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2005 소설읽기 3/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딸기21 2005. 1. 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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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El Cartero de Neruda (1985)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은이) | 우석균 (옮긴이) | 민음사 | 2004-07-05


소설이건 영화건 만화건, 정말 재미있는 것은- 한참 웃다가 눈시울 시큰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책이 딱 그런 책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버려서 다 읽고난 이 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금박으로 포장해서 나무 상자에 넣어둘까? 한장 한장 찢어내서 벽지로 발라버릴까? 꽃띠로 리본을 매어 액자에 넣어 걸어놓을까? 차라리 몽땅 베껴써볼까? 


독자를 웃게 만들려면 작자가 웬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너저분하지 않게, 살짝살짝 감각적이면서 솔직한 언어로 찌꺼기 없는 웃음을 선물해주는 책. 

"몇달 전부터 그 마리오란 놈팡이가 제 주점 근처를 맴돌고 있죠. 이 자가 감히, 겨우 열여섯살인 제 딸을 집적거립니다." 
"따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요?"  
과부가 침을 뱉듯 말했다.
"메타포요" 
시인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런데요?" 
"네루다 씨, 메타포로 제 딸을 용광로보다 더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니까요!"

파블로 네루다. 이 시인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일월서각에서 출간된 '제3세계 시' 어쩌구 하는 책에 네루다와 옥타비오 빠스 같은 이들의 시가 들어있었다. 그 시들은 날카로웠고, 어두웠고, 무서웠다. 예쁜 그림 그려진 브라우닝 류의 시와는 전혀 다른, 칼날같은 시들. 

그리고 어느덧 내 나이, 처음 네루다의 시를 읽었을 때의 두 배의 나이가 되어 다시 만난 네루다. 이 소설의 네루다는 그 칼날같은 시집에서의 이미지하고는 사뭇 다르다. 치열한 한평생을 보내고 바다와 사랑과 유머와 미소를 함께 갖추게 된 노시인. 판초를 입고 춤 한박자를 선보일 줄 아는 멋쟁이 시인. 실제로 네루다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타포. 철부지 우편배달부를 사랑에 목매달게 하고, 열여섯 처녀 가슴을 후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과부를 두 손 들게 만드는 메타포. 어쩌면 이 책 전체가 메타포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메타포는 네루다인지도 모르겠다. 투쟁과 연륜을 짊어진 네루다라는 메타포,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찬 우편배달부라는 메타포, 라디오 군가로 흘러나오는 쿠데타라는 이름의 메타포, 칠레인들의 희망과 좌절을 상징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메타포, 인생을 힘겹지만 그래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어린아이라는 메타포. 그리하여 끝내 눈물 한 방울 떨구게 만드는 '진짜같은 소설'. 

바닷가 마을, 늙은 시인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사랑과 섹스, 사회주의 혁명과 쿠데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에는 음악과 시와 사랑과 섹스, 정치와 소설, 이런 것들을 엮게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그래서 네루다 같은 위대한 시인이 나오고 웃음눈물 뒤범벅된 이런 소설이 나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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