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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26일, 전함 33대와 보조선 등을 거느린 일본 함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1884-1943. 이름 참 특이하지요;;) 장군의 지휘 아래 비밀리에 태평양으로 출항, 6500킬로미터 떨어진 하와이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야마모토(아래 사진)는 일본 제국해군학교와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2차 대전 때 해군 연합함대 총사령관으로 복무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 맞춰 해군 조직을 바꾸고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12월 7일 아침 일본군이 하와이의 진주만(Pearl Harbor)을 기습 공격하기 직전까지도 미국은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 교착상태를 외교적으로 풀어보겠다며 협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하와이 북쪽 400킬로미터 지점에 항공모함 6척을 배치해놓고, 폭격기 183대와 어뢰를 동원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전날 밤 일본군은 소형 잠수함 5척을 진주만에 접근시켰으며, 모선에서 출발한 잠수정이 진주만 15킬로미터 지점까지 다가가 있었습니다.
오전 8시, 일본 전투기들이 진주만 상공을 날아다니는 걸 보고서도 미 해군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머나먼 북쪽 대양에서 일본군이 장거리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서쪽에서 첫 번째 공습을 한 일본군은 8시 40분 북동쪽에서 2차 공습을 해 미 해군 전투기 기지와 진주만을 타격했습니다.이 공습으로 미군 태평양함대 대규모 전함 12척이 완전히 침몰하거나 파괴됐고 전투기 164대가 부서졌습니다. 미군 약 24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자 중 1177명은 일본 전투기의 폭탄공격으로 화재가 일어난 애리조나 호(USS Arizona. 아래 사진)에 타고 있던 해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 호(USS Oklahoma)는 어뢰 공격을 받고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캘리포니아 호, 웨스트버지니아 호, 유타 호, 쇼(Shaw) 호도 수장(水葬)됐습니다. 네바다 호는 대양에서 공격을 받고 바닷가로 도망쳐왔습니다. 메릴랜드 호, 펜실베이니아 호, 테네시 호는 크게 부서졌습니다. 진주만에 배치돼 있던 미 항공모함 3척은 일본군이 공격해오던 순간 항구를 떠나 훈련 중이어서 살아남았습니다.
(하와이에는 이 가라앉은 배들 중 일부가 미국 역사의 치욕이었던 그 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기념관으로 변해 지금도 구경꾼들을 맞고 있지요.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는 대신 낱낱이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어찌 보면 일본 또는 한국과는 다른 미국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였지요. 루즈벨트가 집권한 1930년대 미국의 지상과제는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이었고, 루즈벨트가 내놓은 해법은 잘 알려진대로 '뉴딜정책'이었습니다. 이후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세계 경제를 자본시장 위주로 재편할 때까지 뉴딜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기본 틀이 됐지요.
그러나 1930년대 말이 되자 미국은 또 다른 큰 장애물을 만났고, 더 이상 이전의 외교적 고립주의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유럽과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 파시즘이 미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낸 주범이었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상대로 한 침공과 점령과 팽창을 목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태평양의 지배국가로 떠오른 일본은 제국을 확장해가고 있었고, 이것이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린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시키는 방법으로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기까지, 미국은 일본의 야심과 군사적 능력을 계속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밑에서 1933-1944년 무려 11년 동안이나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미 역사상 최장수 국무장관으로 유명하기도 하고요(2차 대전 말미에 국무장관에서는 물러났지만 1945년 유엔 설립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 전, 병마와 싸우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주 찾던 조지아 주의 온천마을 웜스프링스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코델은 1941년 11월 30일 온천에 가 있는 대통령에게 워싱턴으로 급거 귀환해달라는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됐고, 하와이 시간 12월 7일 오후 5시, 밤을 맞은 워싱턴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개인 비서이자 최측근 참모였던 그레이스 털리(Grace Tully. 1900-1984)는 의회에 나가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털리는 FDR의 정치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털리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직원으로 시작, 엘리노어 루즈벨트의 당내 정치활동을 도우며 루즈벨트 가의 측근이 됐고 1941년에는 FDR의 개인 비서로 백악관에 들어갔습니다. 1945년 FDR이 웜스프링스의 온천에서 숨을 거둘 때에도 함께 있었으며 훗날 FDR재단의 사무국장을 지냈지요. 1949년 <FDR, 나의 보스(FDR: My Boss)>라는 회고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튿날인 12월 8일 루즈벨트는 상하원 의원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도 중계됐습니다. '치욕의 날 연설'(Infamy Speech)'이라 불리는 유명한 연설입니다. 좀 길지만 옮겨보지요.
어제, 1941년 12월 7일,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 날, 일본 제국 해군과 공군이 미합중국을 교묘하게 기습공격 했습니다. 미국은 그 나라(일본)와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할 방법을 그 나라 천황과 계속 논의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하와이의 오아후(Oahu)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지 한 시간 후에 미국 주재 일본 대사 등은 국무장관에게 미국 측 협상 서한에 대한 공식 답변서를 전해왔습니다. 이 답변서에는 외교협상을 계속하는 것이 소용없을 것 같다는 언급은 있었지만, 전쟁이나 무력 공격을 위협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할 때, 어제의 공격은 여러 날 혹은 여러 주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평화를 바란다는 거짓 선언과 표현들로 교묘하게 미국을 속여 왔습니다.
하와이 섬들에 대한 어제의 공격으로 미국 해군과 군사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거기 더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전함들이 어뢰 공격에 격파됐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 정부는 말레이 반도(Malaya)에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괌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일본은 따라서,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셈입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진 이 맹습(猛襲)의 성격을 늘 기억할 것입니다. 이 계획적인 침공을 이겨내는 데 얼마가 걸리든 간에, 미국인들은 정당한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최대한 방어할 뿐 아니라 이런 형태의 배신은 절대로 두 번 다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못할 것임을 확실히 보여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것이 의회와 국민들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적대행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을 맞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군대에 대한 확신과 우리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있다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 것입니다. 신도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이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을 가해옴으로써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는 전쟁상태가 개시됐음을 선언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합니다.
(굳이 부연설명을 하자면 저 연설에 나오는 미드웨이 섬은 하와이 군도 북서쪽에 있는 산호섬이죠. 작은 산호섬에 불과하지만 태평양의 군사요충지여서 2차 대전 때 미국과 일본 해군 간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섬이 더 유명해진 것은, 1942년 6월 5일의 ‘미드웨이 해전’ 때문입니다. 태평양 전선의 판도를 바꾼 해전으로 회자되지요. 당시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항모전단이 미군 폭격에 궤멸되면서 전쟁의 판세는 미국 쪽으로 기울었습니다만, 그것은 루즈벨트의 이 연설이 있고 나서 한참 후의 일이고요.)
상원은 대통령의 연설에 만장일치의 전쟁 지지 표결로 화답했고, 하원에서도 평화주의자였던 몬태나 주의 자네트 랭킨(Jeanette Rankin)을 제외한 모든 의원들이 전쟁개시에 찬성했습니다.
그날 오후 4시 루즈벨트는 전쟁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며칠 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루즈벨트는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대통령직을 네 번 연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임기는 채우지 못한 채 2차 대전의 종전을 코앞에 둔 1945년 4월 12일 63세의 나이로 집무실에서 사망했습니다.
다시 야마모토 장군으로 돌아가면- 야마모토는 1943년 미쓰비시 G4M 전폭기를 타고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를 지나다 미군 P-38 라이트닝 전폭기의 공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은 일본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육군 강경파와 생각이 달랐고 전쟁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 1891-1945) 총리가 승리를 예상하느냐 묻자 “진다”고 잘라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망자 중 1177명은 일본 전투기의 폭탄공격으로 화재가 일어난 애리조나 호(USS Arizona. 아래 사진)에 타고 있던 해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 호(USS Oklahoma)는 어뢰 공격을 받고 400명의 병사들과 함께 침몰했습니다. 캘리포니아 호, 웨스트버지니아 호, 유타 호, 쇼(Shaw) 호도 수장(水葬)됐습니다. 네바다 호는 대양에서 공격을 받고 바닷가로 도망쳐왔습니다. 메릴랜드 호, 펜실베이니아 호, 테네시 호는 크게 부서졌습니다. 진주만에 배치돼 있던 미 항공모함 3척은 일본군이 공격해오던 순간 항구를 떠나 훈련 중이어서 살아남았습니다.
(하와이에는 이 가라앉은 배들 중 일부가 미국 역사의 치욕이었던 그 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기념관으로 변해 지금도 구경꾼들을 맞고 있지요. 부끄러운 역사를 지우는 대신 낱낱이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어찌 보면 일본 또는 한국과는 다른 미국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였지요. 루즈벨트가 집권한 1930년대 미국의 지상과제는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이었고, 루즈벨트가 내놓은 해법은 잘 알려진대로 '뉴딜정책'이었습니다. 이후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세계 경제를 자본시장 위주로 재편할 때까지 뉴딜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기본 틀이 됐지요.
그러나 1930년대 말이 되자 미국은 또 다른 큰 장애물을 만났고, 더 이상 이전의 외교적 고립주의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유럽과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 파시즘이 미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낸 주범이었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상대로 한 침공과 점령과 팽창을 목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태평양의 지배국가로 떠오른 일본은 제국을 확장해가고 있었고, 이것이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아차린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중단시키는 방법으로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기까지, 미국은 일본의 야심과 군사적 능력을 계속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밑에서 1933-1944년 무려 11년 동안이나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입니다. 미 역사상 최장수 국무장관으로 유명하기도 하고요(2차 대전 말미에 국무장관에서는 물러났지만 1945년 유엔 설립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 전, 병마와 싸우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주 찾던 조지아 주의 온천마을 웜스프링스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코델은 1941년 11월 30일 온천에 가 있는 대통령에게 워싱턴으로 급거 귀환해달라는 전화를 걸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됐고, 하와이 시간 12월 7일 오후 5시, 밤을 맞은 워싱턴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개인 비서이자 최측근 참모였던 그레이스 털리(Grace Tully. 1900-1984)는 의회에 나가 전쟁을 선언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털리는 FDR의 정치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털리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직원으로 시작, 엘리노어 루즈벨트의 당내 정치활동을 도우며 루즈벨트 가의 측근이 됐고 1941년에는 FDR의 개인 비서로 백악관에 들어갔습니다. 1945년 FDR이 웜스프링스의 온천에서 숨을 거둘 때에도 함께 있었으며 훗날 FDR재단의 사무국장을 지냈지요. 1949년 <FDR, 나의 보스(FDR: My Boss)>라는 회고록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튿날인 12월 8일 루즈벨트는 상하원 의원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이 연설은 라디오를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도 중계됐습니다. '치욕의 날 연설'(Infamy Speech)'이라 불리는 유명한 연설입니다. 좀 길지만 옮겨보지요.
어제, 1941년 12월 7일,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 날, 일본 제국 해군과 공군이 미합중국을 교묘하게 기습공격 했습니다. 미국은 그 나라(일본)와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할 방법을 그 나라 천황과 계속 논의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하와이의 오아후(Oahu)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지 한 시간 후에 미국 주재 일본 대사 등은 국무장관에게 미국 측 협상 서한에 대한 공식 답변서를 전해왔습니다. 이 답변서에는 외교협상을 계속하는 것이 소용없을 것 같다는 언급은 있었지만, 전쟁이나 무력 공격을 위협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할 때, 어제의 공격은 여러 날 혹은 여러 주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해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평화를 바란다는 거짓 선언과 표현들로 교묘하게 미국을 속여 왔습니다.
하와이 섬들에 대한 어제의 공격으로 미국 해군과 군사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거기 더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전함들이 어뢰 공격에 격파됐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 정부는 말레이 반도(Malaya)에도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괌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어제 밤 일본 군대는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일본은 따라서,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셈입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진 이 맹습(猛襲)의 성격을 늘 기억할 것입니다. 이 계획적인 침공을 이겨내는 데 얼마가 걸리든 간에, 미국인들은 정당한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최대한 방어할 뿐 아니라 이런 형태의 배신은 절대로 두 번 다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 못할 것임을 확실히 보여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것이 의회와 국민들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적대행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을 맞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 군대에 대한 확신과 우리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있다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 것입니다. 신도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이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을 가해옴으로써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는 전쟁상태가 개시됐음을 선언해줄 것을 의회에 요청합니다.
(굳이 부연설명을 하자면 저 연설에 나오는 미드웨이 섬은 하와이 군도 북서쪽에 있는 산호섬이죠. 작은 산호섬에 불과하지만 태평양의 군사요충지여서 2차 대전 때 미국과 일본 해군 간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섬이 더 유명해진 것은, 1942년 6월 5일의 ‘미드웨이 해전’ 때문입니다. 태평양 전선의 판도를 바꾼 해전으로 회자되지요. 당시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항모전단이 미군 폭격에 궤멸되면서 전쟁의 판세는 미국 쪽으로 기울었습니다만, 그것은 루즈벨트의 이 연설이 있고 나서 한참 후의 일이고요.)
상원은 대통령의 연설에 만장일치의 전쟁 지지 표결로 화답했고, 하원에서도 평화주의자였던 몬태나 주의 자네트 랭킨(Jeanette Rankin)을 제외한 모든 의원들이 전쟁개시에 찬성했습니다.
그날 오후 4시 루즈벨트는 전쟁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며칠 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루즈벨트는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대통령직을 네 번 연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임기는 채우지 못한 채 2차 대전의 종전을 코앞에 둔 1945년 4월 12일 63세의 나이로 집무실에서 사망했습니다.
다시 야마모토 장군으로 돌아가면- 야마모토는 1943년 미쓰비시 G4M 전폭기를 타고 남태평양 솔로몬 군도를 지나다 미군 P-38 라이트닝 전폭기의 공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사망은 일본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육군 강경파와 생각이 달랐고 전쟁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 1891-1945) 총리가 승리를 예상하느냐 묻자 “진다”고 잘라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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