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모래의 여자

딸기21 2005. 4. 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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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沙の女

아베 코보 (지은이) | 김난주 (옮긴이) | 민음사 | 2001-11-10



너무나 '본질적'인 얘기를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리는 작가.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작가라는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그들이 툭툭 던진(사실은 고도의 계산 속에서 나왔을 터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몸뚱아리가 저만치 내팽개쳐지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다. 

소설을 손에 쥐기 전,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이에게 물어봤었다. "재미있어?" "응." 대답하는 사람의 말투에 잠시 뭔가 착잡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일단 나는 이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라고는 한 알갱이도 없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어쩐지 끌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소설은 금새 읽혔다. 순식간에, 정확히 말하면 낮잠 자기 전 반나절 만에 읽어버렸다(그래서 낮잠을 많이 못 잤다). 읽고 나서 머리 속이 정리가 잘 되지를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적어도 책 읽는데에 걸린 시간의 스무배쯤을, 그냥 생각만 했다. 


모래...라니. 모래. 모래? 모래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어야 말이지. 모래의 여자. 모래 속에 사는 여자. 모래 속에 사는 남자. 모래에 묻힌 마을. 모래가 흐르고 모래가 날리고 모래가 모든 것인 그런 곳. 모래에 파묻힌 인생.  

한 남자가 '실종'된다. 그냥 사라진다. 물이 모래에 스며들듯이, 그리고는 뙤약볕 밑에서 흔적없이 증발해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진져버린다. 남자는 모래에 묻힌 마을, 모래에 묻힌 집, 모래에 묻힌 여자에게 걸려들어 모래 세상의 일원이 된다. 
 

모래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실패를 거듭. 남자는 결국 스스로 '모래의 남자'가 된다. 참 희한한 소설이다.  
책을 읽고 나서 모래 세상 이야기가 부채의식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읽을 때엔 그저 적당히 재미있는, 조금 희한한 소설이라고만 생각을 했었다. 내 머리속에서 윙윙거리던 모래 세상의 모습은 다만 흘러가는 모래 더미, '더미'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모래, 그런 거였다. 책을 읽고 시간이 흐르니 이 소설, 그야말로 '완벽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집을 갉아먹는 모래바람처럼)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설은 픽션이다. '모래의 여자'는 픽션이다. 사람이 무슨 날벌레도 아닌데, 거미줄에 걸리듯 모래구멍에 걸려들어 나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있을수 있는 일인가. 모래에 묻혀 있는 세상, 거기서 자의반 타의반 묻혀 사는 사람들이라니. 이건 픽션이다. 그런데, 허구는 허구이되, 실상은 허구가 아닌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또한 '소설'이 아니겠는가. 픽션인 줄 알지만 너무나도 그럴듯하다. 

이런 일이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의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정말 '그럴듯하다'. 가족이 되었건 연인이 되었건 지금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건너기 힘든 심연을 시시때때로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심연을 '늪'이라 해도 상관 없고 '바다'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러니 '모래'라 부른들 그 또한 어떠하리.  

작가가 그린 모래세상은 그 '심연'에 대한 비유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 '모래'는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고리들이 사실은 얼마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그저 모래구덩이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모래는 희한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녹아웃시켜서 진을 빼버리고, 오를 수 없는 벽으로 군림하고, 물처럼 흘러서 생명을 위협하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모든 것에 스며든다. 그런가하면 원초적 본능을 부활시켜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들기도 한다.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한 몸이 되고, 모래가 깊은 곳에 아주 은밀히 물을 머금고 있다는 대발견을 한다. '모래의 에로티시즘'이라니, 별나기도 하다.  

작가가 그려낸 이야기는 허구이되 허구로 끝나지 않고, 작가가 잘라보이는 단면 또한 '단면'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픽션이지만 세상의 본질을 푹푹 찌르고, 길지 않은 소설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완벽한 소설'이다. 이리저리 참 잘도 꿰어맞췄다. 소설의 구성이 워낙 잘 짜여져 있다. 아무래도 이 작가는 성질 괴퍅하고 편집증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순순히 "재미있어"라고 말하기 앞서 조금은 착잡한 심정이 되게 만드는 이야기,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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