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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앙숙' 이란과 미국 사이, 화해 바람 부나

딸기21 2013. 9. 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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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대변인실이 짧은 성명을 하나 내놨습니다. “외국과의 핵협상 책임을 외교부에 이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8월 4일 로하니 대통령이 취임한 뒤 서방과의 핵협상 재개를 비롯해 관계개선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핵협상을 외교부에 맡긴다는 것은 미국도 기대하지 않았던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4일 로하니는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과 즉시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며 명백한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외신들은 “이번 유엔총회의 중심무대에는 로하니가 있다”며 이란의 달라진 모습을 분석하기 바쁩니다. 십수년 전 이란 개혁파의 기수 모함마드 하타미 대통령의 '문명의 공존' 유엔 연설 때를 연상하게 할 정도입니다(그 때 유엔에 아예 '문명의 공존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연설문이 책으로 나오고, 조금 과장해서 난리가 났었죠).



기대했던 미국과 이란 정상이 ‘34년만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대치해온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모멘텀이 만들어질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란 개혁파 정권 당시에 미국 빌 클린턴 정권이 일시적으로 관계 개선을 추진했지만, 2005년 이란에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지요. 

개혁파라기보다 중도온건 성향으로 분류되는 로하니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적극적으로 엉킨 매듭들을 풀 수 있을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합니다. 핵문제 말고도 시리아 사태, 이스라엘과의 관계, 민주화 문제 등 이슈가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문제에서 이란은 최소한 겉으로는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네요. 지금까지 핵협상은 최고국가안보위원회(SNSC)가 주관했습니다. 로하니 본인이 개혁파 정권 시절 이 위원회에서 핵협상 대표를 맡았으나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들어선 뒤 위원회는 강경파 일색으로 바뀌었고 핵협상도 교착됐습니다.


앞으로의 협상을 맡을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은 로하니가 취임과 동시에 미국을 향해 내민 ‘화해의 올리브 가지’라는 평을 듣던 사람입니다. 미국 유학파인 자리프는 생애의 거의 절반을 미국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특히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유엔 주재 대사로 일하며 미국 정계에 인맥을 쌓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 신분으로 자리프와 가깝게 지낸 조 바이든과 척 헤이글은 지금 미국의 부통령과 국방장관이죠.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이란전문가 수전 멀로니는 “1979년 이래 처음으로 미국과 친화력이 있는 인사가 이란 외교정책을 맡게 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자리프의 측근으로 유엔·프랑스 주재 이란 대사를 지낸 사데그 하라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이제 더이상 이란은 핵협상을 안보 문제로 보지 않으며, 정치·외교 이슈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핵협상 이관 성명이 나온지 몇시간 되지 않아, 이란과의 협상을 조율해온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이미 자리프와 접촉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번 유엔 총회에서 자리프는 독일의 기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을 만나 핵협상 재개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란 내부적으로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필두로 한 보수파와도 핵협상을 진전시킨다는 데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 같습니다. 협상권을 외교부로 옮긴다는 발표에도 이란 내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하메네이의 의중을 전달해온 보수 일간지 카이한은 관련사실을 짤막하게 전했고, 우익 언론 레살라트와 라자뉴스 등은 아예 침묵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메네이 스스로 지난 17일 정예부대 혁명수비대 앞에서 연설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되며 이는 이란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핵을 보유한 미국 등을 겨냥한 통상적인 비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로하니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으로 분석됐습니다. 바로 그 전날 로하니가 혁명수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고요.



관건은 이란이 핵 의혹을 풀기 위해 어떤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는 것이겠지요. 서방 정상으로서는 최초로 24일 뉴욕에서 로하니를 만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도 “핵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한 행동을 보이라”고 촉구했습니다. 독일 슈피겔은 앞서 이란 측이 테헤란 남부 포르도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 가동 중단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포르도는 나탄즈의 원심분리시설, 부셰르의 핵발전소, 이스파한의 우라늄 변환시설과 함께 서방의 의혹을 받아온 곳입니다. 시아파의 종교적 중심지인 쿰 부근 혁명수비대 기지 내에 있는데, 올초 포르도 시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피겔은 로하니가 유엔 총회에서 포르도 핵시설 가동중단을 발표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전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네요. 슈피겔이 좀 오버한 듯 ㅎㅎ


이란 쿰 부근의 포르도 우라늄 농축시설


다만 로하니는 서방에 분명한 화해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자국 내 강경파를 의식해 급진적으로 비치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번 유엔 총회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을 거부한 것도 로하니 측이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습니다.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지금 당장 오바마와 비공식적으로라도 만나게 되면 "상황이 너무 복잡해진다"고 했다네요. 로하니는 핵 문제에서 ‘메시지는 강력하게, 행동은 신중하게’ 하면서 줄타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서방의 이란에 대한 제재 현황


유엔: 2006년 이란의 해외자산 동결, 핵관련 물질 금수조치(결의안 1737호)

      2007년 이란 해외자산 동결 확대, 무기 금수조치(결의안 1747호)

      2008년 각국에 이란 금융거래·선박운송 감시 강화 촉구(결의안 1803호)

      2010년 이란 혁명수비대·국영선박회사 해외자산 동결(결의안 1929호)


미국: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뒤 미국 내 이란 자산 동결

      1987년 대이란 수출입 전면 금지

      1996년 이란·리비아제재법 제정

      2010년 포괄적 이란제재법으로 소비재·식료품까지 금수 확대


유럽연합: 2007년 유엔 결의에 따라 금수조치 시작

            2010년 이란산 석유 금수, 이란 중앙은행 역내 자산 동결


·기타: 한국·호주·캐나다·인도·이스라엘·일본·스위스 등 이란 금수조치 동참



이란이 손을 내미는 목적은 명확합니다. 유엔과 미국, EU 등의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것입니다. 유엔은 2007년 이란에 무기 금수조치를 취한데 이어 잇단 결의안으로 이란의 대외 금융거래와 선박운송 등을 금지시켰습니다. 이미 30여년째 이란을 제재해온 미국은 2010년 포괄적 이란제재법(CISADA)으로 이란산 소비재와 식료품까지 금수조치를 확대했습니다.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도 이란 제재를 풀어달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지난 7월 미 하원은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표결로 통과시켰습니다. 오랜 제재 때문에 이란 경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습니다. 로하니는 유엔 연설에서도 “경제제재는 폭력적인 처사”라고 맹비난했습니다. 미국이 제재 완화라는 당근을 내주지 않는다면 로하니가 자국 내에서 지지기반을 잃을 위험이 큽니다.

 

2009년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대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시위대를 유혈진압한 이래, 이란 내부 민주화 문제는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요인이 돼왔습니다. 지난주 정치범 10여명을 풀어준 데 이어, 이란 법원은 로하니의 유엔 총회 참석에 맞춰 23일 정치범 80명의 석방을 지시했습니다. 이란 프레스TV는 하메네이도 이를 지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시리아 문제’도 서방과의 또 다른 대화고리

ㆍ아사드 정권 지지 선회 여부 관심

이란을 둘러싼 현안 중 하나는 시리아 문제입니다. 이란은 러시아와 함께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옹호해왔습니다. 시리아는 아랍권에서 유일하게 이란과 가까운 나라이며, 이란에서 레바논까지 이어지는 ‘시아 벨트’의 연결고리입니다. 이란 강경파들은 최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를 중심으로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살리기 위해 지원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로하니 대통령은 강경파들과 선을 그으며 지금까지 시리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사드를 편들지 않은 겁니다. 로하니의 정치적 후원자인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이달 초 “아사드가 화학무기를 썼다”는 말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국은 서둘러 이런 말을 한 적 없다고 부인했습니다만... 지난달의 화학무기 공격 논란 때 시리아가 유엔 사찰단의 조사를 받아들인 것도 이란의 물밑 압박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를 논의할 다자간 회의에 이란도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유럽국들도 동의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24일 유엔 총회 때 로하니를 만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핵 문제와 함께 시리아 사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고 보도했습니다. 시리아 문제가 ‘외교적 협상’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황에서 이란이 미국 등 서방과 또 다른 대화의 고리를 만들지도 관심거리입니다.


미-이란 화해 움직임 최대 훼방꾼은 이스라엘

반면 이란과 미국이 급해빙 분위기로 가는 것을 유독 경계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24일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이란은 평화를 원하며 미국과 핵협상을 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한 데 대해 “가식적이고 냉소적인 연설이며 핵 의혹을 해소할 실질적인 내용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네타냐후는 “핵무기를 개발할 시간을 벌기 위한 이란의 획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핵 확산을 막기 위한 어떤 국제협약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이미 다량의 핵무기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누구보다 나서서 제기하며 ‘선제 타격론’까지 주장해왔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집트와 요르단을 제외한 중동 대부분 국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독 이란은 이스라엘과 사이가 나빴습니다. 특히 이란의 전임 마무드 아마드네자드 정권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야 할 나라”라며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자극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해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문제는 이란과 미국 사이의 핵심 이슈 중 하나입니다.


네타냐후는 로하니 역시 아마디네자드와 다를 바 없다며 “양의 탈을 쓴 늑대”라 비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치도 이전보다는 한결 누그러질 것이라는 기대가 조금씩 나옵니다. 

알아라비야 방송은 이번 유엔 총회에 로하니가 이란 의회의 유일한 유대계 의원인 시아막 모레 세드그를 데려갔다고 보도했습니다. 전임 정권 시절의 ‘반이스라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고 이 방송은 전했습니다. 로하니는 지난 19일 서방 언론들이 “홀로코스트가 신화라고 믿느냐”고 묻자 “나는 역사가가 아니라 정치인”이라며 대답을 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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