 붙은 보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 번 그걸 쓰다듬더니 느닷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어렸을 때 이집트에 있는 아버지 보리밭에 씨를 뿌렸어. 씨 뿌리기가 끝나면 파란 보리 싹이 움트기를 기다렸어. 시간이 흐르면 보리 줄기가 자라고, 줄기에서 이삭이 솟아 오르더군. 그리고 녹색 밭은 황금빛으로 변하는 거야! 해마다 보리밭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면 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집트에서 제일 부자라고 생각했지.

그 때 이집트에는 왕이 있었어. 그 왕을 부르는 이름은 아주 여러가지였지. 그 이름 가운데 가장 짧은 것이 '라'였어. 그래서 나는 그 왕을 '라'라고 불렀지. 라 왕은 큰 도시에서 화려하게 살고 있다는 거야. 아버지의 보리밭은 그 도시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왕을 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왕의 화려한 궁전과 멋진 옷차림에 대해 얘기했지. 왕관과 보석, 재물이 가득 들어찬 상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어. 왕은 은 접시에 든 음식을 먹고, 금으로 만든 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더군. 저녁에 잠을 잘 때는 테두리에 진주를 장식한 자주색 이불을 덮는다는 거야.

나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게 좋았어. 하지만 왕이 우리 아버지처럼 가까운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어. 그리고 왕의 황금빛 망토가 우리집 보리밭처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

어느날 나는 보리밭 그늘 아래 누워 있었지.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아버지의 보리는 길게 자라났고, 나는 보리 이삭을 뽑아 한 알씩 입에 넣고 씹고 있었어. 그 때 누군가 내 머리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더군. 봤더니 덩치가 큰 어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더군.

그 남자는 새까만 수염이 길게 자라 가슴까지 내려왔고, 날카로운 눈매가 마치 독수리 같았어. 머리에 단 장식과 옷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지. 난 그 남자가 라 왕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어. 라 왕과 조금 떨어져서 호위병들이 말을 타고 서 있더군. 호위병 한 명은 왕의 말 고삐를 붙잡고 있었어. 왕은 나를 보기 위해서 그 말에서 내린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았어. 왕은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지...

"얘야, 너는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라 왕이시여!"
"그 보리를 마치 맛있는 음식처럼 씹고 있다니..."
"라 왕이시여, 이것은 먹는 것입니다."
"얘야,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저는 제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럼 너의 아버지는 누구냐?"
"우리 아버지는 이집트에서 제일 부자입니다."
"그건 왜 그런 거냐?"
"아버지는 이 보리밭을 갖고 있으니까요."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어!

라 왕은 눈을 번쩍이더니 우리 보리밭을 휘 둘러보더군.
"나는 이 이집트를 모두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했지. "그건 너무 많아요!"
"뭐라고? 너무 많다고? 너무 많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어쨌든 나는 네 아버지보다 더 부자란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어. "아니에요!"
"내가 더 부자란 말이다! 네 아버지는 무슨 옷을 입고 있지?"
"저와 똑 같은 옷이지요!" 나는 무명 옷감으로 만든 내 옷을 왕에게 보여 주었어.

"그렇다면 내가 입고 있는 것을 한 번 볼 테냐?" 라 왕은 몸에 걸친 금빛 망토를 활짝 펼치면서 말하더군. 그 바람에 망토 자락이 내 뺨을 할퀴고 지나갔어. 어휴, 꽤나 따끔거리고 쑤시더군.



"이래도 네 아버지가 더 부자라고 우길 테냐?"
"아버지의 황금이 훨씬 더 넓어요. 아버지는 이 밭의 주인이잖아요!"
그러자 왕의 얼굴 표정이 참으로 무섭게 바뀌더군.
"만약 이 밭을 내가 태워버리면 어떻게 되지? 네 아버지에게는 뭐가 또 있지?"
"보리는 다시 나와요. 다음 해에도 우리 밭의 보리가..."
"감히 이집트 왕을 보리 따위에 비교하다니!" 라 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군.
"왕은 보리보다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난다! 그리고 보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지 않느냐!"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지. 그러자 라 왕의 눈에서 마치 폭풍이 일어나는 것 같더군. 왕은 갑자기 호위병들을 돌아보며 사납게 소리치더군.
"이 밭을 모조리 불태워라!"
병사들은 밭 모퉁이에 불을 질렀어.
불이 커다랗게 타오르자, 라 왕은 또 말했지.
"이것 봐라, 꼬마야! 네 아버지의 보물이 어떻게 됐는지를! 이 보물이 이렇게 찬란하게 빛난 적이 있느냐? 그리고 앞으론 두 번 다시 이렇게 빛나지 못할 거다!"

보리밭이 새카맣게 타버리자, 왕은 그곳을 떠났어. 그러면서 소리치더군.
"자, 어떤 것이 더 찬란한 금빛이냐? 보리냐, 왕이냐? 라 왕은 네 아버지의 보리보다 훨씬 더 목숨이 길단 말이다!"
왕이 말에 오르자 망토가 휘날리며 찬란하게 빛났어.
아버지는 그제서야 오두막집에서 슬그머니 나와서 중얼거렸어.
"우리는 이제 끝장이 났다. 도대체 왕은 왜 우리 보리밭을 태운 거지?"

나는 그 이유를 아버지께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나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거든. 나는 집 뒤 조그마한 채마 밭으로 달려가서 막 울었어. 그런데, 눈물을 닦으려고 손을 펼쳤더니, 손바닥에 절반쯤 익은 보리 이삭이 착 붙어 있더군! 몇 천 개나 되는 황금빛 보리 이삭 가운데 오직 하나... 마지막으로 남은... 그건 보물이었어!

나는 그것마저 왕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얼른 흙을 파고, 그 구멍에 보리 알을 하나씩 하나씩 묻었지.
다음해 여름, 이집트의 보리가 무르익을 무렵이었어. 우리 밭의 꽃과 참외 사이로 지난해 심은 보리 이삭 열 줄기가 솟아올라 있더군!

그 해 여름, 라 왕이 죽었지. 그리고 호화롭게 묻혔어. 이집트 왕들이 죽으면 단단하게 틀어막은 방에 보석과 비싼 옷, 갖가지 황금 그릇들과 함께 들어가서 잠이 드는 거야. 그런데 그 가운데 보리도 함께 가져가야 해. 왕이 저승으로 먼 길을 가려면 배고프지 않게 보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도시에서 어떤 남자가 그 보리를 가지러 나왔더군. 그 남자는 보리를 갖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 앞을 지나갔어.
몹시 더운 날이어서 보리를 갖고 가던 남자는 우리 집에서 잠깐 쉬었지. 그리고 너무 덥고 피곤한지 잠이 들었어. 나는 그 남자가 잠들자,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마치 라 왕이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소리치는 느낌이더군.
"이집트 왕은 보리보다도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난다! 이집트 왕은 보리보다 훨씬 더 목숨이 길다!"

나는 서둘러 밭으로 달려갔지. 그리고 밭에서 보리 이삭 열 개를 잘랐어. 나는 그 황금빛 줄기를 잠자고 있는 남자가 가지고 온 보리 단 속에 집어 넣었지.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자 곧장 보리 단을 들고 도시로 돌아갔어. 왕이 온갖 보석들과 함께 묻힐 때 내 보리도 왕과 함께 거기 들어간 거야.

 
바보 윌리는 가만히 내 보석 장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윌리야, 그걸로 끝난 거야?" "아니야, 아직 조금 더 남아있어!" 윌리가 대답했다. 


"그 때부터 몇 백 년, 아니 실은 몇 천 년이 지난 뒤에 말이야, 사실은 작년에 생긴 일인데... 이집트에 살던 영국 사람들 몇 명이 라 왕의 무덤을 발견한 거야. 그 무덤을 파 보니 다른 보석들과 함께 내 보리도 나타났지. 다른 황금 그릇들은 햇빛이 비추이자 모두 스르르 무너져내렸어. 그러나 내 보리는 그렇지 않았어. 영국 사람들은 그 보리 알들을 영국으로 옮겨왔어. 그리고 마침 우리 아버지 집 앞을 지나게 된 거야. 그리고 옛날 그 이집트 사람처럼 잠시 쉬게 된 거야. 그 사람들은 갖고 온 것을 아버지와 나에게 보여 주었어. 그래서 나도 한 번 만져 보았지. 그랬더니 정말 그 보리는 옛날 내가 넣어두었던 그 보리더군.


윌리는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기분 좋은 미소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알이 내 손바닥에 붙어서... 그래서 이 밭 한가운데에 심었어..."
"그럼 그것이 이 밭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윌리에게 물었다. "이 줄기가 여기 베다 만 것들 사이에 남아 있겠구나?"
보리 자르는 기계가 돌아가며 마지막 보리 줄기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윌리는 앞장을 서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들은 얼마 남지 않은 황금빛 물결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윌리는 그리고 어떤 보리 이삭을 가리켰다. 그 이삭은 주위의 다른 어떤 이삭보다 굵었다. 그리고 햇빛을 받아 어떤 이삭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게 바로 그 보리냐?" 나는 윌리에게 물었다.
윌리는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다른 것보다 더 빛나는구나!" 내가 말했다.
"응..." 바보 윌리가 대답했다. "이집트 왕과 보리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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