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이웃동네, 일본

‘지옥같은 아소 탄광’ 일제 강제 징용 광부들의 신음

딸기21 2013. 8. 20.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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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먹고 자며 하루 16∼17시간을 일해 한 달에 받은 돈은 20엔이 채 안 됐다. 케이블선에 얻어맞아 생긴 상처에서는 피고름내가 진동했다.”

 

일제 시절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麻生太郞)의 증조부인 아소 다키치가 세운 아소 탄광 등 일본 탄광에 징용됐던 한인 수난사를 소개한 책이 나왔습니다. 지난 15일 출간된 일본 현대사학자 다케우치 야스토(竹內康人·56)의 <조사·조선인 강제노동 탄광편>은 조선인 광부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책입니다.

다케우치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인도한 ‘한반도 출신 군인·군속’ 명부를 조사해 2011년 조선인 26만여명의 전시 배치상황을 발표했던 역사학자입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의 단체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의 회원으로, 1980년대 말부터 고향인 시즈오카 현에서 일제 시기 강제연행 지역조사에 착수했습니다. 

2007년에는 20여년간의 조사 내용을 집대성한 <전시 조선인 강제노동 조사자료집>을 발표해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일본 내 일부 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를 제공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조사자료집’의 후속편 성격으로, 탄광노동자들의 실태를 밝힙니다.


사진 연합뉴스



책을 보지는 못했고, 연합뉴스가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책에 따르면 아소 그룹 계열 탄광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착취 지옥’이었습니다. 광부들은 많게는 하루 17시간 일했고, 한달에 한번 꼴로 대량생산령이 떨어지면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갱내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1932년 광부들의 월 평균임금은 20엔이 채 안 됐습니다. 당시 미쓰비시 제염의 평균 월급이 37.5엔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다른 징용 기업들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아소그룹 계열의 아카사카 탄광에서 1928년부터 일한 황학성씨는 “케이블선으로 얻어맞은 조선인들의 목덜미에 남은 뱀 모양의 상처자국에서는 피고름이 나왔고, 그 때문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휴일에 조선인을 모아놓고 이유없이 때리는 관리자도 있었습니다. 도주하려 하거나 태업한 사람은 근무 교대 때 정좌한 채로 목도와 벨트 등으로 구타당했습니다. 

조선인 광부는 린치를 당해 죽어도 사고사로 처리됐습니다. 아소 계열 탄광에서 숨진 조선인은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소그룹은 20세기 초반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재벌로 성장했고,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무렵부터 조선인을 강제연행해 동원했습니다. 후생성 기록 등에 따르면 1939~1945년 아소그룹 소속 탄광으로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1만623명입니다. 일본에서 정착해 살다가 ‘근로보국대’ 등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까지 포함하면 1만5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케우치는 후쿠오카현 지방 직업소개소의 ‘조선인 노동상황’ 같은 정부 문서와 아소 그룹 사사(社史), 강제징용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쳐온 르포작가 겸 사진작가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의 기록 등을 토대로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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