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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상원, 호세프 탄핵...게릴라 투사에서 ‘탄핵당한 대통령’ 된 호세프는 누구

딸기21 2016. 9. 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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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상원이 31일(현지시간) 오전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68) 탄핵안을 찬성 61표, 반대 20표로 통과시켰다. 남미의 맹주 역할을 해온 브라질 노동자당(PT) 정권의 추락이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호세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PT 지지자들은 브라질리아와 상파울루 등 대도시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고, PT에 등 돌린 우파 진영은 내분에 더해 부패 의혹 부메랑을 맞았다. 리우 올림픽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치른 브라질은 다시 정정 불안에 발목을 잡혔다.

의원 81명의 브라질 상원은 30일 낮부터 14시간에 걸쳐 호세프 탄핵안 토론을 했다. 63명의 의원들이 나서서 입장을 밝힌 까닭에 토론은 31일 오전 2시30분에야 끝났다고 폴랴지상파울루 등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탄핵 절차는 31일 오전 표결에서 마침내 종결됐다. 이날 표결 결과는 토론에서부터 예고됐다. 정족수의 3분의2인 54명이 넘는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호세프는 “민주주의를 위해 탄핵을 막아달라”며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8월 31일 브라질리아의 알보라다 대통령궁에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위). 이날 상원의 표결에 따라 탄핵된 호세프(아래 사진 가운데)가 알보라다 궁에서 지지자들에 에워싸여 있다. 브라질리아_EPA연합뉴스


2002년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취임으로 시작된 PT의 집권은 14년만에 끝나게 됐고, 미셰우 테메르 대통령 권한대행(75)이 2018년말까지 남은 임기를 떠맡는다. 브라질에서 대통령 유고로 선거 없이 권력이 넘어간 것은 1985년 이후 31년만이다. 테메르는 탄핵이 성사됨에 따라 이날 밤 곧바로 주요20개국(G20) 회의 참석차 중국 항저우로 떠날 예정이다.

불가리아 이민자의 딸인 호세프는 군부 독재정권에 맞선 게릴라 투사 출신이다. 모진 고문도 이겨내 군사정권 시절 ‘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룰라의 후계자로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돼 재선에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자신이 준비한 리우 올림픽 전후로 각종 경제지표들이 호전되고, 신흥경제대국 브라질의 저력에 세계가 다시 주목하던 시점에 몰락을 맞았다.

호세프가 물러나도 정국이 바로 안정을 찾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테메르가 이끄는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은 상원 최대 정당이지만 의석이 18석에 불과하다. 민주운동당은 PT와 연정을 구성했다가 국영 에너지기업 페트로브라스 부패 스캔들 등으로 호세프의 인기가 떨어지자 등을 돌렸다. 하지만 탄핵을 추진할 정도의 부패 혐의를 입증하지는 못했으며, 이 때문에 2012년 대선 캠페인 때 적자 재정을 흑자인 것처럼 보이게 회계조작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호세프를 탄핵했다.

그러나 탄핵 정국이 시작된 이후 오히려 테메르와 민주운동당의 부패 의혹이 줄줄이 터져나왔다. 지금 테메르와 손잡은 정당들도 언제든 갈질 수 있다. 브라질리아의 알보라다 대통령궁 앞에는 31일 PT 지지자들이 모여 집회를 시작했고, 반 호세프 시위대는 맞불 집회를 열었다.


게릴라 투사에서 ‘탄핵당한 대통령’ 된 호세프는 누구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결국 탄핵됐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게릴라 투사 출신의 대통령은 2012년 재선에도 성공했으나 노동자당(PT)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감,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둘러싼 부패 의혹, 빈곤 퇴치에 몰입하면서 벌어진 재정난 등에 발목 잡혀 불명예퇴진하는 처지가 됐다. 우파 진영은 그의 ‘결정적인’ 부패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지만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벌어진 ‘회계조작’을 이유로 그를 내쳤다.

‘탄핵 쿠데타’로 쫓겨난 호세프는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호세프는 1947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벨루오리존치에서 불가리아 출신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사업가였는데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호세프가 아직 10대 소녀이던 시절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호세프는 고교 시절부터 군사독재에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됐다. 1960년대 후반 호세프는 맑스주의 게릴라 조직인 콜리나(COLINA·민족해방사령부)에 들어가, 군사정권에 맞선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브라질 언론들은 호세프가 조직관리에만 관여했다고 보도했지만,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그가 “스스로 무기를 다뤘다”고 증언한다. 당시 호세프는 겨우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콜리나는 강경 좌파 조직이었고, 모험주의적이었다. 투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강도를 했다가 조직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호세프가 미나스제라이스 연방경제대학에 다니고 있던 1969년 콜리나는 리우데자네이루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호세프는 이후 30여년간 인생의 동반자가 된 공산당 간부 카를로스 데 아라우주를 만났다. 그 때 이미 아라우주는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아라우주는 라틴아메리카 곳곳을 다니면서 피델 카스트로, 체게바라와도 만난 적이 있다.

 

좌파 조직들이 합종연횡한 뒤에 VAR팔마레스(VAR Palmares·맑스-레닌주의 파르티잔 정치군사기구)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호세프와 아라우주는 곧 이 조직의 지도자가 됐다. 호세프를 추적하던 군사정권 수사기관들은 그를 “(체제) 전복의 잔다르크”, “전복세력의 여(女) 교황”이라 불렀다.

 

군사정권은 호세프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추적했습니다. 1969년 VAR팔마레스는 군사정권의 수혜자인 기업인 안토니우 델핌 네투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군사정권이 ‘브라질의 기적’의 주역이라고 선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 조직원들이 체포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호세프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고 하고, 그 해 결국 조직은 분열됐다.

 

이듬해인 1970년 초 동료 활동가가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호세프의 은신처를 실토했다. 호세프는 체포돼 22일간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구타는 물론이고 자동차용 전선까지 동원한 전기고문 등을 당했고, 건강도 많이 상했다. 그런 고문 속에서도 호세프는 조직의 동료들을 보호했다.

 

호세프는 2년 1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 1973년부터 히우그란지 두 술 연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훗날 대통령이 된 종속이론가 페르난두 엥히케 카르도주와는 이 무렵 학술행사에서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세프는 이 때부터는 ‘합법의 영역’으로 들어가 좌파 투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군사정권 고문피해를 증언함으로써 수사당국에 줄곧 시달림을 받았다. 캄피나스 주립대학으로 옮겨 경제학 석사·박사과정을 거쳤는데, 박사학위는 받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호세프는 포르투알레그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히우그란지두술 주(州)의 정치인 겸 행정가로 변신했다. 주 정부 각료를 거쳐,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루이스 이냐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정부의 광업에너지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 시절 호세프는 2015년까지 농촌지역 대부분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루스 파라 토도스(모두를 위한 전기)’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브라질이 산유국이고 에너지 대국이지만 농촌 지역은 여전히 전기가 없는 곳이 많고, 빈부격차가 에너지 소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카르도주 정권 때도 ‘루스 누 캄푸(농촌 전력화)’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2003년까지도 농촌지역의 절반만이 전기가 들어왔다. 룰라 정부는 포메 제루(Fome Zero·굶주림 제로)라는 빈곤타파 프로그램을 펼쳤는데, 호세프는 전기라는 기본 인프라도 이 계획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당에서 활동하다가 뒤늦게 노동자당으로 옮겨갔지만 호세프는 룰라의 신임을 얻었고, 2005년부터 2010년 대선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게릴라 출신 정치인이라는 것은 호세프에게는 훈장이자 족쇄였습니다.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자 상파울루 주재 미국 영사관이 미 국무부로 호세프에 대한 정보를 전송했는데, 게릴라 활동 전력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미국 측은 호세프가 ‘워커홀릭(일 중독자)이고, 경청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지만 정치적 기술이 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호세프는 공산주의에서 출발해 시장자본주의를 수용하는 실용주의자로 옮겨갔지만, 늘 자신의 ‘급진적인 뿌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2010년 대선 캠페인에서 호세프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사회당의 마르틴 오브리,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유럽녹색당, 프랑스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 등이 공개 지지서한을 보냈다. 브라질의 유명한 지식인·예술인들로부터도 지지선언이 줄을 이었다. 호세프는 56%의 득표율로 당선돼 2011년 1월 1일 취임했다. 호세프가 불가리아계라는 점 때문에, 당선 뒤 불가리아에서 호세프 붐이 일기도 했다.

 

2012년 호세프는 재선에 성공했으나 곧 정치적 위기 조짐이 일었다. 2013년부터 브라질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발단은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의 버스 요금이 올라갔다는 것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열악한 보건, 의료, 교육, 교통 인프라 문제가 모두 터져나왔다. 시위가 좀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상파울루에서 다시 임금인상과 교원 확충을 요구하는 교사들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리우 올림픽 준비 때문에 인프라 투자가 늦어지고 빈곤층을 위한 예산이 줄어들면서 그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호세프는 전임 룰라 정부의 성공적인 정책들을 잘 이어받아 해오긴 했지만, ‘정부와 정책은 인기인데 호세프 개인은 인기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소 거만한 이미지에 개인적 매력이 떨어지고,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지적들이 나왔다.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룰라의 후광을 등에 업기는 했으나 중도우파 야권연대에 부딪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성장과 분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노동자당의 노선을 지키면서 우파들도 다독이고, 선거 막바지에 최대 악재가 됐던 국영 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의 부패스캔들을 비롯한 부패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호세프의 내각에 들어갔던 우파 정당들은 인기가 떨어진 그에게 등을 돌렸고, 호세프는 임기를 1년 반 가량 남겨둔 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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