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미스김 때문에 화나는 이유

딸기21 2013. 5. 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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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는 여성운전자를 비하하는 말이고, 미스김은 직장 다니는 젊은 '비전문직' 여성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새 드라마 <직장의 신> 속 '미스김' 때문에 '미스김'의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원빈이 '아저씨'의 이미지를 바꾼 것처럼. 일단 김혜수같은 초특급 미모에, 100여가지 자격증,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와 러시아어등 온갖 외국어에 능통하고, 운전을 했다 하면 시내버스와 포크레인 정도는 돼야 '미스김'이다. 

미스김이 어떤 현실을 비꼬고 있는지 알기에, 이 드라마를 보는 느낌은 요즘 말로 '웃프다'. 웃긴데 슬프다. 서글프고, 속상하다. 극중 비정규직 '봉희'가 임신했는데, 사내 커플이라는 걸 속여야 하고(둘은 "어쩌다 보니 속이게 됐다"고 변명하지만 '어쩌다보니'일 리가 있겠는가) 임신 사실도 속여야 한다. 뭐, 일을 하는 여성들이라면 드라마 보면서 더이상 고개를 끄덕일 필요도 없이 공감하고 체감하고 절감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 드라마가 좀 불편하다. 한국 직장에서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 아닌 '일본의 심리'를 그대로 설파한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서다. 여성/비정규직이라는 이중의 약자를 다룬 이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고 절절해서 매주 빠짐없이 챙겨보면서도 속에선 살짝 뒤틀린다.

첫째는, 일본 드라마를 베껴 만들다보니 한국 사회와는 동떨어진 디테일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러시아 바이어가 아침 아홉시에 계약을 하자 한다. 서류가 들어있는 열쇠는, 하필이면 이 사실을 모른 채 아직 출근하지 않은 직원이 갖고 있다. 계약이 9시 정각에 이뤄지면야 좋겠지만, 3~5분쯤 늦어지는 거라면 계약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만 기다려달라 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정각에' 계약을 성사시킨다. 이 희한한 '정각 강박증'은 딱 일본적이다.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로 넘어가도 될 일이지만, 한때 '일드(일본드라마)' 좀 봤던 내게는 이 판에 박힌 일드 베끼기가 영 거슬린다.

뭐 이런 건 사소한 점이다 치자. 더 중요한 건, 일본 드라마의 '디테일'을 넘어 '가치관'까지 베껴온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직장 내 성차별을 넘어 성희롱적인 발언이 무지막지하게 등장하는 드라마. 이것도 현실의 반영이다 치자. 일본이고 한국이고 비슷비슷할테니. 일드 특유의 코믹한 상황들이 이어지는 것도 '드라마니까' 그럴 수 없다 치자. 

모든 것은 잘난 미스김의 능력으로 해결된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임신을 빌미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에게 폭언을 하고 해고를 위협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선 손쉽게 해결된다. 미스김이 상사와 싸워서(그것도 씨름으로!) 이기면 된다.

야쿠자 집안 출신 여교사와 찌질이 학생들이 등장하는 일본 드라마가 있었다. 잘난 아이들이 못난 아이들을 괴롭힌다. 교사라면 당연히 가해 학생들을 야단치고,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드라마 속 일본 여교사는 그러지 않는다. 대신 못난 아이들에게 "너희도 할 수 있어, 당당히 힘을 길러 이기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찌질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잘난 아이들을 이김으로써 당당히 그들과 어깨를 겨누는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잘잘못 따위는 없다. 이기면 될 뿐이다. 정의는 없다. 강해지면 될 일이다. 미스김의 회사도 저 학교와 비슷하다. 부당근로나 불법해고 따위는 없다. 이기면 될 뿐이다. 정의는 없다. 잘나면 될 일이다.

일본 드라마나 만화 속에 스며있는 이런 가치관을 볼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 불편함을 넘어 화가 났다. 확대해 말하면 일본의 제국주의, 과거사 인식 모두 저런 식 아니던가. 강하면 돼, 억울하면 힘을 길러보든가. 싸워서 이겨, 다 해결되잖아. 네가 지금 당하는 건 네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이것은 적자생존 전근대적 제국주의의 사고방식이다.

난 능력 없는 아줌마여서 이 나이 먹도록 나를 둘러싼 현실과 늘 불협화음을 낸다. 김혜수처럼 예쁘지도 않고 춤도 못 추고 씨름은 더더욱 못 한다. 포크레인은 커녕 승용차 운전도 못한다. 다행이라면 나는 정규직이다! 정규직 아닌 여성/남성 노동자들은? 자격증 100여개를 따고 완벽한 언어능력을 키우면 된다. 제도적 해법, 법률의 보호, 동지적 연대는 능력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액세서리일 뿐이다.

미스김의 팬임에도 불구하고, 난 이런 가치관이 TV화면을 통해 당연한듯 전파되는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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