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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 카를 마르크스에서 아마르티아 센까지

딸기21 2011. 9. 27.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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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 Understanding Capitalism (2002) 
더글러스 다우드, 로빈 하넬, 마이클 리보위츠, 마이클 키니, 존 벨러미 포스터, 칼 보그스, 프레더릭 리
류동민 (옮긴이) | 필맥 | 2007-02-20




알라딘 '서재질'을 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간 훑어보는 일도 멈추게 됐지만, 이 책은 나오자마자 목차를 보고 바로 샀던 것 같다. 물론 그로부터 책을 다 읽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책은 자본주의를 비판했거나 혹은 주류 경제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거나 주류 경제학과 거리를 두어온 여섯 명의 '경제학자들'에 대해 소개하고 그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돼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의 틀은 자본주의(를 뒤따라다니면서 해석하는 데에 급급한 주류 경제학)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비판, 그리고 그 학자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는, 이중의 비판으로 구성돼 있는 셈이다.

책에서 다루는 여섯 명의 학자들은 이름만 들어도 쟁쟁하다- 바꿔 말하면 머리가 아프다. 첫번째는 카를 마르크스다. 캐나다 출신으로, 미국 제도주의 경제학의 본산 격인 위스콘신대에서 공부한 마이클 리보위츠가 마르크스 부분을 썼다. 아쉽지만 이 부분에선 그리 참신하거나 뒤통수를 쿵 때리는 얘기는 없었다. 

그 뒷부분은 요즘 책만 넘기면 내 눈에 들어오는 이름,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머리말을 쓴 미국의 원로 정치경제학자 더글러스 다우드가 베블런을 맡았는데, 이 책의 기저에 흐르는 것이 제도주의 경제학이다보니 베블런 부분의 분량이 많다. 

다우드가 주목한 것은, 어째서 베블런이 말한 기층 노동자들(마르크스 식으로 하면 노동계급 혹은 무산계급)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매몰돼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으로 이를 풀었지만 베블런은 '유한계급(부르주아지)처럼 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의 심리' 쪽에 초점을 맞추는 듯. 

그람시의 생각이 지배계급의 의도적인 공작을 강조한 것에 비해 베블런은 현대사회에 팽배한(베블런 시대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소비자주의'로 인해 노동계급의 의식성이 탈각되고 유한계급처럼 되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걸로 보았다. 미묘하지만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베블런은 그래서 "더 나은 다른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은 정치경제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춰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는데,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더'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은 나오지 않는다. 

세번째 인물은 안토니오 그람시다. 미국 내셔널대학 교수인 칼 보그스가 그람시의 저작들을 간략히 훑으면서 '그람시 이후의 그람시적인 순간들'을 짚었다. 대중의 힘이 한데 모이는 '결정적인 역사적 결집 지점'으로 든 것은 전후 유럽의 뉴레프트운동,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그리고 최근 벌어진 시애틀 투쟁(1999년 시애틀 반세계화 운동 이후 이어진 일련의 흐름) 등이다. 

보그스는 이런 운동들을 들며 그람시의 분열적 유산들(구성에서나 해석에서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짚으면서, 그람시의 작업에선 공장 착취시스템을 '넘어선' 산업사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람시의 분석에선 부분적이거나 상당부분 빠져있지만 포드주의가 강요한 사회적 기제들(합리화)은 너무나 강력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의 이데올로기적 장벽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보그스는 "훗날 그토록 결정적인 것으로 되는 글로벌 헤게모니의 영향, 즉 상품문화의 확장, 소비자주의, 기술적 합리성, 그리고 매스미디어 등"을 그런 장벽의 예로 들었다. 

이어지는 4장, 5장은 비판적 제도주의(마이클 키니)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프레더릭 리)의 흐름을 소개한다. 미국 경제학사에 대한 간략한 서술 정도로 읽고 넘겼다. 

6장은 다소 교조적인 사회주의자로 내게 각인돼 있는 존 벨러미 포스터가 썼다. 미국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의 아버지 격인 폴 스위지에 대해 다뤘다. 포스트케인지언 부분에서 책의 전반적인 맥락과 별개로 재미있게 본 부분은 "왜 수요가 줄어도/원자재값이 떨어져도 상품가격은 낮아지지 않는가" 하는 점. 경제학 공부한 사람들에겐 새롭지 않은 얘기이겠지만 근래의 휘발유값 논쟁(?) 등이 떠올라 눈여겨보게 됐다. 

요는, 가격은 시장에서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 기업들은 생산된 제품의 원가에 이윤(마크업)을 붙여 자기들에게 무조건 이익이 남게끔 값을 매긴다. 가격이 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시장에서 정해진다는 건 주류경제학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환상일 뿐이다! 

기업활동이 늘어나 가격경쟁이 커질수록 기업의 이윤은 줄어들고, 자본주의 시장엔 공황의 가능성이 상존하게 된다. 기업들은 언제나 생산시설의 일정부분을 놀리게 되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실업 역시 늘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고용으로 가려면 정부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책에 소개된 하이먼 민스키라는 학자의 제안은 재미있었다. 정부가 상설적인 고용촉진국 같은 걸 만들어서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최종 고용주(ELR)'가 되고 기업들은 '실업자 집단'이 아닌 정부 인력풀 안에서 고용을 한다는 것인데, 뜬구름 잡는 소리인 듯하면서도 시사하는 점들이 많다. 물론 책에선 이 제안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점(기업들은 ELR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 적자재정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 등)을 짚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7장은 아마르티아 센이다. "센은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과정에서 급진적인 정치경제학자들과 함께 연구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도 제도주의자도,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도 아니고, 생태주의 또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도 아니며, 더구나 급진적 정치경제학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센은 이단적 학파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센의 책 두 권(<불평등의 재검토>와 <윤리학과 경제학>)을 워낙 흥미롭게 읽었기에 센 부분을 눈여겨 보려고 했는데, 설명이 넘 거창하면서도 어렵고 재미없었다. 센이 반짝반짝 빛나는 지성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일격을 안겼지만 희한하게도 센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이론적으론 덜 정교하고 빈틈 많았던 후생경제학(혹은 개발경제학) 분야였다고 지적하는데, 좀 억지스러워서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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