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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 "하메네이는 살인자"...여객기 격추 뒤 터져나온 이란 반정부 구호

딸기21 2020. 1. 1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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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이란 수도 테헤란 시내에 시민들이 모여 미사일에 격추된 우크라이나 여객기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테헤란 신화연합뉴스

 

이란의 대학생들이 테헤란 시내에 나와 혁명수비대 등 군부와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가셈 솔레이마니의 피살과 이란의 이라크 미군기지 미사일 공격, 그 가운데 벌어진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 사건 등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이란을 둘러싼 중동 정국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격동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프레스TV 등 이란 언론들은 테헤란의 몇몇 대학에 11일(현지시간) 학생들이 모여 미사일 격추로 숨진 우크라이나 여객기 희생자 176명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은 테헤란대학과 아미르카비르대학, 샤리프대학 등에 학생들이 모여 촛불을 켜고 이번 사건으로 숨진 이란계 캐나다인 등을 추모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CNN 등 미국 언론들은 여객기 격추 사실을 당국이 인정한 뒤 옛 미국대사관과 가까이 있는 아미르카비르대학 앞에 수천명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학생들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인명을 희생시킨 당국과 군부, 그리고 ‘미국의 모험주의’를 동시에 비판했다고 CNN은 전했다. 시위대는 12일 오후에도 테헤란 아자디 광장에서 집회를 열 계획이다.

 

“하메네이는 살인자”

 

소셜미디어에는 시위대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퇴진과 여객기 격추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영상들이 올라왔다. 영상 속에서 시위대는 “하메네이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나라를 떠나라”고 했다. “하메네이는 살인자” “솔레이마니는 살인자”라는 구호들도 나왔다. 군부가 미국에 격추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일부러 여객기에 미사일을 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됐다.

 

지난 8일 이란 테헤란 외곽에 추락한 우크라이나국제항공 여객기의 잔해. 우크라이나 당국이 11일 공개한 사진이다.  우크라이나 국가안보위원회·AFP연합뉴스

 

여객기 사망자가 나온 아미르카비르대학의 학생들은 “내 친구를 죽였다” “적은 미국이 아닌 여기에 있다”고 했다. 명문 공과대학인 샤리프대 학생들은 “벨라야티 파기흐(성직자들의 통치)에 죽음을”이라 외쳤다. 국내의 한 이란 연구자는 “이란 내에서 최고지도자를 거명한 이런 구호들이 등장한 것은 예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전했다. 현지 언론 파르스에 따르면 당초 학생들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으나 반정부 구호로 옮겨갔고, 경찰이 나서서 도로를 막아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미국의 솔레이마니 살해 뒤 기세를 높였던 이란 정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재앙을 가져온 실수에 깊이 유감을 표한다”면서 “이런 마음이 기도하는 이들과 애도하는 가족들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사건의 경위를 조사해 즉시 모든 내용을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사고조사 발표에도 민심 들썩

 

사고 조사에 나선 혁명수비대 방공군 사령관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는 기자회견에서 대공방어시스템이 여객기를 적군기로 오인해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순항미사일이 날아온다는 정보에 여객기를 미사일로 오판했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자동으로 작동하며, 비행체를 인식하고 격추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10초가량 걸린다고 했다. 이라크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쏘기 전 항공당국에 비행금지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기지에서 19km 거리에 있던 여객기를 향해 미사일이 날아간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자데 장군은 책임을 인정한다면서 “같은 상황이 다시 일어난다면 (차라리)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건으로 이란인 82명, 캐나다인 63명, 우크라이나인 11명 등이 숨졌다. 이란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에 조사 참여를 보장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약속했다. 캐나다에도 조사에 참여할 인력의 비자를 발급했다. 압바스 무사비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희생자 가족들을 위한 특별 실무그룹도 만들었다고 했다. 법원도 별도로 진상조사를 명령했다.

 

이란 테헤란의 아미르카비르대학 앞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에 항의하며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테헤란 EPA연합뉴스

 

로하니 대통령은 성명에서 “(격추된) 여객기가 혁명수비대 시설이 있는 민감한 지역에 인접해 있었다”고 했고,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은 트위터 글에서 “미국의 모험주의 때문에 야기된 위기 중에 벌어진 실수로 재앙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사과, 진상조사로 분노한 시민들을 달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군부 위축되고 온건파 목소리 커질까

 

지난해 11월 이란에서는 휘발유값 인상으로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시민들은 경제난에도 아랑곳 없이 미국에 맞서고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 외국 일에 개입하는 혁명수비대와 강경파 정부를 강력 비난했다. 무능한 온건파 정부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신정(神政)체제 전반이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뒤 애도 물결 속에 민심이 ‘반미’로 결집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여객기 격추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음달 총선을 앞둔 여론은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사건의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988년 7월 미 해군함정이 이란 민간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하고 미사일을 쏴 290명이 숨지게 했다. 역대 최악의 여객기 오폭사고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사건은 이란인들에겐 반미 감정이 가시지 않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국 정부가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지난 9일(현지시간) 아미르 알리 하지자데 방공군 사령관(오른쪽) 등 이란 혁명수비대 장성들이 가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을 추모하고 있다. 하지만 반미 여론을 결집시키려던 군부와 보수파들은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로 거센 역풍에 부딪쳤으며 하지자데 장군이 국영방송에 나와 사과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사무실·AP연합뉴스

 

온건파 로하니 정부는 집권 뒤 국제사회와 핵합의를 하고 제재를 완화시키는 성과를 거뒀으나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하면서 설 자리가 좁아진 상황이었다. 하메네이를 필두로 한 성직자들과 혁명수비대 등 군부를 비롯한 보수·강경파들은 미국의 위협을 들먹이며 체제 수호를 강조해왔고, 특히 최근에는 반정부 여론을 억누르기 위해 인터넷 통제 등 사상·문화적으로 고삐를 강하게 죄고 있었다. 보수파의 반격에 번번이 발목을 잡혀온 로하니 대통령은 지난해 “대미관계와 신정 체제를 모두 국민투표에 붙여보자”는 제안까지 했다.

 

혁명수비대는 오폭을 인지한 뒤 하메네이에게는 곧바로 보고했으나, 로하니 대통령에게는 보고를 늦췄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파장을 줄이려 애쓴들, 여객기 격추사건은 솔레이마니 ‘애도 정국’으로 몰고가려던 보수파들의 구상에 큰 타격을 입힐 것으로 보인다. 혁명수비대 고위 장성이 국영방송 생중계를 통해 “모든 책임은 군에 있다”며 사죄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군부가 위축되고 온건·개혁파의 입지가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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