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구정은의 세상] 밥값과 평화

딸기21 2018. 6. 1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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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의 어느 겨울, 한 달 동안 ‘알바’를 했던 회사가 있었다. 종일 서서 일하느라 힘들었지만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좋은 회사였다. 4대보험에 가입시켜줬고,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야쿠르트와 초코파이를 줬다. 가끔씩 그 회사를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출근하기 너무나 싫어 회사를 그만둘까 했던 기억, 그리고 국. 밥과 함께 나오는 그 국 말이다. 끼니 때마다 국물을 싹싹 퍼먹는 내게, 1cm 깊이로 퍼주는 국은 언제나 모자랐다. 낯선 분위기에서 쭈뼛거리느라고 밥 퍼주는 분에게 ‘국 더 달라’는 말도 못한 채 한 달 동안 점심을 먹었다.


기숙사는 공짜였다. 앉은뱅이 탁자 하나에 텔레비전을 놓아둔 동료 방에 놀러가기도 했다. 지방에서 온 친구들은 대개들 지하철 요금을 아끼느라고 기숙사에 살았다. 당시의 최저임금이 얼마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을 것은 확실하다. 다들 많이 일하고 적게 받았지만 사회 경험이 길지 않은 직원들은 그런대로 만족했다.


Study for LES CRIBLEUSES DE BLÉ (THE GRAIN SIFTERS), 1854 _ Gustave Courbet


앞으로는 밥값마저 최저임금에 넣는다고 한다. 바뀐 최저임금법을 가지고 여러 계산이 나온다. 제일 못 버는 사람들에겐 혜택 있다, 내년에 최저임금이 올라도 기대보다 좀 덜 받을 사람이 30만명에 육박한다, 그 중에 연 2500만원을 못 버는 이들은 몇 명이다 등등. 정부와 의원들은 이번 법을 꼬치꼬치 뜯어가면서 전반적으로 저소득층에게 유리하다, 어떤 이들에겐 다소 불리하다며 숫자를 내놓고 주장을 한다. 하도 복잡하게 해놔서, 시나리오를 어떻게 짜고 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른 계산결과가 나올 것이다.


셈법이 복잡해지면 임금구조를 잘 아는 쪽이 유리하다. 칼자루 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온갖 계산을 내놓지만 핵심은 결국 그것이다. 최저임금도 못 받거나 최저임금 수준에 간당간당하게 돈 받는 사람들을 정부는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점잖게 부른다. 이들 중에 월급에서 회사가 주는 밥값의 비중이 몇 %이며 그 중의 얼마가 최저임금의 몇%에 해당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야가 합의해 만들었다는 ‘안전장치’라는 것이 ‘밥값을 당장 모두 넣지는 않고 단계적으로 늘린다’라는 것인데, 어차피 2024년엔 다 집어넣는다고 하니 하나마나한 소리다. 2024년이 되면 최저임금 노동자들 전부가 일을 그만두거나 모두가 월급이 훌쩍 올라 ‘최저임금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 아니니까.


더 중요한 문제는 계산방법 자체를 사용자가 정할 수 있게 길을 터줬다는 것이다. 연간 네 번 주던 상여금을 열 두 번으로 나눠 최저임금에 끼워넣든, 밥값 대신 밥으로 줘놓고 돈 준 것으로 치든, 앞으로는 돈 주는 사람이 정할 여지가 많아졌다. 사용자가 돈 계산의 룰을 바꿀 때 동의라도 받게 했던 것은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보호벽이었다. 그걸 슬그머니 무너뜨렸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 기울어지고, 힘 없는 이들은 아래로 더 빨리 굴러떨어질 것이다.


또 민주노총 책임론이 나온다. 민주노총이 그다지 유능하진 못했던 것같다.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할 자리에서 사용자 쪽과 합의를 해내지 못 한 것은 사실이다. 최저임금에 삶을 걸어야 하는 비정규직들의 사정을 민주노총이 과연 얼마나 생각했는지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저임금을 공약대로 올리려면 정부는 어쨌든 법을 빨리 통과시켜야 했다. 민주노총이 국회로 공을 던졌다가, 법부터 고치자며 팔 걷어붙인 정부·여당에 ‘당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결과는 참 아프다. 노동계가 어설펐다고 비난한들 결과가 바뀌지도 않는다. 복잡하게, 그리고 규칙도 한 쪽이 정하게. 두 가지가 겹치면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이들에게 재앙이 된다. 그렇게 해놓고 정부와 여당은 근거도 딱히 없는 수치들을 들먹이며 ‘이해하라’고 한다. 아직 잘 몰라서 그렇지, 그렇게 많이 손해보는 것은 아니라며 설득을 하려 한다. 최저임금을 ‘대폭’ 올려주고 한 해도 되지 않아 속도조절 운운하더니, 이제는 밥값을 가지고 틀을 흔들어놨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최저임금을 많이 올려주면 되지 않느냐고? 2020년까지 최저시급을 1만원으로 올려준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약속일 뿐이다. 지금 만든 것은 두고두고 지속될 ‘법’이다.


법을 만들고 고치는 이들이 그걸 모를 리 없으면서 ‘디테일’만 놓고 국민을 설득하려 하는 건 안타깝고 속 터지는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진짜로 모른다는 말인가. 몇 푼 안되는 밥값에도 벌벌 떨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의 한 끼니를 더 비루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났다. 대단한 변화가 오고 있다. 화해와 평화가 눈 앞에 보이는 것같다. 한반도의 종전선언이 머지 않았다는 전망에 온 나라가, 세상이 들떴다. 기쁘고 반갑다. 내친 김에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까지 가고 싶다. 하지만 비루한 밥값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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