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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이주자 판자촌과 빌라촌, 바하마의 허리케인이 보여준 '재난 불평등'

딸기21 2019. 9. 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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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도리안’이 40시간 동안 휩쓸고 지나간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하마는 폭격을 맞은 듯 곳곳이 폐허가 됐다. 지붕이 날아가고 집들이 무너지고 비행기와 자동차들이 두 동강 나거나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바하마 정부는 4일(현지시간)까지 사망자가 최소 2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허리케인 ‘도리안’이 휩쓸고 간 바하마의 아바코섬의 마시하버에서 집을 잃은 아이티 이주민들이 4일 나뭇가지에 젖은 옷가지들을 걸어 말리고 있다. 마시하버 로이터연합뉴스

 

그 중에서도 피해가 큰 곳은 아바코섬이다. 나소가디언 등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아바코 공항은 침수됐고 활주로는 호수로 변했으며 섬의 중심지이자 바하마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인 마시하버는 주택 60%가 손상됐다. 특히 마시하버 외곽의 ‘머드’ 지역은 완전히 물에 잠겼다.

 

아바코는 산호초와 망그로브와 거북이들로 유명한 섬이다.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서 처음 마주친 원주민 부족 루카얀족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바닷가 저지대에 판잣집들이 늘어선 머드 마을로 더 알려져 있다. 그곳 거주민은 대부분 낮은 임금을 받으며 허드렛일을 하는 아이티 이주노동자들이다. 현지언론 아이위트니스뉴스가 지난해말 보도한 조사 결과를 보면 판자촌 주민 30%는 집에 수도시설이 없고 20%는 전기조차 쓰지 못한다. 정부는 올 7월말까지 주민들을 퇴거시키고 판자촌을 없애겠다고 했지만 허리케인이 닥친 순간에도 수천 명이 살고 있었다.

 

바하마는 루카얀 군도라 불리는 700여개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로, 쿠바와 아이티 북쪽에 있다. 총 면적 1만4000㎢에 2016년 기준으로 인구가 40만명에 조금 못 미친다. 인구 3분의2인 27만명이 뉴프로비던스 섬에 있는 수도 나소에 산다. 주민 92%는 아프리카계 후손이고, 5%가 채 안 되는 유럽계 백인 주민들이 부유층을 형성하고 있다. 원주민 인구는 1.9%에 불과하다.

 

 

바하마에서 아이티인들은 최하층 노동자의 대명사다. 8만명 정도의 아이티 출신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미등록이주자가 워낙 많다. 많게는 5만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하마는 작은 나라이지만 관광산업 덕에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3만3500달러 정도였다. 반면 아이티의 경우 인구는 1000만명이 넘는데 1인당 GDP는 2000달러도 안 되는 세계 최빈국이다.

 

그래서 배를 타고 아이티에서 바하마로 건너오는 이주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고도 잦다. 올 2월엔 길이 12m짜리 요트에 87명이 타고 가다가 배가 뒤집혀 27명이 숨졌다. 지난해 바하마 당국에 체포된 미등록이주자는 1200명에 육박했고, 중미 15개국 연합체 ‘카리브공동체’ 정상회의에서도 이 문제로 바하마와 아이티의 갈등이 불거졌다. 지난해 1월에는 이주자들에게 반감을 가진 주민이 머드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허리케인 한 방에 물 속으로 가라앉은 판자촌의 모습은 위기 때 극명히 드러나는 ‘재난의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줬다. 국내에도 번역된 <붕괴>의 저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경제학자 애덤 투즈 교수는 지난 3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바하마 허리케인 피해는 ‘위험의 위계구조’를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도리안의 위력이 셌다 해도, 부촌인 베이커스베이 등의 빌라촌 주민들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자체 보안시설을 두고 담장을 둘러쳐 ‘게이티드 커뮤니티’라 불리는 이런 주택단지 주민들은 위성통신을 이용한 경보시스템으로 허리케인 경고가 뜨자, 살림을 넣은 컨테이너를 배에 싣고 피신했다.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만든 고급 빌라촌들은 골프코스에 헬기 착륙장은 물론이고 자체 관세사무소까지 갖춘 곳들이 많다.

 

미국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의 항구에 4일 허리케인 도리안 피해를 입은 바하마 주민들에게 전달한 구호품들이 쌓여 있다.   포트로더데일 AP연합뉴스

 

반면 아바코와 그랜드바하마섬 일대의 서민층과 빈곤층 주민 7만여명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 중 17명이 아바코 섬 주민이었고, 3명은 그랜드바하마에 살고 있었다. 당국이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이들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바하마에 머물고 있는 투즈 교수는 “허리케인은 세계화를 거치며 형성된 이 섬나라의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노출시켰다”며 “우리 모두의 미래를 보여주는 전조”라고 적었다.

 

바하마 정부는 피해복구에 81억달러가 들 것으로 봤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프란치스코 교황 등은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 해안경비대와 영국 해군, 유엔과 구호기구들은 음식과 약품들을 전달하고 있다. 도리안은 4일 현재 초당 풍속 70m 이상인 ‘5등급’ 카테고리에서 초당 50~58m인 ‘3등급’으로 다소간 약화됐으나, 여전히 강력한 상태로 미국 남동부 플로리다·조지아주 해안을 지나고 있다. 미국 국립허리케인센터(NHC)는 5일 오전에는 사우스·노스캐롤라이나 해안을 거쳐갈 것이며 강풍과 홍수·폭풍해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4개 주에서는 200만명 이상에게 대피 경고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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