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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폴레옹 이후, 1815년의 동유럽

딸기21 2013. 10. 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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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815년의 동유럽, 신성동맹과 구시대의 종말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1812년)은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2년도 못 가 프랑스 제국은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의 연합군, 그리고 그들을 지원한 영국 등에 밀려 무너졌습니다. 연합 세력이 프랑스를 침공한데 이어 나폴레옹은 1814년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승리한 열강들은 비엔나에 모여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을 재편했습니다. 승자들의 이익나누기에서 동유럽은 중요한 몫을 차지했습니다.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승전국 연합은 유럽 지도를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그렸습니다. 또 자신들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영토에 경찰국가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낡은 왕정 질서에 향후 어떤 위협도 가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갖은 애를 썼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Hohenzollern 왕가는 다시 완전히 독립해서 일어섰습니다.

1815년의 비엔나 회의를 그린 그림



다 죽어가는 듯했던 합스부르크가는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새로운 영토를 얻었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모든 영토를 되돌려 받았습니다. 일리리아 Illyria 를 챙겼고 바바리아 남부도 손에 넣었습니다. 프로이센은 바르샤바 공국의 서부 지역과 단치히를 가져갔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을 대신했던 나폴레옹의 라인연합은 무너지고, ‘독일연방’이라 불리는 39개 게르만 국가들의 연방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연방수립 작업은 1820년에야 마무리됐습니다.


지도를 다시 그리는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 ‘분할’의 산물인 바르샤바 공국의 대부분 지역은 러시아에 귀속됐습니다. 차르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을 물리치는데 러시아도 공을 세웠으므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단일국가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나폴레옹을 이기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연합 세력들은 차르를 달래기 위해 폴란드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엔나에서 얻어낸 이 전리품 덕에 러시아는 옛 폴란드 영토 중 가장 인구가 많고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래저래 동유럽은 '밥'이로군요.


일리리아라는 지명이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어느 쪽이냐면-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이탈리아의 동쪽 발칸의 서쪽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4~5세기 무렵 로마 시대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동부까지 포함해 드넓은 지역이 
'일리리아 속주'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이었다고 합니다. 


★ 신성 동맹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자유주의적인 흐름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에 맞서 이긴 왕정국가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간에 1815년 9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신성동맹이 맺어졌습니다.


이 동맹은 특정 국가를 고립시키기 위한 이전의 동맹들과 달리, 동맹국들 내에서 민족주의·자유주의 반란이나 소요가 일어날 경우 무력 개입해 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한 역할은 없었고, 오히려 동맹 내부에서도 알력이 빚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새로 확보한 폴란드를 ‘폴란드 왕국’이라는 자치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통칭 ‘폴란드 의회왕국(Congress Poland이라고 쓰고 Russian Poland라 읽는다.... )’이라 불렸던 이 나라는 러시아와 영구적인 연합으로 묶여 있어, 러시아의 차르가 세습군주로 통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와 분리된 행정체계, 세임(의회),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은 인정됐습니다. 폴란드인들은 모든 공공부문에서 자기네 언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왕실 내에 차르의 총독이 머물렀고, 러시아 장군들이 폴란드 군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략 폴란드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얘기.... 


러시아는 정교가 지배하는 제국이고 폴란드는 가톨릭 왕국이었지만 전반적으로 폴란드의 지위는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만든 폴란드 왕국의 헌법은 폴란드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고, 폴란드 귀족계급들은 자기들의 왕국 내에서는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폴란드 왕자 아담 차르토리스키는 차르 알렉산드르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의 주요 각료직을 맡아 차르가 폴란드 의회왕국을 세우기로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왕국이 생기고 나서 얼마 동안, 차르토리스키와 폴란드 귀족들은 알렉산드르가 폴란드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영토까지 자기들에게 맡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러나 1820년 이후 알렉산드르는 정교의 신비주의에 점점 빠져들더니 폴란드 왕국의 헌법에 규정된 것들조차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폴란드 귀족들은 강경한 민족주의 구호들을 내세우게 되었고 1830년 급기야 반러시아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폴란드에 이어 합스부르크 쪽도 쇠퇴기를 맞았습니다.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져버린 데다, 합스부르크의 군사력도 생각만큼 신통치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버렸거든요. 유럽에서 존재를 보전할 수 있으려면 남아 있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쇠퇴를 상쇄하기 위해 합스부르크는 나폴레옹을 몰아낸 승전국 여러 왕조들 중에서도 특히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탄압하는데 앞장서며 반동의 선봉에 섰습니다.


이 자가 메테르니히... 18세기말~19세기 화가 토머스 로렌스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낭만적인 민족주의 운동과 자유주의를 짓밟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무모한 흐름이었습니다. 이런 반동이 다른 어느 곳보다 합스부르크 치하 비엔나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반동을 주도한 것은 그 이름도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총리 클레멘스 메테르니히 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1809-48년 재임)였습니다. 구시대적인 정치체제의 산물인 메테르니히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강력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맞서 관료주의를 밀어붙임으로써 정치의 시계를 뒤로 돌리려 애썼습니다. 


그는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경찰력을 늘리고 억압적인 법들을 만들어 관료 지배를 강화하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왕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를 밀어준 동맹 세력들도 그의 말을 믿었습니다. 만약 메테르니히가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위협을 근절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동맹국들이 군사적 개입에 나서기로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왕정들은 최고위급 대표단 회의를 정기적으로 가지면서 자기들끼리의 분란을 해결하고 정책적 협력을 모색했습니다.


백조의 마지막 울음이라고나 해야 할 유럽의 구시대적인 정치질서는 33년 동안이나 지속됐지만 결코 그들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왕정들 간 협의체는 프랑스와 영국의 탈퇴로 인해 10년도 못 가고 무너졌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법으로 탄압하고 경찰력을 동원해 감시하고 검열을 강화하는 것으로는 왕정을 뒤흔드는 사상들이 퍼져나가는 걸 막아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사상들은 나폴레옹과 전쟁을 하면서 국민 대중을 군 병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왕조들 스스로가 국민들 사이에 퍼뜨렸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비엔나에서 결탁한 왕조 세력들에게 잠재적으로 어떤 위협요인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세르비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의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이들의 반란으로 오스만 제국의 구질서가 무너진 것입니다.


★ 신비주의에 빠진 차르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왕조 세력들을 규합, 승전을 주도했던 알렉산드르1세는 말년에는 국내정치를 군 장성 아락체예프 Aleksey Andreevich Arakcheev 에게 맡기고 외교만 담당한 채 신비주의에 탐닉했습니다. 아락체예프는 개혁 요구를 탄압하고 반동정치로 일관, 국민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여기는 1856년의 러시아 모스크바... 사진 englishrussia.com


알렉산드르는 1825년 흑해 연안의 휴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서했는데, 워낙 갑작스런 죽음이어서 한동안 그가 비밀리에 수도원에 들어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알렉산드르를 자처하는 가짜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가만 보면 러시아에는 참 이런 가짜 소동이 많더라고요... 알렉산드르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니콜라이1세가 차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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