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해외문화 산책

60여년 함께 해온 '아주 특별한 북클럽'

딸기21 2019. 10. 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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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보다 더 소중한 북클럽.
 

23일(현지시간) 미국 abc방송이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어떤 독서 모임을 소개했다. 웹사이트에 실린 장문의 기사는 저런 문구로 시작한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모임 자체가 만남의 목적이 돼버리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이런 북클럽은 흔치 않다. ‘동네 여성들’의 모임으로 시작해서, 자그마치 60년 넘게 함께 책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모임의 역사가 이렇게 흐르는 사이, 회원들은 이미 환갑을 훌쩍 넘어섰다. 맨 처음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한 루이즈 와일드라는 여성은 지금 97세다. 1956년에 시작된 북클럽은 이제 매주 토요일마다 여러 세대가 함께 하는 책과 만남의 장소가 됐다.

 

1956년 만들어져 60여년 째 모임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에그헤즈 북클럽’ 멤버들. 맨 왼쪽이 ‘창립자’인 루이즈 와일드다. 에그헤즈 북클럽·abc방송 웹사이트


 

모임의 이름은 에그헤즈(Egg Heads) 북클럽. 달걀의 머리라니, 좀 이상하다. 대머리를 가리키는 속어이기도 하지만, 지식인이나 인텔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국엔 같은 이름의 퀴즈쇼도 있다. “늘 책을 읽었기에, 사람들과 함께 만나서 책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와일드는 abc의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처음 시작할 때에는 모임이 65년 뒤에도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와일드는 1954년 롱비치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다섯 친구를 사귀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 부인들이었던 친구들은 독서를 좋아하고, 서로 뭘 읽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렇게 해서 2년 뒤에 에그헤즈가 탄생했다. 모임 이름은 1952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한 애들라이 스티븐슨에게서 따왔다. 변호사·외교관 출신에 지적이고 머리숱이 없던 스티븐슨의 별명이 에그헤즈였단다.
 

주말의 독서모임은 어느새 이들의 삶이 됐다. 멤버가 하나둘 늘어났다. 모임의 규칙은 단순했다. 멤버 한 명이 장르에 상관 없이 책 한 권을 고른다. 모두 그 책을 읽고 와서 토론한다. 집에서 만든 빵과 군것질거리는 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속 성장기에 들어갔던 미국의 중산층 모임 문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인 셈이다. 그동안 자발적으로 모임에서 빠져나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멀리 이사를 떠나 더이상 참가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머니의 뒤를 이어 딸이 참석한다. 그렇게 대를 이어 책을 읽는다.
 

로리 윌스라는 여성은 롱비치 공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한 ‘책 전문가’다. 그의 어머니가 에그헤즈 멤버였다. 윌스는 고향을 떠났다가 몇해 전 고령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돌아왔고, 기력을 잃은 어머니가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게 된 뒤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에그헤즈 모임에 나갔다. 지난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윌스는 뒤를 이어 에그헤즈 멤버가 됐다. 창립멤버인 와일드의 초창기 친구들은 이제 남아 있지 않지만 ‘친구 딸들’과 책이 곁에 남아 있다.

 

올해 97세인 루이즈 와일드(왼쪽)와 초창기부터 북클럽을 함께 해온 재니스 윌스. 윌스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딸이 대를 이어 모임에 나오고 있다. 에그헤즈 북클럽·abc방송 웹사이트

 

에그헤즈의 뒤를 이어 여러 책모임들이 생겼다.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의 8월 보도를 보면, 롱비치에만 130개의 북클럽이 있다. 시 당국이 ‘롱비치 북클럽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하려 하는 과정에서, 이미 130개나 되는 클럽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디 에이브럼스는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책모임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책모임에선 어떤 책을 읽을까. 프로젝트 팀이 20개 클럽을 골라 설문조사를 했다. 에이머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가 1위였다. 두번째로 꼽힌 것은 한국계 미국 작가 민진 리(이민진)의 ‘파칭코’다.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에서 추천해 화제가 됐던 책이다. 8월에 한국을 찾았던 나이지리아의 여성주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 영국 작가 힐러리 맨텔의 ‘울프홀’, 미국인들의 고전인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앤 패칫의 ‘벨칸토’,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태라 웨스토버의 ‘에듀케이티드’ 등이 뒤를 이었다.
 

한국에선 책도 ‘돈 내고’ 읽는 유료 북클럽이 유행이다. 수십년 세월을 책으로, 이야기로 보내온 와일드 할머니가 첫손 꼽은 '기억에 남는 책'은 뭘까. 올해 맨부커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여성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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