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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912-1913년의 발칸 전쟁

딸기21 2014. 5. 2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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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올해도 반이나 지나갔어요. 에효... 올봄은 세월호 이후 슬프디 슬프게 흘러가고 어느새 초여름이네요. 이대로라면 이 연재를 대체 올해 안에 끝낼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다시 정신 가다듬고 정리해 올립니다.



38. 1912-1913년의 발칸 전쟁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 열강에 갈갈이 찢겨나가고, 힘겹게 '근대'로의 변모를 이루며 '터키 공화국'을 향해가던 20세기 초반. 그 주축에 선 것은 케말 파샤가 이끄는 청년투르크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운 '투르크 민족주의'는 제국의 폭넓은 틀 속에서 용인되던 '다민족 문화'를 뿌리부터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관용적인 제국이 협소한 투르크 민족주의로 향해간 것일 수도 있고, 열강에 맞선 투르크 엘리트들의 어쩔 수 없는 방어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제국의 와해와 민족주의의 발흥은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1913년 발칸전쟁에 참전한 루마니아 군대를 담은 우편엽서. postcardscollection.wordpress.com


민족주의가 무엇보다 우선이던 시대였으니까요. 제국의 중심부에서 이런 움직임이 벌어질 때, 제국의 변방이었던 발칸에서도 청년투르크의 민족주의 정책에 격앙된 발칸 민족주의자들이 1912년 반 투르크 군사연합을 결성합니다. 하지만 투르크 민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발칸 민족주의자들이 규합됐다기보다는, 투르크제국이 무너지면서 드디어 발칸 사람들이 힘을 합쳐 반투르크 전선을 결성할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이었다고 봐야겠지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땅나누기' 밀약


발칸 사람들이 내분을 끝내고 뭉치는 데에는 러시아도 일조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이 한 세력으로 규합되길 바랐고, 발칸도 이를 알았습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그 해 초 전격적으로 상호 군사협력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그 전 해에 일어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공격(리비아 전쟁)에 끼어들어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는데, 이를 이용해 뒤통수를 친 셈이었습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여전히 투르크 통치를 받고 있던 지역들을 놓고 미래의 병합 계획을 짰다. 노비 파자르의 산자크 지방과 코소보 그리고 마케도니아 북부는 세르비아가 갖기로 했고, 트라케 서부는 불가리아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땅덩이는 자치 지역으로 삼되, 자치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할 경우에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나눠 갖기로 하고 그 분할계획도 미리 정했습니다. 남은 땅들은 러시아의 중재를 통해 추가로 분할하기로 했습니다.


발칸연합을 선전한 포스터. /WIKIPEDIA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와 불가리아 사이에도 반 투르크 군사연합이 결성됐습니다. 하지만 이 두 나라 사이에선 영토분할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모두 마케도니아의 요충인 테살로니키 항구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의 혼란을 틈타 이뤄진 '발칸 연맹'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 불가리아와 연합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발칸 연맹 Balkan League 이 구성됐습니다. 그러는 사이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의 공격과 내부적인 혼란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1912년 5월 알바니아인들이 청년투르크의 통치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당시 오스만 군대는 군기가 무너져 와해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해 10월이 되자 발칸 연맹은 투르크인들과의 전쟁에 나설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가 좀더 기다릴 것을 요청했지만 몬테네그로는 10월 7일 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했고, 다른 연맹국들도 열흘 뒤 일제히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이 전쟁은 일차적으로 마케도니아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투르크로부터 마케도니아를 빼앗아 나눠먹자는 것이 이 전쟁의 기본 성격이었던 거죠. 바꿔 말하면, 투르크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국들의 속내는 다 제각각이었다는 뜻입니다.


King George I of Greece visits the Bulgarian Tsar Ferdinand in the headquarters of the Bulgarian army in the city of Thessaloniki during the latter's visit there during the First Balkan War.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


가장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은 지리적으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불가리아였습니다. 다른 세 연맹국들이 마케도니아를 둘러싼 서부 전선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군기도 느슨한 투르크 군대를 맞은 것과 달리 불가리아는 트라케 지방으로 밀고 들어온 투르크 주력부대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케도니아 땅을 놓고 벌인 '동상이몽' 발칸 전쟁


세르비아 군대는 쉽게 투르크 군을 물리치고 마케도니아 땅의 3분의2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한 뒤 알바니아를 침공했습니다. 그리스 군대는 에피루스와 마케도니아 남부, 그리고 테살로니키를 점령해 불가리아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반면 불가리아는 에디르네를 놓고 투르크 군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불가리아군은 터키의 요새인 륄레부르가즈 Lüleburgaz 와 차탈자 Çatalca를 잇달아 공격하다가 지긋지긋한 참호전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1913년 3월 불가리아는 에디르네를 손에 넣긴 했지만 이스탄불과 알바니아의 유서 깊은 도시 슈코데르 Shkodër는 여전히 오스만 수중에 남아 있었습니다. 양측은 한 달 뒤 정전에 합의했으며, 5월에 적대행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런던 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으나, 발칸 연맹 국가들 사이에서 빼앗은 영토를 놓고 분란이 벌어졌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알바니아를 자치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그러려면 발칸 연맹이 결성될 당시 세르비아가 갖기로 한 지역의 일부를 신생 알바니아에 내주어야 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세르비아인들은 자기들 몫의 마케도니아 땅을 늘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가리아가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불가리아와 그리스는 모두 테살로니키가 자기들 것이 되어야 한다며 싸웠습니다. 발칸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루마니아인들도 피비린내 나는 민족주의자들의 잔치에 끼어들어 1878년 이래 불가리아가 점령하고 있는 남부 도브루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러시아의 '중재'... 이번엔 '반 불가리아' 연합전선


러시아가 연맹국들 사이에서 분쟁을 무마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13년 6월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반 불가리아 연합을 결성하고 불가리아가 침공해올 경우 마케도니아 점령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몬테네그로도 이들 편에 끼었습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는 모두 마케도니아 주변에 군대를 보냈고, 이들 호전적인 옛 동맹국들과 불가리아 간의 국경지대 무력 충돌이 잦아졌습니다. 불가리아에서는 다시 한 차례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었습니다. 군대는 즉시 행동에 나서 적들을 무력화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마케도니아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즉각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맞서지 않는다면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트1세와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겠다며 선동하는 바람에 불가리아 내부 여론은 더욱 시끄러워졌습니다. 


군 최고사령부는 투르크에 대적하기 위해 동부 국경 지대에 배치했던 군대를 대규모로 빼내 마케도니아에 면한 서부 전선 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 모든 전쟁준비가 끝나 페르디난트 국왕의 결단만 남은 상황이 됐습니다. 6월 말 불가리아 군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세르비아와 그리스 거점들을 공격했습니다. 


너무나도 어리석고 순진한 행동이었습니다.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즉시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몬테네그로가 뒤를 따랐고, 이어 7월에는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까지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불가리아 군은 적들의 단합된 공격 앞에서 무기력하게 저항을 해볼 뿐이었습니다. 


2차 발칸전쟁 이후 그려진 발칸의 국경선 www.psalmela.se



2차 발칸전쟁으로 만들어진 불가리아의 국경선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손쉽게 불가리아 군을 쫓아냈고, 오스만 제국은 에디르네를 포함한 트라케 지방을 다시 가져갔습니다.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남부까지 점령해버렸습니다. 2차 발칸 전쟁은 한달을 조금 넘기고 종료됐습니다. 반 불가리아 동맹국들은 불가리아를 먼저 공격해온 주범으로 만듦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도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라는 동정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불가리아는 1차 발칸 전쟁에서 얻은 땅 가운데 마케도니아 북서부의 작은 땅뙈기만 빼놓고 트라케 서부와 카발라 항구, 에디르네와 트라케 동부 대부분 지역, 그리고 마케도니아 내 점령지 등 거의 대부분을 다시 상실했습니다. 루마니아는 도브루자의 거의 전 지역을 챙겼으며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를 자신들끼리 나눠가졌습니다. 


그리스는 테살로니키와 마케도니아 남쪽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 제2의 도시인 비톨라를 포함해 중부와 동부를 모두 장악, 가장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 됐습니다. 불가리아와 그리스 사이에는 1913년 성립된 국경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트라케 Thracia/Thrace

발칸 반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트라키아라 불렸습니다. 북쪽으로는 다뉴브 강, 남쪽으로는 에게 해, 동쪽으로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 서쪽으로는 바르다르강 동부 산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트라케 지역과 오늘날의 국경선. 지도 WIKIPEDIA

불가리아 남부와 그리스의 트라키 주, 터키의 유럽쪽 영토인 겔리불루 반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킵니다. 트라케 지방의 대부분은 불가리아 영토이지만 4분의1은 터키 영토이고 그리스 영토도 일부 들어있습니다. 지형적으로는 다양한 분지들로 이뤄져 있으며 마리차 강이 흐릅니다.

트라케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4세기 필리포스2세가 다스리는 마케도니아에 점령됐습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트라키아 왕국이 세워졌으나 얼마 못 가 로마에 병합됐습니다. 3-7세기 게르만족, 슬라브족이 잇달아 들어오면서 트라케의 민족구성이 크게 바뀌었고, 7세기에는 오늘날의 불가리아인들이 왕국을 수립했습니다. 14세기 비잔틴 제국이 내전을 겪는 사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넘어가 1453년부터 400년 동안 지배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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