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과학적 성과 못지 않게, 인생 스토리로도 세상에 깊은 인상과 감동을 안긴 인물입니다.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난 호킹은 후대 학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만큼이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남겼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봅니다.
호킹도 어릴 적엔 공부에 ‘실패’했다
호킹은 런던 하이게이트에 있는 바이런하우스스쿨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지만, 읽고 쓰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뒤에 그는 이 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학교 측의 너무 ‘진보적인 교육방식’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던 호킹은 몇 달 동안 여학교에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8세 때 세인트앨번스의 여학교에서 수업을 들었답니다. 1년은 허트포드셔의 매우 독립적인 학교인 래들릿스쿨에 다녔습니다. 호킹의 아버지는 아들이 명문으로 꼽히는 웨스트민스터스쿨에 다니길 바랐자민, 13세에 이 학교 장학시험을 보는 날 하필이면 아팠던 탓에 결국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호킹이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한 것은 1958년입니다. 당시 수학교사였던 디크런 타타의 도움으로 시계 부품과 전화기 자판 따위를 빼내 조악한 컴퓨터를 조립했습니다. 타타 선생은 호킹이 과학에 호기심을 느끼게 해준 인물이었고, 결국 호킹은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는 “수학과를 졸업하면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면서 약학을 전공하길 바랐다는군요.
친구가 필요해
호킹은 수학을 하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옥스퍼드에서 빨리 아들이 학위를 따기를 원했습니다. 수학으로 학위를 따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호킹은 물리학과 화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 17세에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컬리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1년이 지나도록 동급생들과 친해지지 못한 채 외롭고 지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지루했던’ 이유는 공부가 “너무 쉬웠기 때문(ridiculously easy)”이었습니다. 그에게 물리학을 가르친 로버트 버먼은 “호킹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었고,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둘러볼 필요가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평범한 애들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을 했고, 활동적이고 재치있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습니다. 음악과 과학소설, 보트클럽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호킹이 원했던 케임브리지대학 천체물리학과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려면 ‘1등급’ 성적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벼락치기 공부 끝에 턱걸이로 입학 자격조건을 맞췄다고 합니다.
프레드 호일 밑으로 가고 싶었지만
박사과정을 시작한 호킹은 현재 지배적인 이론인 ‘정상우주론’을 주도한 인물이자 ‘빅뱅’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진 이론물리학자 페르드 호일 밑에서 지도를 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데니스 윌리엄 시아마 밑으로 가게 됐습니다. 시아마 역시 당대의 유명 천체물리학자였지요. 이 쟁쟁한 학자들의 시대, 물리학계는 정상우주론과 우주 팽창, 빅뱅 같은 개념들이 발화하면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천재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블랙홀 중심부의 ‘특이점’에 대한 아이디어를 꺼내놓으면서 이론물리학자들에게 자극을 던졌습니다. 지난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킵 손은 저서 ‘블랙홀과 시간여행’에서 펜로즈가 던진 충격, 호킹과 나눴던 이야기들과 격렬했던 논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호킹은 1966년 일반상대성 이론과 우주론, 응용수학과 이론물리학을 결합시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지난해 케임브리지대학은 이 논문을 논문공유사이트에 무료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호킹이 제출한 ‘시공의 기하학과 특이점들’이라는 논문은 1966년 펜로즈의 논문과 함께 애덤스상을 수상했고, 두 사람의 협업이 이어집니다. 이후 1973년부터 호킹의 관심은 양자중력과 양자역학 쪽으로 이동해갑니다. 잠시 미국에 가서 연구했던 호킹은 1975년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몇 해 뒤 루카스 석좌교수가 됐습니다.
아픔과 사랑과 이별과 가족
개인사는 평탄치 않았습니다. 첫 부인 제인 와일드와 사귀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 뒤였습니다. 그런데 21세 때인 1963년 호킹은 세포와 근육이 위축되는 운동신경원질환(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2년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1965년 7월 결혼했고 2년 뒤 아들 로버트가 태어났습니다. 근육 위축 때문에 연구에 지장이 생겼고 극복하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1970년에는 딸 루시가, 1979년에는 세째 티머시가 태어났습니다. 호킹의 과학적 업적이 쌓여갔지만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아내 몫이었습니다. 생활에 지친 부부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으며, 제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도 둘 사이의 긴장을 높이는 이유 중 하나가 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호킹은 담당 간호사인 일레인 메이슨과 가까워졌습니다. 이 사실에 주변 동료들, 질병에 시달리는 호킹을 돕던 지인들,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결국 호킹은 제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1990년 메이슨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호킹이 제인과 완전히 이혼한 것은 1995년입니다. 이혼한 그 해 메이슨과 재혼을 했습니다. 제인은 1999년 펴낸 회고록에서 호킹과의 결혼에서 결별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폭로해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호킹과 일레인의 관계였습니다. 호킹 주변에선 일레인이 호킹에게 집착하고, 과보호하려 하며 호킹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2000년대 중반이 되자 일레인이 호킹을 신체적으로 ‘학대’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두 사람은 이번엔 ‘조용하게’ 이혼했습니다. 호킹은 다시 헤어졌던 아내 제인, 아이들, 손주들과 가까워졌고 제인은 회고록의 ‘개정판’을 냈습니다.
세계를 누빈 스타 물리학자
질병 때문에 이미 1960년대부터 언어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했고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가족과 절친한 친구들만이 그의 말을 알아듣는 상황이 됐습니다. 눈썹을 들어올리며 곁에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줘서 영어 알파벳 철자 카드를 고르게 하는 방식으로 힘겹게 소통하다가, 1986년 그를 도와줄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나게 됩니다. 워즈플러스라는 회사를 경영하던 월터 월토스가 자신의 장모를 위해 ‘이퀄라이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걸 개량해서 언어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하지만 건강은 점점 악화됐고 나중엔 손의 감각마저 잃어가면서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2005년부터는 뺨 근육을 움직여 1분에 한 단어를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통신장치를 사용했습니다. 2009년이 되자 휠체어조차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TV방송과 다큐멘터리 등으로 유명해진 호킹을 부르는 곳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1992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시간의 간략한 역사’라는 영화를 통해 대중적으로 이름을 얻었고, 저술과 강연도 계속했습니다. 국내에도 여러 저작이 출간된 미국 물리학자 겸 저술과 리어나드 믈로디노프와도 공저를 냈고, 칠레에서부터 이스터섬과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여러 곳을 여행했습니다.
블랙홀과 호킹의 ‘실수’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시간도 공간도 빛도 빨아들이는 절대적인 무언가로 알려져 있었지요. 호킹 역시 그렇게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블랙홀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올 수 있다면?
호킹은 1976년 ‘호킹 복사’라는 이름이 붙은 에너지 방출 과정을 이론화하면서 블랙홀이 증발하면 ‘모든 정보도 사라진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연구들은 정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블랙홀 정보 패러독스’입니다. 호킹은 이 문제를 놓고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존 프레스킬 교수와 내기까지 했습니다만, 결국 진 것은 호킹이었습니다.
2004년 호킹은 블랙홀 이론을 수정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내기에서 진 호킹이 프레스킬에게 사준 것은 ‘야구의 모든 것(Total Baseball, The Ultimate Baseball Encyclopedia)’이라는 야구 백과사전이었습니다. 호킹은 킵 손과도 블랙홀 연구를 둘러싸고 1975년에 내기를 했는데 져서 잡지 구독권을 사줬다고 합니다.
호킹이 숨을 거두자 영국 가디언 등 세계 언론들은 “과학자와 대중들 모두에게 감동을 안겼던 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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