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아시아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다. 1947년, 인도에서 갈라진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직후에 훗날 방글라데시가 되는 동파키스탄에서 태어났다.
현대 방글라데시의 역사는 그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한 차례 총리를 지냈고, 잠시 정권을 빼앗겼다가 2009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총리를 맡고 있다. 두 임기를 합치면 17년에 이른다.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나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처럼 그 역시 2세 정치인이다.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맏딸로서 1981년부터 집권 아와미리그 당을 이끌고 있다. 해마다 타임이나 포브스 같은 외국 잡지들이 뽑는 ‘세계의 영향력 있는 여성’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다. 하지만 재임 기간 내내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국경없는기자회는 하시나 총리가 ‘디지털법보안법’을 만들어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규탄했고, 세계은행은 그의 관료들이 철교를 만들 돈도 다 떼어먹었다며 대출금을 회수했고, 인도는 그의 아들이 힌두교도를 겨냥한 폭력 선동에 관여하고 있다 비난했다.
말 많고 탈 많은 하시나 총리의 목소리가 부쩍 커질 때가 있다. 1일(현지시간) 영국 글래스고에서 개막한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처럼 말이다. 이 날 하시나 총리는 부자 나라들의 지도자들을 향해 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동시에 개도국들의 ‘탈탄소화’를 돕기로 한 약속도 지키라고 촉구했다. 하시나 총리가 개도국, 빈국들을 대표해 나선 것은 방글라데시가 기후변화로 부자 나라들보다 훨씬 타격을 많이 받는 ‘기후취약국 포럼(CVF)’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시선은 글래스고 회의에 앞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쏠렸지만, G20보다 덜 알려진 V20이라는 그룹이 있다. 기후변화에 취약한(Climate Vulnerable) 20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50년까지 기후위기로 지구상 2억명이 유민 혹은 난민이 될 것으로 보인다. 빈곤국 농촌 인구의 3분의2는 강우 패턴이 바뀌고 기온이 올라가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미 사막화와 기상재해로 먹을 것조차 모자라게 된 사람들이 4100만명에 이른다. 이를테면 미군 철군으로 재난상이 부각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정치적 혼란에 가뭄이 더해져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다. 아프간 인구 95%가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는데, 이번 가뭄은 내년까지 계속될 거라고 한다.
[UN] Guterres urges developed countries to deliver on climate pledge for vulnerable nations
기후변화에서 기후위기를 거쳐 이제는 ‘기후재앙’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일만큼 위기의 강도와 문제의식은 높아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의 화두는 ‘기후정의’다. 오염은 부자나라와 기업들이 만들고 그 피해는 가난한 나라들, 사람들이 뒤집어쓰는 현실을 바꾸자는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세운 그린뉴딜도 미국 내 기후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을 목표의 주된 축으로 잡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취약한 나라들은 부자 나라들이 기후대응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서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 당사국총회 때 부국들이 “향후 10년간 개도국에 해마다 1000억달러씩 지원한다”는 합의를 내놨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해 몰디브 등이 주창해 기후취약국포럼(CVF)을 만들었으나 가라앉아가는 섬나라들의 힘 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2015년 몰디브와 필리핀,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등은 페루 리마에 모여 V20을 결성하고 공동대응을 선언했다. 23개 나라가 더 가세해 이 모임은 43개국으로 커졌다. 그러고 나니 옵저버가 늘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나이지리아 같은 ‘거대 개도국’들은 물론이고 호주, 일본, 카타르에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등등 유럽국들도 옵저버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도 한국도 옵저버다.
인구 1억7000만 명에 국토 3분의1이 저지대인 방글라데시는 기후위기에 어느 나라보다 취약하다. ‘해수면이 올라가면 뉴욕 자유의여신상이 물에 잠긴다’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만, 환경단체들이 해수면 상승의 주요 피해자가 될 거라며 걱정하는 건 뉴요커들이 아니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해 하시나 총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바이든 대통령 같은 강대국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이든 대통령 머리 속의 상대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뿐인 듯하다. 글래스고 회의에 바이든 대통령은 존 케리 기후특사를 비롯해 각료급 인사들만 10여명을 데리고 갔지만 시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시 주석은 중국의 환경정책을 이끄는 셰전화(解振華) 특사를 보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회의에서 선진국들을 일갈한 환경외교관이자, 재작년 시 주석의 ‘2060년 탄소중립’ 유엔총회 선언의 틀을 잡은 인물이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시 주석이 이번 회의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이다. 수십년 동안 글로벌 기후대응의 발목을 잡아온 미국의 대통령이 이번엔 중국 지도자의 결석을 맹공격하고 있다. 글래스고로 떠나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은 세계의 지도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한다면서도 (회의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것이 팩트다. 나오라!”고 외쳤다. 코로나19 확산 이래 베이징에 박혀 있는 시 주석을 향해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경쟁”이라는 말도 했다. 푸틴 대통령을 겨냥해서는 “그의 툰드라(냉대림)가 불타고 있다”며 역시 불참을 비난했다.
[구정은의 '수상한 GPS']미·중 기후 대응 이끄는 존 케리와 셰전화
그러는 사이에도 각국은 이번 회의에서 이산화탄소 외에 메탄가스도 줄이자는 얘기들을 하고 있고, 숲 베어내기를 2030년까지 끝내자는 데에 목소리를 합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후재앙 속에 남겨질 나라들에 돈과 기술을 지원하는 것이다. 에콰도르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부자 나라들이 경제를 키우며 입힌 피해를 보상해달라며, 채무국이 아닌 ‘기후 채권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한다. 케리 특사가 개도국들의 기후위기 ‘적응’을 도와 피해를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하려면 몇 조 달러가 필요할 거라고 인정했지만 12년 전 코펜하겐에서의 약속을 연장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시나 총리와 V20이 이 힘든 싸움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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