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미사일 공격과 포격을 주고받았다. 사상자가 130명에 달했다. 흔히 카슈미르라고 부르는 지역, 파키스탄 쪽과 인도 쪽으로 나뉘어 있는 ‘히말라야의 화약고’에서 또 포연이 치솟자 세계가 긴장했다.
중동과 유럽의 두 전선에서 숱한 이들이 숨져가는 시기, 세계는 중국과 대만 사이 ‘양안’에도 혹여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들이다. 그런데 아시아의 충돌은 바다가 아니라 히말라야 산지에서 터져나왔다. 카슈미르 위기는 늘 그랬듯 이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겠지만, 각국이 지정학적 이해를 따지며 이리 모이고 저리 갈라지는 정세 속에선 불씨 하나만 날아올라도 전란이 터질 수 있음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주는 사건이었다.
먼저 국경을 넘어 상대방 영토를 공격한 것은 인도였다. 인도측 발표에 따르면 ‘신두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에 있는 “극단주의 무장조직 본거지 9곳을 타격했다.” 발단은 4월 22 인도령 카슈미르의 파할감에서 일어난 테러공격이었다. 총격으로 27명이 희생됐는데 대부분 힌두교도 관광객이었다.

공격을 저지른 저항전선(TRF)이 어떤 조직인지 알려면 과거를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2008년 11월 인도의 경제중심지 뭄바이에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나 175명이 사망했다. 라슈카르 이 타이바(LeT)의 소행이었다. 1980년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미국과 파키스탄, 그리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도 가세해 이슬람권 곳곳에서 아프간으로 향한 무자헤딘 즉 무장전투원들을 지원했다. 라슈카르 이 타이바는 파키스탄 출신들이 주축이 돼 1985~86년 결성된 극단조직이었다. 2001년 9.11 테러로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당시 소련에 타격을 주겠다며 아프간으로 간 전투원들의 존재는 세계사를 대체 얼마나 굴절시켰던 것일까. 그들이 곳곳에서 공격을 저지르기 시작한 1990년대 이래로 수십년을 세계가 테러 공포에 떨었으니 말이다.
과거에 아프간 전사들을 밀어주긴 했지만 파키스탄 정부가 이런 극단주의 테러조직을 눈감아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슈카르 이 타이바는 2001년 파키스탄에서도 테러조직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그들이 뭄바이 테러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었고 인도는 당시에도 파키스탄 책임을 거론했다. 이번에 파할감 공격을 저지른 TRF도 바로 그 라슈카르 이 타이바의 방계 조직이라고 인도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파키스탄 쪽 테러조직 근거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카슈미르는 인도 아대륙 북부의 고지대, 인도-파키스탄-중국 세 나라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면적이 약 22만제곱킬로미터이니 한반도 크기만 하다. 질 좋은 양모인 ‘캐시미어’의 어원으로 유명한 카시미르가 분쟁 지역이 된 이유는 잘 알려져 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 식민통치에서 독립할 때 무슬림이 대부분인 카슈미르는 파키스탄으로 귀속되길 바랐으나 지역 지도자가 덜커덕 인도로 가겠다고 해버렸다. 그 후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와 인도령 잠무카슈미르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카슈미르라고 통칭되는 지역의 55%를 인도가,
파키스탄이 30%를, 그리고 중국이 나머지 15%를 현재 통제하고 있다. 주민은 전체 2000만명 정도인데 인구로 보면 70%가 인도에 소속돼 있다.
인도는 파키스탄쪽에 있는 땅을 ‘파키스탄에 점령된 카슈미르’라 하고, 파키스탄은 인도령 잠무카슈미르를 ‘인도에 점령된 카슈미르’라 부른다. 서로 상대방 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을 남아시아의 숙적이라 하지만 실상 그들 간 분쟁은 딱 한 차례, 1971년 동서 파키스탄의 분리(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때 말고는 모두 카슈미르 때문에 일어났다. 1998년 파키스탄이 인도 국경을 넘어 들어간 카길 공격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래 이번이 가장 큰 충돌이 아니었나 싶다.

파할감 공격 뒤 인도는 파키스탄이 배후라면서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고 상대 나라에 있던 자국 외교관들을 불러들였다. 비자 서비스를 중단시키고 국경을 닫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가 있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급히 돌아왔고 파키스탄에 책임을 돌렸다. 파키스탄은 일단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관련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인도가 강하게 나오자 무역 제한, 영공 및 국경 통과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테러 이틀 뒤인 4월 24일부터 사실상의 국경인 통제선(LoC)을 따라 무력 충돌이 보고됐다. 인도는 “추가 테러 가능성 때문에 군사작전이 필수적이었다”고 주장했고, 결국 국경을 넘는 미사일 공격으로까지 이어졌다.
반면 파키스탄은 인도가 공격한 자국 내 6개 지역 모두 테러조직의 근거지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작년 총선에서 재집권 성공하긴 했지만 선거 성적이 예상보다 나빠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파키스탄과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끌어올려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공격한 것이라고 파키스탄은 주장한다.
동시에 양측의 갈등은 ‘물의 무기화’라는 또 다른 이슈를 부각시켰다. 거대한 문명의 요람 인더스강은 인도에서 파키스탄 쪽으로 흐른다. 두 나라는 독립 뒤 오래 지나지 않은 1960년 인더스강 수계 6개 강의 물을 나눠쓰기 위한 인더스 수역조약을 맺었다. 두 나라 사이가 나쁠 때조차 조약은 늘 유지됐다. 그런데 이번에 인도가 매우 강경하게 나왔다. 파할감 공격 이튿날 비크람 미스리 인도 외교장관이 긴급 언론 브리핑을 하면서 “파키스탄이 테러 지원을 멈출 때까지 인더스 수역 조약을 일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더니 4월 26일부터 이틀 간 파키스탄 무자파라바드에서 갑자기 강 수위가 높아져 물이 흘러넘쳤다. 인도가 상류의 댐에서 통보도 없이 물을 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의 지류인 파키스탄의 체나브 강에서는 수위가 떨어져 강바닥이 보였다. 인도가 상류의 댐을 닫은 것이다.
파키스탄은 전체 수자원의 80%를 인더스 수계에 의존한다. 인도가 강을 무기화하면 파키스탄은 속수무책이다. 물길을 막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고 인도 역시 수억 명의 목줄을 죄기보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물 위협‘이 파키스탄으로 하여금 인도에 맞서 보복공격에 나서게 한 결정적인 요인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두 나라의 영토 분쟁은 1971년 심라 협정으로 통제선이 공식화되면서 정리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의 문제는 인도의 카슈미르 탄압 쪽에 책임이 크다. 인도령 카슈미르는 영원한 전쟁 상태나 다름없다. 종종 전투기를 띄우고 군대를 투입하지만 외부 세계에서는 인도의 입맛대로 ‘전쟁’이 아니라 ‘분쟁’ 혹은 ‘사태’ ‘위기’로만 부르는 카슈미르의 상태를 어떤 학자들은 ‘저강도 전쟁’이라는 모순적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도는 친파키스탄 이슬람 조직들은 물론이고 카슈미르 주민 전체를 극도로 탄압해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주민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불법행위인 ‘집단적 징벌’이 이 지역에선 일상이 돼 있다. 몇몇 조직이나 인물들이 공격을 저질렀다 해서 그들이 속해 있는 민족이나 종교 집단 전체를 핍박하는 걸 가리키는 말이다. 카슈미르에서 가해자는 인도 정부군일 때도 있고 정부 지원을 받는 친정부 민병대일 때도 있다. 1989년 인도 정부에 저항해 카슈미르 사람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도 인도는 파키스탄이 지원했다고 주장했으나 오랜 소외와 정치적 박탈감 때문이란 분석이 많았다.
거기에 하나의 요인이 덧붙여진 것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그에 맞서 결성된 무장조직들이었다. 그들이 아프간을 벗어나 파키스탄과 인도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1990~2000년대 테러 공격을 저질렀다. 뭄바이 테러도 그 중 하나였다. 그들을 막는다며 인도는 카슈미르를 무자비하게 ‘군사화’했다. 전역에 병력이 배치되고 친정부 민병대가 동원돼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성폭행, 납치, 고문을 해도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국제앰네스티나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기구들이 일제히 인도 정부를 비난해도 소용 없었다. 특히 모디 총리 집권 뒤 인도에서 힌두교를 우선시하는 ‘힌두 민족주의’가 심해졌고 전국적으로 무슬림을 탄압하거나 제도적으로 무슬림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 벌어졌다. 잠무카슈미르의 자치권도 박탈했다. 2020년에는 카슈미르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언론과 통신을 모두 끊어버렸다. 당시 목숨을 걸고 어렵사리 카슈미르 상황을 외부에 전한 사진기자들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다시 충돌이 일어나자 세계의 관심은 핵무기로 향하고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약 17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육상, 공중, 해상으로 탄두를 쏘아올릴 수 있는 ‘핵 트라이어드(3대 핵전력)’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역량이 같지는 않다. 핵 기반 공중 전력과 해상 전력 모두 인도가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인도가 핵실험을 한 것은 1974년이었는데 사실 핵 개발에 나서게 된 이유는 파키스탄보다는 중국 때문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1962년 중국과의 국경 전쟁 이후 베이징에 위압감을 느끼면서 핵을 추구하게 됐고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밖에 머물며 핵무기를 손에 쥐었다.
파키스탄은 1998년 핵 실험을 하면서 비공식 핵 보유국이 됐지만 이후 공식적으로 핵 전력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겠다고 밝힌 적은 없다. 대조적으로 인도는 1998년 ‘선제 사용 금지’ 정책을 발표해놓고도 2003년 ‘화학무기나 생물학 무기 공격에 맞서서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를 얘기하면서 슬그머니 물러섰다.
[DAWN] Editorial: Durable peace can only come from political will and wisdom of leaders in both India and Pakistan
두 나라 관계는 냉전 시기의 정치적 역학관계, 그리고 지금의 미-중 경쟁 구도와 이어서 봐야 한다. 냉전 시기 인도는 비동맹 국가였고 미국과는 줄곧 거리를 뒀다. 1990년대 후반부터 관계를 많이 풀었지만 미국은 지금도 민감한 첨단 과학기술이 인도에 이전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냉전 시절 중국, 미국과 모두 가까웠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이 소련에 맞서 전격적으로 수교한 것은 유명하지만 이후 아프간을 고리로 미-파키스탄-중국의 반소련 삼각연대가 만들어진 것은 덜 알려져 있다. 미국은 긴밀한 관계였던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하자 태도를 바꿔 제재를 가했으나, 몇 년 안 가 9.11 테러가 일어나고 자신들 스스로 아프간 전쟁을 시작하게 되자 다시 파키스탄과 손을 잡았다. 미국과 중국이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두 나라 모두 파키스탄과는 지금도 긴밀하다. 인도는 어떨까. 미국과는 어색하고, 중국과는 경쟁하고, 파키스탄과는 분쟁을 벌인다.
최근 10여년 새 인도의 경제력이 커지고 중국의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르자 ‘인도-태평양’ 지정학에서 미-중 갈등과 함께 인도라는 새 변수가 등장했다. 이번 카슈미르 충돌이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음에도 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이 지역 패권국 혹은 잠재적 패권 경쟁국들이 모두 엮여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카슈미르 동부에서 인도와 국경분쟁을 해왔다. 말하자면 카슈미르는 인도-파키스탄-중국의 삼각 갈등이 펼쳐지는 지역이다. 거기다 고도로 군사화된, 한마디로 병력이 많이 배치돼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자칫 작은 사고나 충돌이 큰 분쟁으로 번질까 걱정되는 것이다.
아프간의 유령은 여기에도 떠돌고 있다. 중국과 아프간이 만나는 짧은 접경지대인 와칸(와한) 회랑 주변에 중국이 병력을 늘려왔다. 중국이 땅과 바다에서 공세적으로 나오자 인도는 일본, 호주와 함께 미국 편에 붙어 ‘쿼드(4자 기구)’에 가담하면서 정책에 변화를 줬지만 비동맹 노선은 여전하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카슈미르 충돌이 일어나자 소셜미디어에 “테러리즘에 맞서 인도와 함께 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달리 인도에 힘을 실어준 것은 없다. 미국의 중재라는 틀을 빌어 카슈미르 분쟁은 10일 일단락됐으나 인도는 미국을 믿지 않으며 오히려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기사들도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정학의 귀환’ 속에 핍박 받고 다치고 죽어가는 카슈미르 사람들이다.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힘의 논리를 현실인 양 포장하지만 실제 현실은 힘 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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