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테러의 유비쿼터스 시대  

딸기21 2016. 7. 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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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남부의 그랑바상은 대서양에 면한 고즈넉한 해안 도시다. 말이 좋아 도시이지 프랑스 식민 시절의 건물들과 벽화가 그려진 담장, 바닷가에서 공 차는 아이들 외에는 별반 눈에 띄는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에서도 지난 3월 이슬람국가(IS) 연계 조직이 테러를 저질렀다.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그곳에서도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그랑바상의 바닷가.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는 어떤가. 남프랑스의 니스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고급 빵집은, 튀니지의 지중해 리조트는 또 어떤가. 10여년 전만 해도 이런 곳들에서 테러가 나리라고는 상상 못했을 것이다. 9·11 테러 뒤 마드리드의 통근열차가 폭발하고 런던 지하철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발리의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자폭테러가 일어났으나, 지금처럼 테러가 일상화되지는 않았다. 테러의 유비쿼터스 시대다. 이제 테러는 21세기의 종교다. 소외당하고 좌절한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하며, 비뚤어진 자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되고 그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보복의 명분이 된다.

 

쏟아져 나오는 분석들은 예상치 못했던 테러의 장소와 시간과 범인들을 놓고 분류를 하는 것에 그칠 뿐이다. 3년 전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 공격 이후로 테러전문가들이나 쓰던 ‘외로운 늑대’라는 용어는 평범한 언어가 돼버렸다. 차량 자폭테러나 총격전이나 인질극이 아니라 ‘탱크로리 질주’로 나타난 니스 사건은 테러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업그레이드했다. 이제는 이라크의 종파갈등이나 미국 학교의 총기난사, 아프가니스탄의 매설폭탄 대신에 식당과 콘서트장과 바닷가 리조트의 유혈사태와 거대한 탱크로리를 머릿속에 그리게 됐다.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 관광지인 태국 방콕에서도 위구르계가 폭탄 공격을 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 노르웨이에서는 극우파가 7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용하고 안전하다던 캐나다에서는 2년 전 오타와 의사당에서 총격이 일어났고 호주의 카페에서는 인질극이 벌어졌다. 범인들의 출생지도, 국적도, 종교도, 어떤 ‘프로파일링’도 먹혀들지 않는다.


트럭 테러로 84명이 숨진 프랑스 남부 니스의 거리에 16일(현지시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다발과 촛불들이 놓여 있다. _ Getty Images


테러가 날 것 같지 않은 장소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테러에 쓰이지 않던 방법으로 공격을 자행한다고 하지만 이미 지구상 어느 곳도 공포와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 돌이켜보면 세계는 오래 전부터 비극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었다. 인도양에 영국령의 작은 섬이 있다. 디에고 가르시아.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이 섬은 가려진 비극의 땅이었다. 미군에 기지를 내주려고 영국이 주민들을 아프리카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미군 전투기가 그 섬에서 이륙해 이라크를 폭격했다. 영국이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끌어간 노예의 후예들은 그 섬에 살다가 다시 뿌리 뽑혀 아프리카 내륙의 빈민촌으로 옮겨졌다. 이라크 침공 수십년 전에 디에고 가르시아에서는 폭력과 비극이 쌓여가고 있었다.

 

남태평양의 나우루.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인구가 1만명도 되지 않는 섬나라다. 호주 정부가 떼밀어 보낸 중동 난민들이 그곳 수용소에 갇혀 있다. 마다가스카르 섬과 아프리카 사이에 있는 인도양의 마요트 섬. 프랑스령 코모로 제도에 속한 이 섬의 천막촌에는 프랑스로 가려는 이주자·난민들이 노숙을 하고 있다. 

 

테러범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글로벌화된 지구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안과 밖의 구분은 더 이상 없다. 국경은 방어벽이 되지 못하며, 국적은 ‘우리와 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지난해 샤를리에브도 공격 뒤 테러에 반대하는 프랑스 시위대 일부는 바스티유로 향했다.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려는 이들과 그 가치를 모르는 이들 사이에 구분선을 긋는 시도였다. 1년 반 뒤 바스티유의 날, 프랑스는 다시 공격을 당했다.

 

디에고 가르시아나 나우루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일은 없지만 가려진 아픔들은 지구의 신경망을 타고 어딘가에서 곪아 터져나온다. 우리는 지구상 어느 낯선 곳의 아픔에 눈감고 있다가 불현듯 일어난 테러에 놀란다. 면역력 떨어진 몸의 어딘가에서 상처가 터져야만 아픔을 알듯. 장벽을 세우고 이주자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내부의 이방인들을 검문하는 것으로는 면역체계를 다시 세우지 못한다는 것을 하루가 머다하고 확인하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경북 성주에 또 다른 아픔을 쌓으려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안전한 곳, 비극이 없는 곳은 없다. 가려진 비극에 눈을 뜨고 잔혹함이 쌓이고 또 쌓이는 것을 막는 방법 말고는, 그렇게 해서 인간성과 연대를 조금씩이라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지구인에게는 어떤 피난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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