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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딸기21 2003. 7. 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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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과 인간 이야기 -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 (지은이) | 효형출판 | 2001-01-20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교수가 일간지에 썼던 과학칼럼들을 모은 것인데,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조금씩 재미있게 읽었다. 저널에 실리는 글들이 재미는 있지만 정작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최교수의 글은 그렇지 않다. 과학자들 중에 글 잘 쓰는 두 사람이, 최재천 교수와 모씨라고 하는데 그냥들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에게건, 동물에게건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정말 본받을 일이고, 또 힘든 일이기도 하다. 최교수의 글은 제목처럼 '생명이 있는 것' 모두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세상의 일에 대해서도 안타까움과 연민, 애정을 듬뿍 보낸다. 

해마다 뛰어난 학자, 문학가, 그리고 인류 평화에 몸바친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스웨덴 정부가 새로운 세기를 겨냥하여 세계아동상을 제정했다. 이른바 '어린이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 상은 심사도 어린이들이 한다.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15명의 어린이들로 이뤄진 선정위원회가 수상자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상의 첫 수상자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 생활을 일기로 남긴 안네 프랑크와 함께 파키스탄의 이크발 마시가 선정됐다. 이크발은 아주 어렸을 때 양탄자 공장에 끌려가 노예처럼 일만 하다 1995년 겨우 열두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린이다. 그는 자신처럼 양탄자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는 많은 어린이들의 권익을 위해 노동운동을 벌이다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아직도 부모 곁에서 응석부려야 할 나이건만 그 한 많고 짧은 인생을 자기처럼 무참하게 착취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살다 떠난 천사였다.


미국에 살 때 일이다. 한 10여년 전쯤이나 됐을까. 한 TV 시사프로그램에서 관상용 열대어를 잡는 필리핀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필리핀 근해에서 열대어를 잡는 상인들의 뱃전에서 기껏해야 예닐곱 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들이 허리에 밧줄을 묶은 채 바닷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의 또다른 끝에는 무거운 추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산소호흡기도 없이 잠수해야 하는 까닭에 빨리 물 밑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매단 것이지만, 사실 그 추는 고기를 충분히 잡기 전에는 올라올 수 없도록 매달아놓은 잔인한 족쇄였다. 몇시간씩 계속되는 작업에 지칠대로 지친 아이들이 숨을 유지하지 못해 죽어나가는 일이 허다하다는 기자의 말에 나는 눈물이 왈칵 치받았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 중 미성년자를 작업장에 몰아넣는 짐승은 우리 인간과 베짜기개미 밖에 없는 것 같다. 베짜기개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호주의 열대지방 나무 꼭대기에 이파리로 엮은 집에서 산다. 큰 군락은 상당한 면적의 영역을 지키며 사는데 그 영역 안에는 때로 큼직한 나무가 여러 그루씩 포함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면적 전체의 땅을 다 지키는 것은 아니다. 땅 속엔 따로 군락을 형성하고 사는 개미들이 있다. 베짜기개미들은 다만 나무와 나무로 연결된 공중에 떠있는 삼차원 공간을 지킬 뿐이다.


공중에 떠있다면 여왕은 어디에 모시며 아이들은 어디서 기를까. 베짜기개미는 자기 애벌레들을 마치 베틀 북처럼 사용하여 살 집을 짓는다. 우선 여러 마리의 일개미들이 협동하여 가까이 있는 나뭇잎들을 가까이 끌어당긴 다음, 몸집이 큰 일개미들이 애벌레들을 입에 물고 두 나뭇잎 가장자리로 고개를 번갈아 움직인다. 일개미의 큰 턱에 허리가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애벌레들은 끈끈한 명주실을 분비하여 나뭇잎들을 엮는다. 그들은 이렇게 여러 나뭇잎들을 엮어 어른의 주먹 크기에서 머리통 크기만한 방들을 만든다. 그렇게 만든 방들 중 어떤 방에는 여왕이 기거하고 또 어떤 방들은 아가방이 되낟.
애벌레들이 분비하는 명주실은 원래 그들이 번데기가 됐을 때 들어앚을 고치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작업장에 차출된 애벌레들은 결국 자신의 몸을 감쌀 명주실이 모자라 고치를 틀 수 없게 된다. 어떤 애벌레들이 선발되는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착취당하는 입장에서는 생명에 위협을 받는 엄청난 일이다.


(중략)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곧 선진국형 아동복지법을 시행한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자식이라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대할 수 없게 된다. 베짜기개미 사회는 그래도 우리보다 낫다. 그들은 사회를 위해 봉사한 아이들을 마냥 내팽개치지 않는다. 명주실 공장에서 일한 애벌레들이 어른들의 분비물로 만든 집 속에서 고치를 틀지 않고서도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사회보장제도가 갖춰져 있다. 아마도 그들의 역사에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올리버 트위스트'의 작가 찰스 디킨스나 페스탈로치 같은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책의 제목만 보고 판에 박힌 환경사랑 이야기나 현실과 동떨어진 자연예찬, 어설픈 동물애호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재미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공부 이야기를 잘난척 않으면서 적당히 풀어놓고, 우리 주변 내가 모르는 낯선 동물 이야기를 전혀 낯설지 않게 던져놓는다. 


맘에 드는 것은 세상을 보는 최교수의 따뜻한 눈이다. 말 안되는 인간사회의 잔인한 구조는 물론이고, 전혀 합리적 근거가 없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따갑게 질타를 한다. 그렇다고 "동물이 착하니 우리도 착하자!" 식의 유치한 논리는 전혀 아니다. 최교수는 마치는 글에서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제가 자연에게 써올린 반성문들"이라고 했다. 

"제가 감히 인류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무릎을 꿇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저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길 빕니다". 
 

그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인류와 다른 생물들이 평화공존을 할 수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들끼리의 생활도 나아질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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