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김희경,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딸기21 2015. 3. 1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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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몇 장씩, 곱씹으며 읽었다.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기자 선배이고 지금은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활약하는 선배의 책이다. 


여행기를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데,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가이드북이 아니라 성찰의 기록이다. 길을 걸으며 발견한 스스로의 내면과 사람들에 대한 기록. 모두가 갖고 있는 불안과 우울과 자기불신과 실망과 좌절에 대한 관찰기이고, 혼자이면서 함께일 때 우리가 인생에서 배우는 것들에 대한 찬가다. 


재미있고 시큰하다. 어떤 구절은 몇 번을 다시 되짚어 가며 읽었다. 언제가 될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몇 년 뒤의 나는 산티아고에 가겠다며 워킹화를 고르고 있지 않을까. 마운트폴이란 게 대체 뭔지는 모르지만 그걸 두 개 사서 손에 쥐고 있지 않을까. 피레네 산맥을 넘어 어느 틈에 카미노를 걷고 있지 않을까. 힘들다 무겁다 끙끙거리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순례길을 돌아보고 있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게 무서웠다. 내겐 누구보다 강력한 회피본능이 있는 것같다. 감정적인 동요가 생길 것 같으면 늘 피하는데, 대표적인 게 책이나 영화다. 슬프거나 무서울 것 같다 싶으면 보지 않는다. 슬프고 무서운 것의 범위도 무척이나 넓어서, 웬만한 영화들은 대략 이 범주에 들어가버린다. 그러니 내가 찾는 것은 언제나 3D 아이맥스 코미디 판타지 애니메이션 이런 것들이다.


이 책은 이미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는 분들과 밥을 먹다가 이 책 이야기가 나왔다. 김 선배가 슬픈 일을 겪은 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서 쓴 것이라, 읽는 이들까지도 아프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 "그럼 나는 안 볼 거야." 내 회피본능에 따르면 반드시 피해가야 할 책이었다. 에세이나 여행기를 즐기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의 속내를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아서다. 말이나 느낌보다 글을 통해 관찰하는 것이 더 적나라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피해다니려 애써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김 선배는 남동생을 잃고 반 년 뒤 스페인으로 향했고 그 후 1년이 지나 이 책을 썼다. 나는 "이 책은 읽지 않을거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를 잃었다. 김 선배가 내게 이 책을 보내줬다. 피할 수 없구나...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지난 몇 달 간 줄곧 겪어온 증상이다. 책장을 넘겼고, 많이 울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가 수없이 던졌던 질문을 똑같이 했었구나. 부모님이 아팠구나. 아직 나는 멀었구나, 갈 길이 많이 남았구나...


읽고 난 뒤 덜 아픈 것은 아니다. 대체로 나는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려고 뭔가 노력을 하고 있지는 않다. 세상에 나 혼자 겪는 슬픔도 아닌데 유난떨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하고 무심한 척 할 자신도 이유도 없다. 책은 내게 위안이 됐다. 어떤 아픔을 겪고 계실지 나조차 짐작도 할 수 없는 엄마에게 이 책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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