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앞두고 푸에르토리코가 이슈가 됐다.
발단은 킬 토니(Kill Tony)'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코미디언 토니 힌치클리프(Tony Hinchcliffe)가 도널드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푸에르토리코를 "떠다니는 쓰레기 섬"이라고 조롱한 일이었다. 라틴계, 유대인, 흑인 등등을 가리키면서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했는데 그 중 한 발언이 이거였다. “저기 떠 다니는 쓰레기 섬이 하나 있어. 푸에르토리코라고 불린다지.” 그러면서 아이를 많이 낳는 히스패닉들 운운했나 보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미국으로 들어오게 만든다는 식으로.
푸에르토리코는 미국령인데 거기서 미국 가는 사람은 외국계 이민자인 것인가? 그게 문제다. 푸에르토리코의 법적 지위가 복잡하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미스 유니버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미국과 별개로 출전(?)하니까 독립국가인 줄 알았다. (푸에르토리코가 너무 각인돼 있어서 찾아보니 실제로 미스 유니버스 1위를 5번이나 배출했다고. 미인 국가인가보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부유한 항구'라는 스페인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쓰레기 섬이 아니고 부유한 항구란 말이다, 무식한 놈아)
면적 13890제곱킬로미터. 카리브해의 섬들로 돼 있는데 푸에르토리코 자체가 하나의 연방이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1600km 정도 떨어져 있고 수도는 산후안. 스페인어와 영어가 공식 언어인데 스페인어 사용자가 더 많다. 하지만 화폐는 미국 달러를 쓴다.
15세기 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했고 이후 스페인 식민지가 됐다. 그런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이기고 미국령으로 넘어갔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1917년부터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그럼 미국 국민인 것인데, 미국 '본토'에 거주하지 않으면 연방선거에서 투표권이 없다. 아니 뭐 이런? 그런데 이런 영토가 미국에 5곳이 있다. 괌, 북마리아나 제도,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미국령 사모아,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미국이 제국주의 끝물 탔을 적에 차지한 영토들이다. 이 지역 주민들 모두 연방선거 투표권이 없다. 대표성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데, 의원은 아니고 '상주 위원'이다.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의회에서 투표권은 없다. 말하자면 푸에르토리칸들을 비롯한 5개 영토 사람들은 미국의 국민이 아닌 것도 아니고 국민인 것도 아닌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도 정부는 있다. 국가 원수는 미국 대통령이지만 다른 주들처럼 푸에르토리코도 주지사, 상하양원으로 된 의회, 사법부를 갖고 있다. 주지사와 의원은 4년마다 투표로 선출된다. 마지막 선거가 2020년 11월이었고 이번 미국 대선 시기에 푸에르토리코도 주 의회 선거를 치른다. 선거관리는 미국 연방 선거관리위원회와 푸에르토리코 선관위가 같이 한다.
주권이 없고 대표성도 인정받지 못하지만 미국 연방헌법에 따른 기본권은 적용된다. 또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미군으로 복무하기도 한다. 베트남전 때처럼 징집령이 내려질 때에는 징병 대상이다. 개개인이 연방소득세는 내지 않지만, 푸에르토리코 사람이 외국에 나가서 돈을 벌면 연방소득세를 내야 한다. 사회보장세도 낸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공직자가 되는 데에도 아무 문제 없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바로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다.
국가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주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논쟁거리다. 푸에르토리코가 계속 이 상태로 있는 게 맞느냐, 다른 50개 주들처럼 미국의 한 주가 될 거냐, 아니면 독립할 거냐. 1992년에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연방정부와 푸에르토리코 간 각서를 체결했다. 모든 연방 부서와 기관들은 푸에르토리코도 행정적으로는 다른 주들과 똑같이 대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방수사국(FBI), 연방재난관리청(FEMA), 교통안전국(TSA) 등등은 다른 주들에서처럼 이 섬에도 똑같은 규정들을 적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952년 이래 푸에르토리코에는 인민민주당(스페인어 약자로 PPD), 신진보당(PNP), 푸에르토리코 독립당(PIP)이라는 세 정당이 정치지형을 구성해왔다. 인민민주당에는 영연방에 느슨하게 묶여 있는 국가들처럼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연방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이들이 많다. 말하자면 '현상유지'에 가깝다. 신진보당은 주로 승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두 정당이 지금껏 푸에르토리코의 정권을 번갈아 차지해왔다. 독립당은 이름 그대로 독립하자는 쪽이지만 지지율이 5%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푸에르토리코 안에서 독립하겠다는 여론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은 1960년대 이래로 '거취'를 놓고 6차례 주민투표를 했다. 그러나 독립안이 과반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또 과반에 이른다 해도 구속력은 없다. 미국 의회가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 내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법적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20년 푸에르토리코 총선 때 '주 승격'을 놓고 주민투표가 함께 실시됐다. 주 승격을 추구하자는 쪽에 주민 52%가 찬성표를 던졌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어쨌든 승격론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 투표 역시 구속력은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2022년 미국 하원은 ‘푸에르토리코 지위법’을 통과시켰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주민투표로 결정하게 하자, 즉 연방 의회의 결정 권한을 포기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아직 상원에선 통과되지 않았다. 미 대선 시기에 푸에르토리코 총선이 있고 이번에도 주민투표를 같이 하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역시 구속력은 없다.
미국의 일반 시민들도 이제는 푸에르토리코의 지위를 주민들이 결정하자는 쪽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 유고브(YouGov)가 10월 2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섬은 '주가 되든가 독립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쪽이 다수였다. 미국 성인 7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만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이 주 승격을 원한다면 주가 되는 것에 찬성한다는 대답이 60%에 이르렀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은 80% 가까이가 '주 승격을 원한다면 찬성한다'고 답했다.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이 독립을 원할 경우 독립에 찬성한다는 답변도 절반이 넘는 52%였다. 즉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애매한 관계인 것 치고는 이번 '쓰레기 섬' 발언은 거센 논란을 불렀다. 그렇게 이슈가 된 이유가 있다. 미국의 히스패닉(라티노) 인구는 2021년 기준 6250만명이다. 1980년만 해도 7%였다는데 지금은 미국 인구의 20%에 육박한다. 그 가운데 멕시코계가 3720만 명, 전체 히스패닉의 61%다. 그 다음이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다.
푸에르토리코인의 전체 숫자는 900만명 정도 된다. 그런데 그중 3분의2인 580만명이 미국 본토에 산다. 카리브 섬에 사는 사람은 320만명 정도다. 섬에 있으면 연방선거 투표권이 있지만, 본토에 살면 투표권이 있다. 펜실베이니아 같은 격전지에도 당연히 푸에르토리코계가 많다. 그러니까 이 초박빙 접전에서, 특히 격전지인 주들에서, 푸에르토리코 민심은 중요한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에 사는 주민들의 경우 대선에 투표할 권리는 없지만 민주-공화 양당의 예비선거, 즉 당내 경선에서는 투표를 한다. 그러니 대선후보 결정 과정에 자기 목소리를 아예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쪽 막말이 나오자 푸에르토리코 출신 셀럽들이 비난을 쏟아냈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래퍼인 배드 버니는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가 "푸에르토리코 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공약하는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해리스의 연설은 펜실베이니아주 최대도시 필라델피아에서 한 것이었다.
배드 버니는 솔직히 잘 모르지만... 제니퍼 로페즈는 나도 들어봤다ㅎㅎ 배우 겸 가수 겸 제작자…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푸에르토리칸이라고 한다. 제니퍼 로페즈도 인스타그램에 해리스 영상을 공유하고 푸에르토리코 깃발을 게시했다. 로페즈의 팔로워는 무려 2억5000만명이라고 한다! 그들이 다 미국 유권자인 것은 아니겠지만. 글구 연식 있는 분들 잘 아실 리키 마틴. 이 사람도 푸에르토리코 출신이고, 역시 해리스를 지지하면서 영상을 올렸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누구를 찍을까? 미국 본토에 사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을 대상으로 따로 대선 후보들을 놓고 여론조사를 한 것은 못 봤는데, 이번 쓰레기섬 발언에 대해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특히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 팀 월즈와 당내 젊은 목소리를 대변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등은 트럼프 측을 맹공격하면서 호재로 삼으려 애쓰고 있다.
트럼프에게 반감을 가진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거다. 트럼프 대통령 때인 2017년에 허리케인이 두 차례 푸에르토리코를 강타했다. 특히 그때 ‘마리아’라는 허리케인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두 차례 허리케인으로 3000명 이상이 숨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숲으로 간 여성들>의 한 챕터에 소개한 적 있다. 그 책에 썼던 구절을 다시 옮겨 본다.
이 섬은 오랫동안 재정부족에 시달렸다. 부채가 늘자 미 정부는 예산삭감과 민영화를 압박했다. 섬 당국과 주민들의 반대 속에서도 미 의회는 ‘푸에르토리코 감독관리경제안정법 Puerto Rico Oversight, Management, and Economic Stability Act PROMESA’을 만들었고 2016년 감독관리위원회를 설치, 섬 주민들이 뽑지도 않은 7명의 위원들 손에 섬의 운명을 넘겼다. 주민들은 점령군처럼 군림하는 이 기구를 ‘라훈타 La Junta’라고 부른다. 훈타는 스페인어권에서 군부 정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라훈타의 지시에 따라 섬 전력당국의 예산은 대폭 줄었고 인력은 30% 감축됐다. 전기와 물, 교통과 통신, 교육과 의료 등 사회에 꼭 필요한 인프라를 유지할 예산과 인력을 줄이면 결국 재난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모든 기관이 라훈타의 맹공으로 이미 초토화되어 있던 시점에, 때마침 마리아가 섬을 훑고 지나갔다. 푸에르토리코는 단순히 휘청거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주저앉았다.” 캐나다 저술가 나오미 클라인 Naomi Klein의 지적이다.
모두의 것을 기업들에 팔아넘기게 만들고, 결국 사람들에게 재난을 안겨주는 행태를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 부르기도 한다. 푸에르토리코는 재난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마리아가 들이닥쳤을 때 트럼프 정부는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고통을 무시했다. 이번 '쓰레기 섬' 발언 파장 뒤 푸에르토리코 출신 셀럽들도 마리아 당시 트럼프 정부의 행태를 지적했다.
320만 명이 살고 있는 푸에르토리코의 경제를 찾아보니, 1인당 연간 실질GDP가 4만2000달러다. 낮지 않다. 국제기구들은 '고소득 경제'로 분류한다. 저개발국 스타일의 원자재 수출 중심 경제도 아니다. 주로 제약, 섬유, 석유화학과 전자제품 들을 생산하는 제조업 중심 경제이고, 금융이나 부동산, 관광 등 서비스 부문도 크다.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안 된다. 하지만 2010년대 내내 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부채가 많다. 1인당 실질GDP는 높은지 몰라도 미국의 다른 주들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고, 주민 40% 이상이 빈곤 상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2017년 초에 재정 위기가 있었고, 그러던 차에 허리케인 타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번 미국 대선, 진짜 코앞으로 다가왔다.푸에르토리코인들을 포함해서, 전반적인 히스패닉 표심은 어떨까. 가장 최근인 10월 26일부터 29일 사이에 실시된 이코노미스트-유고브 조사에 따르면 해리스 52%, 트럼프 40%의 지지율로 해리스 우위였다. 하지만 미국에선 시민들이 다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 등록을 해야만 투표를 할 수 있다. 유권자 등록을 한 사람들을 놓고 보면 47% 대 46%로 해리스와 트럼프의 지지율 차이가 좁혀진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열성 히스패닉들이 유권자 등록을 열심히 했나 보다. 또한 전통적으로 히스패닉은 민주당 지지가 많았다고 하지만, 히스패닉 사이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쿠바계 유권자들 중심으로 트럼프 지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대선 결과, 어떻게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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