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라크로 가는 길. 950km는 역시 멀었다. 검은 돌과 듬성듬성한 풀밭이 이어진 요르단쪽 사막을 지나, 케라메의 국경을 통과해서 바그다드로 향했다.
사방이 모두 지평선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지구는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돌았기에 이렇게 둥글어졌을까. 소실점이 사라져버리면 근대적 세계관에 익숙한 두 눈은 방향을 잃고 만다. 백미러로 보이는 것은 까마득한 도로와 햇빛. 깜깜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서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서울에서는 요르단인 운전기사와 둘이서만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 좀 걱정스럽게 생각됐었는데, 정작 달려가는 동안에는 천하태평이었다. 운전기사 왈리드는 줄창 아랍 가요테잎을 틀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아랍의 뽕짝 정도 되는 노래들이 아닌가 싶었다.
국경에서 만난 KBS 팀들은 팔레스틴 메레디안 호텔에 묵을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번에 내가 묵었던 곳이기도 한데, 이번(전쟁 취재)에는 팔레스틴 호텔이 대세인 것 같았다. CNN 방송이 그리로 갔다나. 바그다드에는 특급호텔 다섯 개가 있다. 제일 유명하고 폼나는 것은 알 라시드 호텔인데, 중세의 유명한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에게서 이름을 따오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이라크 정부가 귀빈이 올 때면 묵게 하는 곳이고, 유엔 무기사찰단의 숙소이기도 하다.
알 라시드는 1991년 걸프전 때에 폭격을 맞았었다. 그 뒤로 호텔 입구에는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의 얼굴을 그려넣어 오가는 이들이 밟고 지나가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참 치졸하다면 치졸한 보복인 셈이다. 며칠 뒤에 알 라시드 호텔에 갈 일이 있었는데, 부시 얼굴을 한번 보려고(밟아주려고) 했더니 위에 양탄자를 깔아놨다. 수위가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굳이 양탄자를 손으로 들췄더니 아예 시멘트로 붙여져 있었다. 그러고 나니까, 무기사찰 시작될 무렵에 '유엔의 항의'로 부시 면상을 지워버렸다던 보도가 기억이 났다.
나머지 특급호텔들은 알 만수르 밀리언, 팔레스틴 메레디안, 이슈타르 쉐라톤, 바벨(바빌론) 호텔이다. 이름들이 참 멋지다. 만수르는 위대한 칼리프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고, 팔레스틴 메레디안은 물론 팔레스틴과의 우호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프랑스계 메레디안 체인이 갖고 있던 호텔인데 이라크측으로 넘어가면서 팔레스틴이라는 말이 붙었다.
(여담이지만, 사담 후세인은 팔레스틴의 친구라고 항상 주장한다. 팔레스틴인들을 배에 싣고 건너가는 '선장' 사담을 형상화한 조각작품도 있다. 단순한 선전전이 아니라, 이라크에 팔레스틴 출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1950년대 팔레스틴 디아스포라 이후 수많은 팔레스틴 사람들이 요르단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지로 흩어져갔다. 팔레스틴 사람들은 서방과 교류도 많았고 교육받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흩어져 들어간 나라들에서 금방 중산층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슈타르 쉐라톤--이름 정말 멋지다. 쉐라톤 앞에 '워커힐'이 아니라 '이슈타르'가 붙으면 이렇게 어감이 달라질 수 있다. 팔레스틴 호텔 바로 맞은편에 있다. 바벨호텔의 이름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대사관에 들렀더니 미리 연락을 해놓은지라 현지 직원 카말이 컴퓨터를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면서 대강 본 스케치를 부랴부랴 서울로 보내고 팔레스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사진은 나중에 올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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