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경선 구도가 꼬여버렸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후보 경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만일 블룸버그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2020년 미국 대선에서 3조원의 재산을 가진 74세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과 58조원을 가진 78세 블룸버그가 맞붙을 판이다. 미국 언론들이 시니컬하게 표현한 것처럼 ‘늙고 돈 많은 백인 남성(old, rich white guy)’들의 대결장이 된다는 얘기다.
블룸버그와 지지층이 겹칠 수 있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비상이 걸렸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다른 당내 경쟁자들도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샌더스의 캠페인매니저 파이즈 샤키르는 지지자들에게 “또다른 억만장자가 나타나 선거를 돈으로 사들이는 것이 미국이 원하는 것이냐”라는 e메일을 보내며 모금을 호소했다. 하지만 미국 대선에서 ‘부자가 판을 흔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내년 대선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의 톰 스테이어도 헤지펀드를 운용하면서 16억달러의 자산을 모은 갑부다.
백악관의 부자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해 ‘건국의 아버지들’은 당대의 부자였고 노예 소유주들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의 재산을 요즘 가치로 환산해보면 트럼프의 재산이 31억달러로 현재로선 1위다. 2위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2012년 잡지 애틀랜틱이 역대 대통령들의 재산을 시가로 환산한 적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의 재산은 2010년 기준으로 5억2500만달러였다. 3위가 토머스 제퍼슨으로 2억1200만달러였다. 두 사람은 상속받은 것에 더해 사업으로 자산을 불렸다. 민주당의 아이콘 존 F 케네디도 애틀랜틱 계산에 따르면 물려받은 재산이 1억2400만달러나 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비슷한 액수였다.
당선되지 못한 후보들 중에도 부자들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무소속·개혁당·공화당 후보로 3번이나 대선에 출마한 로스 페로다. 엘렉트로닉데이타시스템스 등의 기업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한 그는 1992년 대선 때 ‘제3의 후보’로 돌풍을 일으켜 민주·공화 양당 후보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러나 선거 막바지로 가면서 민주당의 젊은 정치인 빌 클린턴에 밀렸고, 클린턴의 승리로 귀결됐다. 페로의 재산은 지난해 기준 41억달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패배한 미트 롬니 전 공화당 대선후보도 부자다. 조지 롬니 전 미시간 주지사의 아들인 그는 투자회사를 경영하면서 2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모았다. 정·재계를 아우르는 금수저였던 셈이다. 아버지 조지는 1968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리처드 닉슨에게 패했다.
‘석유왕’ 존 록펠러의 손자 넬슨 록펠러는 보건·교육장관과 뉴욕주지사를 거쳐 1974~77년 부통령을 지냈다. 부자들 랭킹을 매기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포브스의 발행인 겸 편집장을 지낸 스티브 포브스는 그 자신이 4억달러 넘는 자산을 가진 부자다. 1996년과 200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앨 고어는 정치 명문가 출신에 부통령을 지냈고 대선후보로도 나섰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는데 부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테네시주의 연방 상원의원이었고, 옥시덴탈석유의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고어는 뒤를 이어받아 테네시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고 1992년 클린턴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부통령이 됐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단 하나, 대통령 자리는 갖지 못했다. 2000년 미국 선거제도의 맹점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놓친 대신, 2007년 노벨평화상을 받아 만회를 했다. 재산은 1억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힐러리는 강연, 케리는 결혼으로 ‘갑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재산은 5200만달러~1억1100만달러 사이로 추정된다. 2016년 대선에서 패배했고 사업을 한 것도 아니지만 자서전이 많이 팔렸고 고액 강연을 많이 해 부자가 됐다. 민주당 대선후보였고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존 케리의 재산은 2억달러다. 상속이나 사업이 아닌 결혼으로 갑부가 된 케이스다. 식료품업체 하인츠의 소유주 존 하인츠의 부인이었던 테레사 하인츠가, 남편 사망 뒤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케리와 결혼했다.
정치인들이 부자가 되고, 부자들이 정치인이 되는 풍토가 유권자들 눈에 곱게 비칠 리 없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4년 전 트럼프라는 부자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부자들에게 유리한 선거제도가 금권정치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TV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 선거캠페인 방송 때문에 막대한 자금을 모으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 없게 됐다. 갑부들은 이를 악용해 돈줄을 무기로 정치인들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트럼프를 지원한 코크 형제, 트럼프가 발탁한 벳시 디보스 교육장관 등이 ‘다크머니’로 불리는 정치자금으로 의회를 움직여온 우익 갑부 출신들이다.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만으론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트럼프처럼 직접 정치에 뛰어든다.
2014년 4월 미국 대법원은 개인의 정치기부금 총액을 제한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기부금 상한선을 아예 없애지는 않았지만 2년 기준 360만달러까지 낼 수 있게 했다. 금권정치의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 대선은 ‘수퍼팩(PAC)’이라고 불리는 모금 기관들이 기승을 부리는 돈 선거가 됐다. 지난 대선 때 트럼프가 돈을 많이 썼다고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도 치열한 모금경쟁을 벌였다. 워싱턴의 정치컨설팅·로비업체들, 이른바 ‘K스트리트’로 막대한 돈이 흘러갔다. 블룸버그까지 나서면 내년 대선은 사상 최대 자금공세가 펼쳐지는 선거가 될 수 있다.
한 표의 가격은 얼마로 오를까
“그는 맨해튼의 식당에서 10달러짜리 간단한 저녁을 먹는다. 다음날엔 개인 전용기를 타고 앨라배마로 떠난다.” 애틀랜틱이 지난 9일 전한 블룸버그의 근황이다. 블룸버그는 굳이 ‘오뎅 쇼’ 같은 서민 흉내를 낼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자수성가한 갑부이지만 중도적이거나 진보적인 의제들을 주도해왔고 행정가로도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기와 세금회피 논란에 휩싸인 트럼프 같이 ‘개처럼 벌지’ 않았고, 자선사업과 공익 캠페인을 하면서 ‘정승처럼’ 써왔다. 애틀랜틱은 “좌파들은 부자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블룸버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재산은 물론이고 자부심도 과시하는 캠페인을 할 것”이라고 썼다. 블룸버그의 오랜 측근 하워드 울프슨은 “마이크(블룸버그)는 대통령과 달리 진짜 억만장자”라며, 재산을 과장하기 좋아하는 트럼프를 꼬집었다.
블룸버그는 2001년 뉴욕시장 선거 때에 7400만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블룸버그가 루돌프 줄리아니를 이기기 위해 쓴 돈과 얻은 표를 계산해 ‘한 표에 99달러’였다고 분석했다. 2005년 선거에서는 8500만달러를 써서 ‘표당 112달러’로 올라갔다. 2009년에는 1억200만달러를 써서 3선에 성공했다. 표당 174달러였다. 이번엔 시장이 아닌 대통령직에 도전한다. 울프슨에 따르면 블룸버그는 아이오와, 뉴햄프셔, 네바다처럼 선거인단이 적은 주들은 제치고 큰 주를 잡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곧 TV와 온라인 광고들이 쏟아져나올 것으로 보인다. 과연 얼마를 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승산이 없어지면 쿨하게 일찍 접을 수도 있다.
기본소득 공약을 내세운 민주당의 ‘군소 후보’ 앤드루 양은 블룸버그 출마 소식에 대한 CNN의 질문을 받고 “광고 단가가 올라가겠네요”라는 한 마디만 했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한 표의 가격’은 얼마로 올라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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