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일의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사랑을 받았고, 적도 많았고, 일화도 많이 남겼다. 무엇보다 그는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헬무트 콜은 전후 재건기를 거쳐 통일을 준비하던 시기 독일을 이끈 지도자이자, 세계사에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다. 콜의 ‘정치적 수양딸’로 불렸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금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21세기의 독일을 이끌고 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콜 전 총리가 루드비히스하펜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17일 일간 빌트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콜은 2010년 담낭 수술을 받고 2012년 심장 수술을 받은 데 이어 2015년에는 장 수술과 고관절 치료를 받는 등 노환에 시달려왔다. 여러 차례 위독설이 나돌던 콜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후 독일의 최장수 총리이자 유럽 통합의 상징인 그의 사망 소식에 세계가 애도를 표하고 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외교장관은 “독일의 위대한 정치인이었고 무엇보다 위대한 유럽인이었다”고 추모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콜을 기리며 EU 건물들에 조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콜과 함께 탈냉전의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던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어느 지도자들보다 먼저 성명을 내고 “자유의 진정한 벗, 전후 유럽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 중 한 명이라고 내가 생각해온 인물을 잃게 됐다”고 애도했다.
콜은 1982~1989년에는 서독 총리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부터 1998년까지는 통일 독일의 총리로 16년간 재임했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장기간 지도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위기와 선택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보여준 ‘뚝심’과 ‘배포’ 덕이었다.
1987년 6월 12일 당시 독일 총리였던 헬무트 콜(왼쪽)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고 있다.
1930년 독일 중서부 루트비크샤펜의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콜은 16세에 기독민주연합(CDU) 청소년당원이 되면서 일찍부터 정치에 발을 들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고, 39세에 라인란트의 최연소 수석장관이 됐다. 3년 후에는 기독민주연합의 대표가 되면서 서독 정계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 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그의 뚝심이 가장 빛났던 때는 두 개로 갈라졌던 독일이 하나가 되던 순간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시민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30년 동안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던 콘크리트 벽이 무너질 당시 콜은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동독 사람들이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실례지만 지금 바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곧바로 귀국한 일화는 유명하다.
바르샤바를 떠나는 순간, 그는 독일을 갈라놓았던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을 겨냥해 “독일인의 생존에 대한 어떠한 간섭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통일이라는 열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곧바로 베를린으로 날아가 “우리는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고 천명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력을 보여준 것은 베를린 장벽 붕괴 뒤 혼란 속에서도 20일 만에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을 발표한 것이었다. 독일이 하나가 되는 것을 처음부터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통일된 독일이 다시 군사강국이 될까 두려워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다. 콜은 외교 수완을 발휘, 독일 통일에 긍정적이었던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렇게 내놓은 것이 ‘10개항’이었다. 뒤에 콜은 “부시는 통일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최대 동맹이었다”고 회고했다.
1983년 4월 22일 영국 런던의 총리공관에서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오른쪽)와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시 ‘10개항’은 동독과의 정치협상의 최종 목표가 통일이며, 독일 통일은 유럽 통합의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동독에 자유·비밀선거를 도입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것뿐 아니라, 동유럽 국가들도 유럽 통합에 함께 해야 한다는 원대한 구상이 담겼다. 그의 생각을 틀 삼아 EU는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안았다. 콜이 ‘통일의 설계사’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콜이 세운 이 원칙은 무엇보다 독일의 부상을 경계하던 유럽의 이웃들에게 ‘독일은 평화의 벗’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그 뒤에는 모스크바를 세 차례 방문,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담판을 벌였다. 고르바초프는 결국 “독일 통일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며 물러섰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넘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넘어오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통일을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콜은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로 가는 것일 뿐”이라는 답변을 남겼다. 안팎의 경계와 우려를 물리치고 독일을 ‘통일이라는 열차’ 위에 올린 그는 회고록 <나는 조국통일을 원했다>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쟁이 다시 유럽을 휩쓰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콜은 유럽 통합에도 앞장섰다. 유럽이 하나의 화폐로 연결되면 평화가 정착될 것이라 생각해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유로화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2013년의 인터뷰에서 그는 “유로는 유럽과 동의어다.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사라졌다”고 평했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타계 소식에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애도 성명.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이던 메르켈에게 통일 독일의 초대 여성청소년부장관직을 맡겨 중앙 정계로 끌어올린 사람도 콜이었다. 메르켈은 소신대로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정치 스타일에서도 콜을 그대로 닮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99년 기독민주연합의 비자금 스캔들이 불거졌다. 메르켈은 정치적 아버지인 콜을 쳐냄으로써 위기를 돌파했다. 콜은 명예대표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다 2002년 9월 정계에서 은퇴했다. 메르켈은 2005년 사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총리에 올랐다.
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이었고, 때론 권위적이었고, 여러 지도자들과 트러블을 빚었다. 극우파 네오나치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과 터키계 이주자들의 집을 불태울 때에는 늑장대응을 해 우익 폭력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쪽의 작은 나라들에게 독일의 정책을 강요해 반발을 산 적도 있다.
콜의 임기 내내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와는 유럽 통합을 놓고 의견 차이로 공방을 벌였다. 2005년 콜은 자서전에서 “1989년 12월 독일 통일을 지지한다는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대처의 분노는 끓어올랐다”고 적기도 했다. “마거릿 대처가 화를 내며 ‘독일을 두 번이나 때려눕혔는데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고 말한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썼다. 대처뿐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정치적 반대파에게 독설을 퍼붓거나 성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을 살았다. 41년간 함께 했던 첫 부인 하넬로어는 200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8년 35살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결혼했으나, 말년에는 마이케에게 사실상 감금당한 채로 지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넬로어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으나 아들들 모두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딸기가 보는 세상 > 유럽이라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타뉴스]소젖으로 난방을 한다고? (0) | 2017.12.03 |
---|---|
장관도, 대사도 10년은 기본...키슬랴크 교체 계기로 본 러시아의 외교 파워 (0) | 2017.06.27 |
[런던 화재]신원확인 첫 사망자는 시리아 난민청년...“영국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0) | 2017.06.16 |
화재 이튿날에야 현장 가서...주민들 안 만나고 돌아선 메이 총리 (0) | 2017.06.15 |
[런던 화재]43년 된 아파트, 관리당국은 “불 나면 집에 있으라” (0) | 2017.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