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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폴렉시트? 폴란드와 EU는 왜 싸울까

딸기21 2021. 10. 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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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s

 

유럽연합(EU)의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가 27일(현지시간) 폴란드에 하루 100만 유로, 약 14억원의 벌금을 내라고 명령했다. 폴란드는 2018년 대법원에 징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유럽사법재판소는 올 7월 이 위원회의 기능을 중단시키라는 임시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폴란드 측이 이행하지 않자, 이행할 때까지 혹은 최종판결이 나올 때까지 EU 집행위에 매일 벌금을 내라고 한 것이다.  


[바르샤바 보이스] Another huge penalty for Poland


유럽사법재판소는 7월 판결에서 징계위원회를 둔 폴란드의 판사 징계 절차가 EU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EU는 폴란드의 징계위원회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해친다고 본다는 점이다. 유럽사법재판소는 “EU의 법질서와 가치, 특히 법치주의의 가치에 심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나는 걸 막으려면 이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폴란드 정부는 사법부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징계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폴란드 내에서도 말 안 듣는 법관들의 입을 막기 위해 징계위를 설치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폴란드 정부는 7월 명령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징계위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고 결국 거액 벌금이 부과됐다.

 

룩셈부르크에 있는 유럽사법재판소. AP


폴란드 정부 대변인 표트르 뮐러는 유럽사법재판소의 조치에 대해 "공갈"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이 문제로 토론회가 열렸을 때 마테우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브뤼셀이 "우리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집권 법과정의당의 유력인사인 마렉 수스키 의원은 지난달 EU를 '브뤼셀의 점령군'이라 불렀다. 하지만 무기를 쥔 쪽은 EU다. 유럽위원회가 폴란드에 배정한 570억 유로의 코로나19 재건기금을 아직 승인하지 않았는데,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승인을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BBC에 따르면 최근 폴란드 내 여론조사에서는 시민 70% 이상이 정부가 패배를 인정하고 명령을 이행하거나 타협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폴란드는 2015년 법과정의당(PiS)이 집권당이 된 이래로 EU와 '법치 갈등'을 벌여왔다. 그 해 대선에서 법과정의당이 승리해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세임'이라 불리는 의회에서도 다수당이 됐다. 폴란드 법상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의회가 선출한다. 그런데 두다 대통령은 총선 전 의회에서 지명한 신임 재판관 15명 가운데 5명의 임명을 거부하고 명단을 바꿔버렸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법과정의당이 사법부마저 장악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A  Committee for the Defence of Democracy  protest in Warsaw against Poland's new government, 12 December 2015 WIKIPEDIA


2016년에 법원은 두다 대통령이 재판관 명단을 바꾼 것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곧바로 뒤집혔고 두 달 뒤 다른 법원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랬더니 폴란드 정부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나중의 판결은 법원의 판단임에도 ‘자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폴란드 안에서 거센 반대 시위가 일어나 ‘헌법 위기’라 불리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으며, EU도 법치주의를 무시한 행태로 판단하고 EU조약 7조에 따라 폴란드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폴란드 민주주의 문제가 EU와의 싸움으로 확대된 것이다.

EU와 폴란드는 다른 이슈로도 줄곧 갈등을 빚어왔다. 법과정의당 정부가 추진한 낙태 금지령, 성소수자 커플의 혼인신고와 입양금지 조치 등으로 계속 마찰이 일었다. 낙태금지령은 결국 EU의 압박에 철회됐지만, 성소수자 권리를 둘러싼 '문화충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올 7월 유로2020 축구대회 때 폴란드 정부의 성소수자 인권침해에 맞서서 독일인들이 양국 경기가 열리는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 앞에서 무지개 시위를 했던 것도 유럽 주류의 가치와 폴란드 우파가 내세운 가치가 충돌한 한 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폴란드와 체코 접경지대인 투로프에 탄광이 있는데, 환경파괴와 노동인권 문제 거듭 제기됐다. 체코는 이 탄광을 폐쇄시켜달라고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탄광을 즉시 폐쇄하라고 했지만 폴란드는 따르지 않았다. 9월에 유럽사법재판소는 탄광을 닫을 때까지 하루 50만유로씩 벌금을 내라고 폴란드 정부에 명령했다.

 

PiS party leader Jarosław Kaczyński blamed the courts for undermining his radical political program Omar Marques/Getty Images


법과정의당은 반유럽 성향에 민족주의를 내세운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다. 2001년 쌍둥이인 레흐 카친스키, 야로스워프 카친스키 형제가 창당했다. 두 형제는 아역배우로 폴란드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만든 이 정당은 2000년대 이후 유럽을 휩쓴 우파 바람을 타고 성장,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해 레흐 카친스키가 대통령이 됐고 동생은 총리를 맡았다.

 

2007년 국내 정세가 바뀌면서 친유럽파인 도날트 투스크 정부가 들어섰는데 투스크 총리는 EU 정상들의 회의인 유럽이사회 의장까지 지낸 친유럽파였다. 하지만 2015년 난민 반대 기류와 포퓰리즘 선동에 기대어 법과정의당이 다시 집권했다. 쌍둥이 가운데 레흐는 2010년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나 야로스워프는 계속 대표로서 당을 장악하고 있다. 법과정의당은 보수적인 가톨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민자들과 성소수자 권리에 반대해왔다. 지난해 성소수자 권리를 위축시키는 법안들을 통과시킨 두다 대통령은 LGBT운동을 ‘외국 이데올로기’라고 폄하했고, 소련 시절 만들어진 독트린이라는 주장을 한 적도 있다.

 

[로이터] 'You are playing with fire': EU faces crisis over Polish court ruling

사법부 장악, 민주주의 원칙 침해…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정치적 논란들이다. 하지만 폴란드를 둘러싼 문제는 국가와 지역 통합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어서 유럽 전역이 주시하고 있다.

 

LGBT activists protest at Polish president's campaign rally Reuters

 

이달 초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EU 법의 일부가 폴란드 헌법과 양립할 수 없다면서, 폴란드 법이 EU 법에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우르술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유럽 법질서의 통합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고 비판했다. 회원국들이 자국법에 우선권을 주는 것은 EU 조약에 위배되고, EU의 설립근거인 로마조약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성명에서 “EU의 4억5000만 시민과 기업들에게는 법적인 확실성이 필요하다”면서 후속 절차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장 아셀보른 룩셈부르크 외교장관은 EU 외교장관 회의에서 "폴란드 정부가 불장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독일 외교장관은 "EU 회원국들은 공통의 가치와 규칙을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면서 이는 "단순한 도덕적 약속이 아니라 법적 약속이기도 하다"고 폴란드를 비판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폴란드에 대해 모든 권한을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BBC] Poland stokes fears of leaving EU in 'Polexit'

Canadian cartoonist Bado's drawing about nascent speculation of a forthcoming "Polexit".   © Bado, Cartooning for Peace

 

하지만 갈등은 더 악화됐으며 이제는 폴란드의 EU 탈퇴, 즉 '폴렉시트(Polexit)'가 공공연히 거론된다. 폴란드 정부나 법과정의당이 공식적으로 거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야로스워프 카친스키의 측근인 리자드 테를레키 의원은 지난달 영국이 EU를 박차고 나간 것을 가리키며 “브뤼셀 관료의 독재가 패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표현했다. 그는 폴란드가 EU 안에 남아있기를 바란다면서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과감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한 우익주간지는 최근 ‘폴렉시트,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친정부 언론인 야첵 카르노프스키는 BBC에 “폴렉시트는 상상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얘기이고 폴란드는 영국보다 훨씬 약하다”면서도 폴란드가 브뤼셀의 ‘합법적인 식민지’가 될 것인지, 아니면 EU를 떠날 것인지의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했다. EU를 사실상 이끌고 있는 독일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는 주장도 나왔다. 이를테면 집권당의 한 의원은 “독일이 우리에게 법치주의를 가르칠 수는 없다. 과거의 법치주의에 대해 그들은 1유로도 내지 않았다”면서 나치 시절의 과거사를 상기시키는 말을 했다.

 

One opinion poll suggests most Poles think the government should either concede or compromise. EPA


폴란드 국민들은 EU에 남고 싶어하며, 우파 정부와 EU의 갈등이 커져 사실상 퇴출당하는 사태가 올까봐 걱정하는 쪽이다. 폴란드는 2004년 EU에 가입한 이래 유럽을 무대로 경제를 키웠다. 게다가 최근 몇년 새 러시아가 옛 소련권 국가들을 규합하거나 심지어 벨라루스나 몰도바 같은 비EU권 동유럽국들을 다시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는 나라가 폴란드다. 폴란드인들은 EU를 국가 안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올 6월과 7월에 실시된 유로바로미터 조사에서 폴란드인들은 자국 정부보다 EU를 거의 2배 이상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도 EU에 들어간 뒤 혜택을 많이 받았다. 2004년부터 폴란드가 EU로부터 지원받은 각종 보조금과 대출은 2000억 유로 가까이 되며, 2027년까지 그만큼의 돈을 더 받을 예정이다. 폴란드 연간 국내총생산(GDP) 약 6000억달러의 3분의1에 가까운 액수다. 이 돈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EU 회원국들에 나가 있는 폴란드인도 200만 명이나 된다. EU는 다음 회기부터 예산 집행을 회원국들의 법치와 연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최근 폴란드 정부는 헝가리와 함께 거기에 반대하고 나섰으나, 여론조사에서는 폴란드인의 73%가 법치와 예산을 연결하는 EU 방침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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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6위이며 다른 교역상대국이 많지만 폴란드는 다르다. 경제규모로는 세계 22위이고 나머지 EU국가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2018년 폴란드 수출의 거의 80%가 EU로 갔고, 수입의 약 60%가 EU 내부 시장에서 왔다. 유로스타트(EU 통계국)에 따르면 2004년 가입 당시 폴란드인의 1인당 소득은 EU 평균의 45%에 그쳤는데 2017년에는 70%로 올라갔다. 그만큼 EU가 성장에 기여한 것이다. 

 

집권 법과정의당 지지자들 중에는 반EU 성향인 사람들이 많지만 정부도 적어도 현재로서는 국민 여론으로 봐서 폴렉시트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법과정의당을 꽉 쥐고 있는 카친스키가 워낙 골수 반유럽 성향이고 그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법과정의당은 각료들을 계속 반유럽 성향 인사로 메우고 있으며 특히 교육 부문에서 우익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쪽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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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은 법과정의당이 결국 EU 탈퇴로 가는 수순을 밟으려는 계산 속에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본다. 최대 야당인 시민연대를 이끌고 있는 친유럽파 투스크 전 총리는 폴란드 법원의 반EU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여왔다. 야권 소속인 토마스 그로즈키 상원의장은 최근 의회 연설에서 “정부가 국민들에게 묻지 않고서 우리를 EU에서 탈퇴시킬 권한은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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