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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논쟁적이면서도 깔끔한 독일사

딸기21 2006. 7. 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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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통일의 독일사 A CONCISE HISTORY OF GERMANY
메리 풀브룩 (지은이) | 김학이 (옮긴이) | 개마고원 | 2000-12-16 




솔직히 나는 합스부르크 카롤링거 이런 이름들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가 언제 어떻게 형성됐는지 하는 것은 잘 몰랐고, 신성로마제국이 독일 땅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내가 몰랐던 것이 그 뿐이겠냐만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세계사 책에서 스쳐듣고 넘어갔던 것들조차도 모두 잊은지 오래이고, 심지어 나는 독일이 어느 나라랑 국경을 맞대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워낙 유럽의 역사하고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 책 서평을 보고 한번 읽어봐야지 했었다. 제목이 ‘분열과 통일의 독일사’로 되어있는데, 케임브리지 세계사 강좌 시리즈로 나온 것들 중 첫 번째 권이라고 한다. 

앞부분 넘기는 것이 아주 수월치는 않았다. 첫머리에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편견’을 언급한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애당초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면서 끄덕끄덕 ‘아, 유럽 사람들은 독일에 대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나보구나’ 하며 지나갔다. 중세독일과 종교개혁 부분에서도 다른 유럽지역과 독일의 차이점 같은 것을 눈여겨보기엔 기본지식이 너무 없었다.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을 지나 프로이센에 이르면서 ‘여기서부터는 좀 열심히 봐야겠구나’ 했는데 별반 재미가 없었다. 재미가 없었다는 것은, 읽자마자 까먹었다는 얘기다. 

비스마르크를 지나 바이마르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책 읽는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반성하라’ 라고 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독일사에서 듣고픈 부분은 나치즘에 대한 것 아니겠는가. 어째서 그 나라에서는 나치즘이라는 것이 나왔고 그들은 왜 유대인을 조직적 계획적 ‘과학적’으로 학살했는가, 그들은 어떻게 분단에서 통일로 갔는가, 분단된 한반도와 분단된 독일의 역사 과정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몇 가지 질문들을 마음에 안고 읽었지만 책 한 권에서 해답이 나왔을 리 없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의문들, 쟁쟁한 역사학자들 간에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주제가 아니던가. 

한나 아렌트 이전의 서양 학자들은 ‘미친 히틀러’에게서 해답을 찾았거나 찾으려 애썼던 것 같고, 그 이후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독일의 특수성’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저자는 ‘히틀러 미친놈 이론’은 일단 배제한 뒤 후자, 즉 ‘독일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대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독일이 유럽 가운데 있다보니 지형적 경계가 없어서 나라 통일이 늦어졌다는 ‘지정학적 특수성’, 독일 민족이 원래 정치에 무관심했다는 ‘민족적 특수성’, 독일에는 그래서 제대로 된 혁명이 없어서 민중적 저항이 없었다는 ‘역사적 특수성’ 등 다종다양한 특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은 모두 뒷날 사람들이 결과를 놓고 역으로 독일 역사를 끼워 맞춰서 생산해낸 이론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저런 주장들을 ‘오늘의 결과에 과거를 맞추는 목적론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한다. 민족국가 수립을 기준으로 근대성 여부를 판단하던 20세기 역사학자들이 ‘독일은 민족국가도 못 세웠다가 뒤늦게 자본주의 들어선 탓에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 모양이 됐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을 경계하자는 얘기인데,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일본 역사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부딪치는 논란이나 마찬가지다. 아시아에서 유독 ‘근대화’에 성공해 침략주의로 나아간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태평양 전쟁으로 박살이 난 뒤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일본의 저력은 무엇인가를 따질 때에 서방과 일본 학자들이 흔히들 ‘일본의 특수성’을 거론하곤 하는데, 거기 대해서도 반론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마찬가지 시각에서 ‘특수성 이론을 경계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 

저 민족이 원래 유별나서 저런 결과가 나왔지, 라고 생각하면 풀리는 것은 없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도 의문이 계속 남는다. 바흐와 바그너... 기타등등 나는 잘 모르지만 위대하다는 수많은 문화예술가들, 시계처럼 움직였다는 칸트와 낭만파 시인들,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독일인들은 어째서 나치즘의 출현에 저항하지 않았는가. 궁금증은 여기를 향해 가기 마련이다. 

나치즘이라는 것이 1930년대 히틀러 집권 때부터 “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피바다로 만들고 유태인들을 몽땅 몰아넣어 죽이자”라는 형태로 제창된 것이 아니라는 점, 유럽에서 유태인 학살의 역사는 너무나 뿌리 깊은 것이어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당시의 사건을 재단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점, 바이마르 공화국 실패 이후 독일인들이 갖고 있던 민족주의적 열망, 히틀러를 비롯한 인종주의 확신범들, 독일 내에서의 소규모 저항들이 모두 분쇄된 뒤 유럽 안보체제마저 리스크매니징에 실패했다는 점, 그 밖에 여러 가지 많은 요인들이 겹쳐져서 초창기 유동적이었던 나치 체제가 그 지경으로 굴러갔다는 것인데... 

“그 어떤 단일한 요인도 나치즘의 대두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히틀러의 연설 능력이 비정치적인 독일인들을 유혹했다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도 역시 그릇된 일이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발전과 몰락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매우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발생한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다. 그 복합성 때문에 공화국의 역사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난감하지만, 그 복합성 자체가 축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복합성이야말로 ‘그러한 일이 또다시 발생할 수 있는가’라는 흔한 질문에 대해 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특수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독특한 다양한 요인들이, 또한번 똑같은 방식으로 혼합되고 결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정답이다.” 

그런가요? 그럴까요? 과연 정답일까요? 

요는, 나치즘 같은 반인류적 범죄집단, 범죄현상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복합적인 요인들이 또다시 합쳐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나치즘이 또 나타날까”라고 묻는다면 “똑같은 현상이 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당시와 다른 형태의 파시즘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복합적인 요인들이 혼합되어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파시즘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 다른 형태의 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붙여야 한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어쨌든 저자가 정답이라 부른 것이 미래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을 없애주는 대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 독일 근현대사를 깔끔하게 정리를 잘 해놓았다. 2차 대전 이후 현대사 부분도 신속간략재미나게 읽었다. 눈길이 갔던 몇 가지. 일본과 대비해서 독일에서는 과거사 ‘반성’이 잘 이뤄졌다고 들었는데 전후 ‘설문조사로 주민들을 전범이냐 아니냐 분류한 관료주의적 악몽’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또 서독과 동독의 관계, 정확히 말하면 서독의 동독 지원이 그 정도로 많았는지 몰랐다. 우리가 북한에 퍼주기 한다고 지랄 떠는 놈들(그런 놈들이 민족 얘기는 또 제일 많이 한다) 다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거 아냐? 이래저래 재미있었고, 더불어 '옮긴이의 후기'가 매우매우 훌륭했다. 그거 읽고 나니까 아, 이런 책이었구나 하는 정리가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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