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부국,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 화석연료로 세계를 움직이는 산유국. 흔히들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세계 에너지 시장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중동 밖’ 나라들의 비중이 커지고 중동 산유국들의 위상이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올해 안에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가리켜 ‘사우디아메리카(Saudi America)’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런 변화가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경제적 효과를 넘어, 국제지정학에도 적잖은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아메리카'의 등장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서 “1991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 사우디의 석유생산량을 추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산유량에는 원유 뿐 아니라 에탄과 프로판 등 석유 액화 추출물도 포함된다. 올 8월 미국의 산유량은 하루 평균 1150만배럴로 사우디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며, 이달 안에는 사우디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됐다.
미국의 산유량이 늘어난 가장 큰 요인은 ‘셰일 혁명’이다. 셰일가스는 바다 밑 진흙이 퇴적돼 굳어진 암석층, 즉 혈암층(shale·셰일)에 들어있는 천연가스를 가리킨다. 셰일가스는 넓은 지역에 얇게 퍼져 있어서 과거에는 추출하기가 힘들었고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수평시추기술과 수압파쇄공법 같은 새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수평시추기술은 셰일층에 수평으로 시추관을 집어넣은 뒤 물, 모래, 화학약품 혼합액을 고압으로 뿜어내 암석을 깨뜨리고 가스를 추출하는 기술이다. 수압파쇄공법은 흔히 프래킹(fracking)이라 부르는데, 미국에서 1998년 상용화됐다. 모래와 화학 첨가물이 섞인 물을 높은 압력으로 혈암층에 뿜어 바위를 뚫은 뒤 천연가스를 뽑아내는 방식이다.
2005년 500만 배럴에서 2014년 900만 배럴로... 미국의 1일 산유량 증가
2003년 이라크 전쟁 무렵만 해도 배럴 당 20달러 대였던 원유 가격은 10년 새 크게 올랐다. 거기다 새 기술이 개발된 덕에 셰일가스를 파내는 게 경제성이 있게 됐다. 지난 몇년 간 미국을 짓누른 경제위기의 악몽이 가시면서 산업생산도 꾸준히 늘고 있다. 이런 요인들이 맞아떨어지면서 미국은 석유개발 붐에 휩싸였다.
2008년 하루 500만배럴에 불과하던 원유 생산량은 지난달 887만배럴까지 치솟았고 올해 안에 900만배럴을 돌파할 전망이다. 지난 2년 새 세계 석유공급량은 하루 평균 350만 배럴 정도 늘었는데, 이는 미국의 늘어난 산유량과 거의 일치한다. 더불어 미국의 에너지 수입은 줄었다. 미국의 전체 액화연료 소비에서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60%에서 내년에는 21%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미국은 수십년 간 금해왔던 원유 수출을 재개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미 상무부는 텍사스에 본사를 둔 2개 기업에 초경질유(콘덴세이트) 수출을 허용했다. 콘덴세이트는 천연가스를 파낼 때 나오는 부산물을 가공한 것이다. 미국은 오일쇼크 뒤인 1975년부터 원유 수출을 금지해왔는데, 콘덴세이트에 대해서는 “원유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수출길을 열어줬다. 이를 계기로 원유 수출까지 재개할 지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다.
가격결정력 떨어진 OPEC, 다급해진 사우디
이미 미국은 2012년 기준으로 사우디에 이어 세계 2위 산유국이다. 천연가스 생산량은 세계 1위다. 최근 몇년 새 세계 화석연료 에너지의 매장·생산·수출 모든 면에서 중동 국가들의 순위가 내려가고, 미국·러시아·캐나다·중국과 유럽국들로 중심축이 옮겨가는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동 미디어인 걸프뉴스 등은 미국이 에너지 최강국으로 부상한 데에는 셰일가스 공이 크지만 이라크전 이후 고유가 때문에 속도가 붙은 ‘에너지 효율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미국의 산유량이 늘어남으로써 세계 경제의 회복기에 유가가 덩달아 오르지 않도록 충격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데 유가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국제유가는 시리아·리비아 내전, 이라크 분쟁과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간 꾸준히 하락했다.
더불어 OPEC의 가격결정력도 떨어졌다. 오일쇼크 이래 수십년 동안 사우디는 OPEC의 생산 쿼터를 조절함으로써 국제유가의 급변동을 막는 ‘스펀지’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라크전 뒤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훌쩍 뛰어넘는 등 세계 산업생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요동을 칠 때에, 사우디는 완충역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산유국으로서 고유가 덕을 보기 위해 생산량을 동결시킨 게 아니라, 사우디조차 추가 생산 여력이 없어서 가격 조절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사우디는 미국의 부상을 경계하고 있다. 압둘아지즈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 석유차관은 파이낸셜타임스에 “우리는 국제 원유시장의 수급을 조절하기 위한 예비 생산능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산유량이 늘어나면서 당장 사우디는 유가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지난 8월 이후 아시아 정유회사들에 공급하는 원유 가격을 줄곧 낮췄다. OPEC 국가들은 유가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맏형인 사우디가 나서서 값을 떨어뜨리는 모양새다.
이란·이라크 시장복귀는 아직도 먼 일... 당분간 에너지시장 '탈 중동' 이어질 듯
중동 석유의 시장 영향력이 줄고 미국의 산유량이 늘어난 것은 지정학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지난해 2기 집권을 하면서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내세웠다. 최근 시리아·이라크를 다시 공습하고는 있지만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의 석유수입에서 중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3% 정도였는데 앞으로는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국보다 중국과 중동의 이해관계가 더 밀접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 해군함이 사상 처음으로 최근 이란과 합동 군사훈련을 펼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물론 에너지 시장에서 중동의 비중이 줄어든 데에는 정치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게 사실이다. 막대한 자원을 가진 두 나라, 이란과 이라크의 생산·수출이 정상적으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은 핵 의혹으로 금수조치를 당했다. 이라크 역시 사담 후세인 시절 오랜 금수조치를 겪었고 전쟁 뒤 아직 산유시설이 복구되지 않았다. 전쟁 전 이라크의 1일 산유량은 최대 800만배럴에 달했으나 지금은 300만배럴 수준이다. 사우디가 OPEC ‘형제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수출 유가를 내리는 것은 이란·이라크의 부활에 대비해 아시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란·이라크가 시장의 강자로 되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당분간은 에너지 시장의 ‘탈 중동화’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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