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 세계의 시간
페르낭 브로델. 주경철 옮김. 까치. 12/27

군더 프랑크, 아부 루고드, 사미르 아민, 아리기 등등을 읽었는데 정작 브로델과 월러스틴을 안 읽었다. 평생 빚처럼 느껴지던 책들을 다 읽어버리리리! 라는 담대한 마음을 먹고 브로델을 올해 끝냈다. 월러스틴은 그 다음 순서로 잡아놨고.
책 표지에 <"역사학의 교황" 페르낭 브로델의 대표작>이라고 적혀 있는데, 기나긴 책이고 중간에 슬렁슬렁 넘긴 부분도 있지만 참말로 재미있었다! 뭐랄까, 역사를 아주 넓~~게 설명해주는데, 그 밑바닥에 '민중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느껴진달까. 오래 전 책을 읽는 재미도 있고. 1권은 1967년에 나왔고 2권과 3권은 1979년에 나왔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책도 아니지만 ㅎㅎ
세계사에는 가장 끈질긴 자, 혹은 가장 우직한 자라도 용기를 잃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강변이 없는 강, 시작도 끝도 없는 강과 같다. 아니 이 비유도 적당하지 않은 듯하다. 세계사란 하나의 강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강들과 같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경제학자들로부터 시간이 여러 개의 시간성으로 나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길들여지고 결국 조종 가능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첫째로 장기지속 또는 최장기지속의 시간성, 둘째로 어느 정도 느린 콩종크튀르, 마지막으로 빠른 또는 순간적인 일탈 같은 것이 있다.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든 가장 짧은 시간성이 대체로 가장 파악하기 쉽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사를 단순화하고 조직화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수단들을 얻었다. 그것들을 통해 세계의 수준에서 영위되는 삶의 시간, 즉 세계의 시간을 추출한다. 그러나 세계의 시간이 인간의 역사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외에 속하는 이 시간은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단지 일부의 공간과 현실들을 지배할 따름이다.
세계사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역, 침묵의 지역, 조용한 무지의 지역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빈 공간들-승리한 역사의 바깥에 위치한 지역들로서 이 책의 제1권에서 주로 다루었다-이 수없이 깔려 있어서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게 된 세계지도의 앞에 서 있다.
세계의 시간은 따라서 전체사의 상층구조의 작동과 관련을 가진다. 그 상층구조는 아래층에서 작용하는 힘들이 창조하고 부양해준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그 무게가 아래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소와 시대에 따라서 이러한 아래에서 위로의 움직임과 위에서 아래로의 움직임의 중요성이 변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지역에서도 세계의 시간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지는 못한다.
-16-17
이런 문장들이 넘나 좋다.
세계-경제
세계경제(economie mondiale, world economy)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 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시장을 형성한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economie-monde, world-economy)는 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 역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가리킨다.
-26
세계-경제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는데, 그 경계선은 마치 해안선이 육지로부터 바다를 구획하듯이 그 세계-경제를 규정한다.
세계-경제에는 하나의 중심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도시와 하나의 지배적인 자본주의-그 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가 맡는다. 여러 중심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이 세계-경제가 아직 젊거나 아니면 반대로 퇴화해가거나 격변을 겪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 공간 내에서는 각각의 개별 경제들이 계서제를 이룬다. 이것이 "국제분업”을 야기한다.
-31
1817년에 리카도가 그린 바와 같은 역할분담은 마치 자연적인 규칙으로 보이지만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연적인", 즉 저절로 이루어지는 소명의 결과가 아니고, 서서히 역사적으로 형성된, 어느 정도 오래된 상황을 이어받고 고착화한 결과이다. 세계(또는 세계-경제) 차원의 분업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결정한 종속관계의 연쇄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불평등 교역은 세계의 불평등을 낳고 세계의 불평등은 끈질기게 교역을 창출한다.
-62
"어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좀더 분명히 하면 그 나라가 이미 가난했기 때문, 혹은 낙시의 말을 빌리면이미 "빈곤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성장이 성장을 부른다"는 것은 어느 나라의 발전은 그 나라가 이미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며 그 나라를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이전의 움직임에 편승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언제나 발언권을 가지는 법이다. 세계의 불균등은 구조적인 현실과 관련을 가진다. 세계의 불균등은 자리 잡는 것도 느리게 이루어지고 사라지는 것도 느리게 이루어진다.
-65
책의 뒷부분에 주변부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브로델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2차 대전 이후 1940~70년대 '개발의 시기'에 널리 퍼진 제3세계의 발전 담론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인 듯. '자본주의=시장경제'라는 생각, 발전을 이식할 수 있다는 생각 밑에 깔린 몰역사성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 사이클들 중에서 가장 긴 것은 장기추세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이클들 중에서 가장 연구가 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단기간의 콩종크튀르에만 관심을 둔다는 것이 그 이유의 일단이다. 또다른 일단은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 보니 이 사이클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가격들이 자리 잡고 있는 바닥과 같다.
이에 비해서 단기 콩종크튀르의 움직임들은 이 기본선 위에 훨씬 움직임이 많고 상하의 변동이 심한 선을 덧붙인다. 장기추세는 다른 변동들의 잔재, 즉 우리가 계산을 통해서 이 나머지 변동들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아닐까?
많은 경제학자와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만일 이 조심스럽고 회의적인 사람들이 틀렸다면? 1974년부터 명백해졌으나 이 시점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시작된 장기적이고 비정상적인 그리고 연구자들을 난처하게 만든 위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전문가들이 장기적인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당대인들이 읽어낼 수 없는 이와 같은 변동이 과연 세계-경제의 장기적인 운명을 담아내는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밝혀주는가 하는 점이다.
-103-105
장기 추세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의 결론에 다시 나온다.
서유럽은 하나의 "극”이 아니라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대륙 전체를 북부 이탈리아와 넓은 의미의 네덜란드로 갈라놓는 이 양극성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될 것이다. 아직 완전히 모양이 굳어지지 않은 유럽의 여러 활동들을 재료로 삼아 광범위한 두 개의 지역경제가 서로 독립적으로 형성되어갔다.
북쪽에서는 이 과정이 빨리 이루어졌다. 사실 이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주변지방은 신생지역 또는 차라리 원시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찬란한 과거의 역사를 가진 지중해 지역에서는 뒤늦게 갱신이 이루어졌으나 대신 그후에는 더 빠르게 진보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팽창에 이슬람과 비잔티움이 가속화 역할을 해주었다. 그 결과 북쪽은 남쪽에 비해서 덜 복잡하고 상대적으로 더 "산업적”이었던 반면, 남쪽은 더 상업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세계가 만들어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흡인력을 가졌고 또 서로 보충하게 되었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 남북 간의 여러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13세기의 샹파뉴 정기시는 그 중 괄목할 만한 첫 번째 성과이다.
-133
9-10세기에 베네치아의 원거리무역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중해는 비잔티움, 이슬람권, 서유럽 기독교권 등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비잔티움이 당시 형성 중이던 세계-경제의 중심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과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비잔티움은 투쟁적인 면모를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비잔티움이 여전히 예로부터의 부를 누리고 있고 경험이 풍부하며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한 무게를 가진 거대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148
콘스탄티노폴리스. 비잔티움. 이스탄불.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한 무게를 가진' 도시.
중세 이전의 콘스탄티노플에 대해서는 이 글(<'모든 도시의 여왕' 콘스탄티노플>)을,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이스탄불에 대해서는 이 글(터키의 이스탄불)을 링크해둡니다.
재미난 책으로는 그리스 사람이 쓴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기억나고, 지중해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중해 세계>를 추천.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도 재미있었는데 스크랩을 안 해놨네요 ㅋ (아민 말루프의 책 중에 늙어가는 오스만을 그린 <동방의 항구들>은 너무나너무나 사랑하는 작품이고, 작년 르완다 여행 때 서점에서 발견한 또 다른 책도 집에 쟁여놓고 있는데 이건 또 언제 읽을지 ㅠㅠ)
이어지는 스크랩은 책의 큰 줄기에선 곁가지이지만 북유럽의 자율적이고 덜 억압적인 사회와 동유럽의 억압적인 사회(그리고 그 잔재)의 기원을 일부나마 보여주는 듯해서 옮겨적음.
(핀란드 농민들은) 왜 이렇게 상대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을까? 아스트룀은 농민들이 자유를 보장받게 된 것이 스톡홀름의 제국의회(Rijksdag)를 본따서 이곳의 농민들도 대공국의 신분의회에 네 번째 신분으로 참가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정치와 법이 이 머나먼 변경지역 농민들의 자유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농노 신분으로 떨어진 적이 없는 스웨덴 농민들의 경우와 똑같았다. 더구나 이 문제에서는 귀족의 경쟁자인 왕정국가가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는 만큼 더욱 그렇다.
…그단스크와 암스테르담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스톡홀름과 암스테르담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은 그단스크 시 배후에서 착취를 당하는 폴란드의 상황이다. 이것은 리가와 그 배후지역 간의 관계와 유사하다. 리가는 또다른 지배적인 도시로서 배후지역의 농민들을 예농상태로 만들었다. 이것은 서유럽의 착취관계가 살아남지 못하는 극지대인 핀란드, 농민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스웨덴과는 반대되는 사례이다.
-351-353
역사는 참 무겁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건너뛰고, 영국 이야기로.
백년전쟁이 끝난 해인 1453년부터 프랑수아 드 기즈가 '칼레'를 재탈환한 1558년 사이에 영국은 명백히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섬나라가 되었다(나의 이 표현을 용서하라). 다시 말해서 대륙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공간이 된 것이다.
...마침내 프랑스 바깥으로 축출되면서 자기 공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음에 헨리 8세가 다시 영국을 유럽의 공간 속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한 것은 영국으로서는 또 한 번의 행운이었다. 영국인들이 자기 나라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것은 자신의 대지, 숲, 황무지, 늪지를 개간하는 기회가 되었다. 영국은 표면적으로는 패배를 겪었으나 이것은 다음 시기에 전국시장이 급속도로 형성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대륙과의 단절에 1529-1533년에 있었던 로마와의 단절이 더해진 이중의 단절은 영국이라는 공간의 "소외화"를 더욱 가중시켰다. 교회 토지의 몰수와 판매는 영국의 경제를 재도약시켰다. 더욱이나 영국 경제를 도약시킨 다른 요인으로, 이제까지 이 나라가 유럽의 맨 끝자락으로서 세계의 끝과 같은 위치에 불과했으나 지리상의 발견 이후 오히려 신대륙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 있다.
-494-496
파운드 스털링화는 그 외의 다른 많은 명목 화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명목화폐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국가에 의해 증대되며 불리한 콩종크튀르에 의해 큰 변화를 겪는 것과는 달리, 이것은 1560-1561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서 가치가 안정된 이후 더 이상 변화하지 않았으며 1920년까지, 더 나아가서 1931년까지 내재가치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얼핏 보면 설명할 길이 없는 거의 기적적인 요소가 있다.
파운드 화의 가치가 고정된 것은 영국의 위대함의 핵심 요소였다. 만일 화폐단위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용이한 크레딧도, 군주에 대한 자금대부의 안전도, 사람들이 신임할 수 있는 계약 같은 것도 불가능했다. 크레딧이 없다면 위대함도, 금융상의 우위도 불가능했다.
-498-499
존 로크는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파운드 화의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운드 화는 "불변의 기본단위"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단지 건실한 정책을 옹호한 것만이 아니라 아마도 재산권, 계약의 유효성, 국가에 대부한 자본의 불가침성, 다시 말해서 소수 지배집단의 이해를 옹호한 것이기도 하다.
금본위제의 채택은 공식적으로는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으며 의식적인 심사숙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태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이다. 존 로크는 은본위제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편리하고 교환에 적합한 제도라고 보았다. 그러나 금이 저평가되는 네덜란드로부터 금이 고평가되는 영국으로 금화가 유입되고 새로 주조한 은화는 반대 방향으로 유출되었다. 다시 로크가 개입하여 1698년에 기니 화의 가치를 낮추었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1717년에 이번에는 아이작 뉴턴-당시에 뉴턴은 주조청장이었다-의 개입으로 가치를 낮추었으나 이것 역시 금을 과대평가하는 것이어서 영국은 계속해서 은을 수출하고 금이 유입되는 곳이었다.
이 체제는 18세기 내내 지속되어 사실상 금본위제로 연결되었다. 금본위제가 명백하게 천명된 것은 1816년의 공식적인 선포 이후이다. 이제 파운드 스털링 화는 소브린 금화(gold sovereign, 순도 12분의 11, 무게 7.998그램의 실제 금화)가 되었다. 그러나 1774년부터 이미 금은 은에 뒤이어 확실한 화폐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영국이 금을 끌어들이면 동시에 네덜란드, 발트 지역, 러시아, 지중해, 인도양, 중국과 같이 은이 교역의 필수조건이 되는 곳으로 은이 빠져나갔다.
-506-507
영국에서 '전국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은 아일랜드에는 비극. 감자 기근이 일어난 것은 밀을 빼앗겨 감자만 먹고 살았기 때문.
전국시장은 이전의 정치적인 공간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고 나서 17-18세기에 정치적 구조들과 경제적 구조들 사이에 아주 서서히 연관이 이루어져갔다. 누누이 강조한 바이지만 경제적 공간은 정치적 공간을 훨씬 크게 상회한다. 그래서 "국가", 전국 시장 등은 자신보다 더 넓은 경제적인 전체 내에서,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전체에 대항해서 형성된다. 광범위한 국제경제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바로 이 넓은 국제경제의 공간 속에서 전국시장이 자리를 잡고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통찰력 있고 또 대단히 집요한 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주변부를 희생시켜가며 확대해가려고 하는 중심부의 건설적인 반작용은 이런 팽창과정 속에서 보아야 한다.
-449-450
“아일랜드인들은 노예로 팔려간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게 세계의 패권을 잡게 해준 체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아일랜드는 "주변부" 국가로 전락했다. 루시우 데 아제베두가 브라질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한 의미로서의 "사이클들(cycles)"이 시작되었다. 아일랜드 전체가 숲으로 덮여 있던 1600년경에 이 나라는 잉글랜드에 대한 목재 공급지가 되었고 동시에 이 삼림자원을 이용해서 제철업이 발달했으나 이것 역시 잉글랜드에게만 유리했다. 이것은 100년 뒤에 숲이 완전히 바닥났을 때 고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잉글랜드 도시들의 증가하는 수요에 맞추어 아일랜드는 목축업에 전문화하여 염장 쇠고기와 돼지고기, 통에 담은 버터 등을 수출했다.
18세기 말에 아일랜드의 염장육류 수출은 아르한겔스크를 통한 러시아의 수출, 더 나아가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수출과 경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밀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영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일랜드인들이 [1789년에 밀을]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 국민 거의 대부분이 밀을 먹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나라에서 수출되는 것은 잉여가 아니라 다른 나라 같으면 필수품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섬 주민들 4분의 3은 감자에 만족하고 북부지방에서는 귀리죽으로 만족한다.“
-522-523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 "런던의 가마꾼, 짐꾼, 석탄 운반부와 매춘으로 사는 불행한 여자, 그러니까 대영제국의 영토에서 가장 힘이 센 남자와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말하자면 대다수가 아일랜드 최하층 출신인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감자를 주식으로 삼는다. 감자는 어떤 식료품보다 영양분이 많고, 인간 체질 특히 건강에 더 적합하며, 여기에는 어떤 식품도 반박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라고 적었는데, 아일랜드인들이 들으면 참으로 기가 찼을 소리다.
이제, 주변부 세계.
아메리카: 최대의 경품
아메리카가 유럽의 욕구에 응답하도록 하려면 우선 유럽의 이미지에 맞추어 아메리카를 끈기 있게 재구성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닥친 문제는 "물어뜯고, 숨을 막고, 모래로 덮고, 중독시키고, 쇠약하게 만드는“ 거친 자연, 비인간적으로 엄청나게 넓은 공간의 문제였다.
16세기부터 금은보석과 노예들을 찾아서 남아메리카의 거대한 공간을 관통했던 그 유명한 파울리스타(Paulista)의 행로를 보더라도 그것은 정복도 아니고 식민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다 위에 배가 지나간 자취 이상의 것을 남기지 못했다. 또 16세기 중엽에 칠레 남부에 도착했던 스페인인들은 무엇을 발견했던가? 거의 절대적으로 빈 공간이었다. “황량한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아타카마" 쪽으로는 새 한 마리, 짐승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나뭇잎 하나 볼 수 없는 무인지대밖에 없다"고 알론소 데 에르시야는 노래했다! 아메리카 역사의 지평에 늘 존재하는 문제는 인간의 등장과 함께 복종시켜야만 하는 빈 공간, 즉 "변경(frontiere)"이라는 주제이다.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내륙에서 사람들은 마치 바다에서처럼 나침반과 천체관측의를 손에 들고 여행했다.
-546-547
에릭 윌리엄스의 선구적인 연구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제, 준노예제, 농노제, 준농노제, 임금제, 준임금제의 발달과 구대륙 유럽에서의 자본주의적 성장 사이에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중상주의의 핵심은 노예제이다"라고 그는 단적으로 이야기했다. 임금제로 위장된 유럽의 노예제는 신대륙의 아무런 수식어 없는 적나라한 노예제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아메리카에서 모든 피부색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 모든 악의 진짜 뿌리는 대서양 건너편의 마드리드, 세비야, 카디스, 리스본, 보르도, 낭트, 심지어는 제노바, 브리스틀 그리고 다음 시기에는 리버풀, 런던, 암스테르담 등지에 있었다. 그것은 한 대륙을 주변부 상황으로 환원해버린 현상에 내재해 있었다.
-553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필요한 이주민을 모집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허위광고뿐 아니라 폭력까지도 사용했다. 파리의 일부 지역에서는 인신매매까지 행해졌다. 브리스틀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을 납치했고, 교수형을 면하려면 신대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지원자"를 많이 모집할 수 있었다. 크롬웰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죄수들을 대량으로 송출했다.
백인의 예속은 인디오가 부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아프리카로부터 아메리카로 흑인이 대규모로 유입된 것은 인디오와 유럽으로부터의 이주민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민지의 요구가 변화를 불러오고 어떤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인종적인 요인보다는 경제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피부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백인 "노예들"이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들이 일정한 시간제로만 노예였기 때문이다.
-558-559
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여러 종류의 예속노동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보다는 더 대체 가능했다. 인디오 역시 키토 근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금재취업을 할 수 있었다. 백인들은 열대지방에서는 노동을 하며 살 수 없다는 속설(애덤 스미스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했다)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앙가제들과 서번트들은 17세기에 그런 열대지역에서도 아 주 너끈히 일했다. 100년 전에 독일인들은 자메이카의 시퍼드에 들어왔는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곳에서 일을 하며 잘살고 있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한 것은 이탈리아의 토목인부들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열대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한 일꾼들도 모두 백인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남부지역에서도 백인이 아주 큰 몫을 차지한 반면, 흑인들은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과 같은 북부의 추운 지역으로 이주해서도 잘 적응해서 살았다.
-561
북유럽과 남유럽은 대서양 너머에서 다시 차별성과 대립성을 재현했다. 또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영국 식민지들은 1783년에 해방되었으나 이베리아 식민지들은 1822-1824년에 가서야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때도 남아메리카의 해방은 허구에 불과했다. 예전의 지배 대신 영국의 후견체제가 들어서서 대략 1940년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미국이 들어섰다.
이런 차이는 분명히 상이한 구조, 상이한 과거와 유산의 산물이다. 이 명확한 상황에 대해 지난날 교과서에서 흔히 하던 구분, ‘거주 식민지’와 ’착취 식민지’를 가지고는 제대로 잘 표현할 수 없다. 착취 없는 거주 식민지가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거주민 없는 착취 식민지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착취라는 용어보다는 차라리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의 변경화(marginalisation)라는 용어를 쓰도록 하자.
이것은 다른 편에게 봉사해야만 한다는 것, 거역할 수 없는 국제분업의 명령에 의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강요당한다는 뜻이다. 이베리아 아메리카의 공간에 주어진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독립 이전이나 이후나 큰 차이가 없었다. 스페인에 대한 종속이 사라지는 것은 런던 사업계가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 1824-1825년 쯤부터 구체화되었다.
-581
더 큰 전체인 유럽 세계-경제에 비해서 라틴 아메리카는 단지 철저한 규제를 받는 주변부에 불과하다. 이 주변부지역으로서는 그 종속성을 깰 가능성이 있었을까? 아닐 가능성이 더 컸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브라질과 스페인령 아메리카가 선박과 선원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결코 해양세력으로 발돋움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또다른 이유로서 라틴 아메리카는 18세기라는 결정적인 시기 동안 혹은 그 이전부터도 식민 모국(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대한 종속과 유럽(특히 영국)에 대한 종속이라는 이중의 종속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591
유럽의 교역은 공기가 모자라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경쟁에서는 영국이 가장 유리했다. 가장 짧고 확실한 길, 즉 금융이라는 길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595
거대한 대륙이라는 '변경'에 대한 브로델의 표현이 존 헤밍의 <아마존- 정복과 착취, 경외와 공존의 5백 년>과 비슷.
블랙 아프리카: 외부로부터 지배당한 것만은 아니다
포르투갈인과 다른 유럽인이 아프리카의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 발견한 것은 소수 부족들과 아주 미약한 국가들이어서 이들을 근거로는 그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었다. 콩고, 모노모타파와 같이 그보다는 약간 더 강한 조직을 갖춘 국가들은 대륙의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열대병들 역시 하나의 장벽에 속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열대지역에서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으나 이겨낸 것을 보면, 이것이 결정적인 장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그보다는 아프리카 내륙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고 사회의 활력이 컸다는 점이 더 타당한 이유일 것이다.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오들과는 달리 발전된 야금업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흔히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다른 한편 유럽인들로서는 접근이 용이한 해안지역에서 상아, 밀랍, 세네갈 고무, 말라게트, 사금 그리고 그지없이 훌륭한 상품이었던 흑인 노예들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굳이 내륙지역으로 탐험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606
화폐가 원시적이라고 해서 곧 아프리카 경제가 활력이 없다든지, 19세기에 유럽의 산업혁명 및 상업혁명의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이 경제가 깨어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아마도 18세기 중반에 이른바 이 후진 지역들로부터 매년 5만 명 이상의 흑인들이 노예무역 항구를 통해서 유출되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아프리카의 이 인간 사냥이 이곳의 일상생활을 깨뜨린 것도 아니다.
매년 노예 유출이 새롭게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활력을 가진 경제를 상정하게 한다. 그런데 노예무역선이 오고 갔다는 것만으로는 노예무역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노예무역 역시 아프리카적인 용어로 설명해야 한다. 필립 커틴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노예무역은 대서양 경제의 한 하위체제이지만 동시에 서부 아프리카 사회, 이곳의 태도, 종교, 직업적인 표준, 정체성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것을 포괄하는 더 큰 모델의 하위체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권리와 책임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607-608
사실 "사하라 사막은 여러 면에서 볼 때 바다와 유사했다". 이상한 것은 흑인들 자신은 진짜 바다이든 사막이라는 바다이든 간에 그곳을 항해해서 관문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608
노예무역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책임'이라는 민감한 주제... 폴라니가 이미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서 상세하게 다뤘던(그리고 당시에 꽤나 비판을 받았다던) 내용인데, 브로델은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러시아: 하나의 독립된 세계-경제
러시아가 반 정도 폐쇄적인 채 남아 있었던 이유는 압도적으로 광대한 영토, 아직 부족한 인구, 서유럽에 대한 미약한 이해관계, 내부적인 균형의 정립이 힘든 사정 등이 동시에 작용한 탓이지, 러시아가 유럽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라든지 교역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유럽의 주변지역에서 독자적인 세계-경제로서 스스로를 조직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6세기 초 러시아에 가장 중요한 외부시장은 튀르키예였다. 외부와의 연결은 돈 강 계곡과 아조프 해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나 경계를 넘는 일은 전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선박이 담당했다. 볼가 강 하류의 스텝 지역, 특히 중앙아시아, 중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란 지역과의 교역 중심지는 카잔 그리고 뒤이어 아스트라한이었다. 카즈빈, 시라즈, 호르무즈 섬 등지를 향한 사업여행이 조직되었다.
-622-623
유럽이 아메리카를 "발명했다면"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발명해야" 했다.
상인이자 매뉴팩처 경영인인 스트로가노프 형제는 이반 4세로부터 우랄 산맥 너머의 대규모 땅을 양도받고 "이곳에 대포와 화승총을 배치할 권리"를 받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주 빠른 정복이 시작되었다. 모피를 찾아 한 단계씩 차례로 진출한 러시아인들은 한 세기 만에 오비 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 어귀까지 도착했고 급기야 아무르 강 연안에서 중국 측 초소와 조우했다(1689). 캄차카 반도는 1695년에서 1700년 사이에 점유했고, 1740년대부터는 1728년에 이미 발견했던 베링 해협을 넘어 알래스카에 최초의 러시아인 정착지들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모험사업에 의한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다. 정부의 공식적인 의지와 계획은 나중에야 개입했다.
…원주민들 -남쪽에는 카스피 해 연안 가까이에서 사는 키르기스인부터 몽골족까지(예컨대 이르쿠츠크 지역에는 놀라울 정도로 호전적인 종족인 부랴트족이 있어서 1662년에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북쪽에는 사모예드족, 구스족, 야쿠트족-을 사막과 비슷한 남쪽의 스텝 지역이나 북쪽의 울창한 숲으로 내쫓았다.
-641-642
튀르키예 제국
튀르키예의 침입은 5세기의 게르만족의 침입과는 아주 달라서 "일종의 아시아 혁명이며 반유럽 혁명"이라는 페르낭 그르나르의 말이 타당해 보인다. 이 제국은 이전의 이슬람권과 비잔티움의 연결망들을 계승한 분명한 세계-경제였으며 국가의 효율적인 힘에 의해 탄탄히 유지되었다. 프랑스 대사인 드 라 에는 이렇게 설명했다(1669). "술탄 폐하는 법을 초월해 있다. 그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리고 흔히는 아무런 법률상의 근거도 없이 신민을 죽일 수도 있고 재산을 모두 빼앗아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전제적인 권력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주 오랫동안 튀르키예의 평화(pax turcica)를 제공했다.
-656
제국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 자체가 풍부한 잉여생산물을 확보해주었다. 다른 한편 튀르키에 제국은 이슬람의 대도시들을 계승했다. 수많은 길드들을 가지고 있는 상업도시들이 산재해 있었다. 카이로는 일종의 수도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기생적인 성격의 대중심지이지만 동시에 모터 역할도 했다. 알레포는 기름진 땅의 한가운데라는 최선의 입지를 자랑하며 … 바그다드의 활기찬 중심지에는 “6-7개 거리에••••· 상점들과 다양한 직종의 길드 작업장들이 모여 있는데 이 거리들은 밤에는 출입구를 닫든지 쇠사슬로 봉쇄했다." 타브리즈는 "거대한 규모, 교역, 수많은 인파, 풍성하게 많은 생활필수품들을 갖춘 찬탄할 만한” 도시이다.
-659
15세기에는 당시 재건축을 해야 했던 활기 없는 이스탄불보다는 상업과 중개, 활동적인 수공업 활동의 도시인 부르사가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튀르키예가 시리아와 이집트 방면으로 팽창해 가자 중심지는 알레포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이전되었고 16세기에 이스탄불을 우회해가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오스만 공간의 중심도 남쪽으로 내려갔다. 17세기에 다시 스미르나로 중심이 바뀐 것은 잘 알려져 있 지만 사실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18세기에는 내가 보기에는 이스탄불이 다시 중심지가 되었던 것 같다. 세계-경제를 이룬 오스만의 공간에서는 해가 바뀌어감에 따라서 그리고 콩종크튀르의 변화에 따라서 중심지가 계속해서 이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661
오스만 세계는 도처에 낙타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발칸 지역 같은 곳에서도 16세기 말에는 반도 전역에 낙타 수송이 더 우월해진 것으로 보인다. 카라반에 대한 추억은 1937년에만 해도 두브로브니크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과거의 낭만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지도상에서 카라반의 활동을 추적해보면 지브롤터로부터 인도를 거쳐 중국 북부까지, 그리고 아라비아와 소아시아로부터 아스트라한과 카잔까지 펼쳐져 있다. 오스만 경제의 공간-운동(espace-mouvement)은 이 카라반 세계 속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또 그것을 중심으로 삼는다.
유럽인들은 상품의 수송을 위해서나 여행을 위해서는 이 교통방식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이것을 조직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이슬람의 독점물이기 때문이다. 오스만 경제만이 이 수송을 지배하는데, 이것이 그들에게 핵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엄격히 조직하고 감시한다. 카라반의 여행은 빈번하고 규칙적이다(해상 연결보다 더욱 규칙적이다).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효율성의 원천이며 독립을 유지 하는 비밀이다. 페르시아의 비단이 지중해 루트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며 특 히 영국과 네덜란드가 비단 교역을 차지하지 못하는 반면, 네덜란드인들이 후추와 향신료 상업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단은 출발점부터 카라반 수송의 주요 품목이었던 반면, 후추와 향신료는 처음부터 배를 이용한 "해상" 수송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667
제국 경제는 서유럽인의 침투를 제한하고 막아 내는 한 무리의 상인이 수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상적인 거래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아랍 상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인도인, 그리스인(마케도니아-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 "유사" 그리스인도 포함한다), 게다가 튀르키예인 (사실 튀르키예인은 상인으로서의 성공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다)도 있었다. 이 활동적인 국내시장에서 서유럽 상인들은 운신의 폭이 크지 않았다. 이들은 모동, 볼로스, 테살로니카, 이스탄불, 스미르나, 알레포,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등 출입할 수 있는 거래 중심지를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옛날식 레반트 모델에 따라서 이곳에서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지의 상인과 현지 소매상인 간의 접촉을 금지했다. 따라서 서유럽 상인들은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중개를 통해야 했다.
동양 상인들은 16세기 이래 아드리아 해 연안의 이탈리아 도시들에 정착했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 당시의 장기 위기(1793-1815) 때문에 프랑스가 레반트 상업에서 완전히 손을 놓자 그 빈 자리를 그리스의 상인과 선원들이 대신 차지했다. 이 성공이 다음에 그리스의 독립에도 어느 정도 공헌했다.
-674-675
아시아 이야기는 책이 다루는 시대의 특성상 믈라카 중심이다.
아시아: 가장 범위가 큰 세계-경제
아시아 전체는 세 개의 거대한 세계-경제(이슬람권, 인도, 중국)로 이루어져 있다.
아시아는 몬순과 무역풍이라는 규칙적인 동력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가지고 있어서, 넓은 범위에 걸친 지역 간 연결이 잘 유지되고 교역과 가격들이 서로 얽힌 -다만 지배적인 중심지는 차례로 변동하는 -하나의 응집적인 세계를 구성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진짜 주제는 거대하지만 취약하고 간헐적인 성격을 띠는 이와 같은 조합에 관한 것이다.
간헐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 거대한 공간들의 조합이 중앙의 인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소와도 같은 움직임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소의 움직임은 때로는 동쪽에, 때로는 서쪽에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여러 과업의 분배, 우월성, 정치적 및 경제적 상승 등을 재조정한다.
-679
때로는 이런 시소 움직임이 작동하지 않거나 고장 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환아시아 지역들은 보통 때보다도 더 분할되어 독립적인 공간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이 단순화된 틀에서 핵심은 때로는 서쪽의 이슬람권에, 때로는 동쪽의 중국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이중의 움직임이다. (15세기 명나라의 대항해가 일어나고 또 갑자기 중단된 뒤) 아시아의 중부나 서부보다는 동부의 목소리가 더 컸다. 바로 이때가 이 거대한 초세계-경제의 극점이 말레이 제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시기이다. 반탐, 아체, 믈라카 그리고 훨씬 이후 바타비아와 마닐라 같은 도시들이 활기를 띠며 발달했다.
아마도 이 도시들은 중세 유럽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강력한 정치체에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국왕이나 "술탄들"이 통치하고 질서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들은 반(半)독자적이었다.
-680-681
3권의 앞부분은 유럽의 세계-경제를 지구적인 세계-경제로 만든 유럽을 다루고 있다. 베네치아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시대에서 안트베르펜과 암스테르담 즉 네덜란드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영국의 시대로 넘어가는 유럽의 이야기다. 세계체제를 다룬 학자들의 도식이 대개 이 기본 틀을 다루고 있고, 20세기 '미국의 시대'를 거쳐 '중국의 시대'로 갈 것이라는 예언이 담은 것이 군더 프랑크나 아리기의 책들이다.
브로델의 이 책은 중국이 지금처럼 성장하기 훨씬 전에 쓰였기 때문에 현대의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맨 마지막에 한국은 놀라운 성장을 하는 나라로 한번 나온다). 만일 이 학자들이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 (군더 프랑크는 2005년에, 아리기는 2009년에 사망했다. 덧붙이자면 아부-루고드는 2013년에, 이들보다 앞선 세대인 브로델은 이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5년에 세상을 떠났다) 더불어, '인도태평양 시대'를 모두가 거론하는 지금, 인도의 부상을 브로델이 설명한 식의 '시소 움직임'의 요동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도 관심.
산업혁명이 아무리 광범위하다고 해도 이 시대 전체를 나타내는 유일한 전체성도 아니고 또 가장 큰 전체성도 아니다. 농업 우위의 사회로부터 산업생산 우위의 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는 산업화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산업혁명은 말하자면 산업화의 가속화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라는 말은 산업화보다도 더 넓은 뜻을 가진다. 성장은 더더욱 넓은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역사의 총체성을 포함한다.
나는 힉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지난 200년간의 산업혁명은 다름 아닌 거대한 장기적 붐이었다." 이 붐이란 결국 성장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성장은 산업혁명 속에 갇히지 않은 성장이고 사실 산업혁명에 선행한 성장이다. 1940년대부터 갑자기 각광을 받기 시작한 성장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용례에서는 "장기지속적인 복합진화 과정“이다.
-814
어떤 사람들은 성장은 반드시 균형 성장이라고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불균형 성장이라고 본다. 균형 성장-닉시, 영, 하트웰-은 모든 영역들이 꽤 규칙적인 진행 속에서 동시에 움직여 나가는 것으로서 수요의 측면에서 설명을 하며, 발전의 핵심 모터로서 전국시장의 역할을 중시한다. 불균형 성장 -해럴드 이니스, 앨버트 허슈먼, 슘페터, 로스토-은 하나의 특권적인 영역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영역으로 움직임이 이전되는 것이다. 이때 성장은 뒤에 처진 주자들이 선두주자를 따라잡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그러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국내시장의 확대보다는 국외시장의 급격한 변동이 더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설이 꼭 상반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 두 가지 설은 장기적 움직임들과 단기적 움직임들의 중첩과 대립의 평상적인 변증법 속에서 동시에 또는 차례로 타당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균형 성장이냐 불균형 성장이냐를 따지기보다는 차라리 지속 성장이냐 비지속 성장이냐를 따지는 것이 나을 듯싶다. 이것이야 말로 현실적인 구분이다.
내가 보기에 전통적 성장과 근대적 성장을 구분한 쿠즈네츠가 전적으로 타당한 듯하다. 근대적 성장이란 바로 지속 성장이다. 성장이 지속적이었던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위기 동안에도 성장이 완전히 중단된 적은 결코 없었다.
-815-816
“경제성장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것"과 "경제성장이 실제로 일어난 방식"을 나누어서 본 쿠즈네츠의 구분이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성장의 잠재력”은 바로 "균형잡힌" 발전이며 그것은 상이한 요소들과 상이한 주체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또 토지, 노동, 자본, 시장, 국가, 사회제도들 사이의 구조적 변화들에 의해서 서서히 얻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 성장은 반드시 장기지속 안에 각인되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성장이 "실제로 일어난" 방식이란 콩종크튀르적인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의 소산이다. 그것은 기술의 발견, 국민적인 혹은 국제적인 기회와 같은 상황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장기와 단기의 중첩을 받아들인다면, "위기에서 위기로" 변덕스럽게 진전한다는 불균형 성장과 마땅히 균형 잡힌 방식을 취한다는 균형 성장의 설명을 큰 어려움 없이 연결할 수 있다.
-818
책머리에서 제기한 장기 지속에 대해 결론에서 다시 이야기한다.
장기추세(trend)는 인구, 물가, 국민총생산, 임금의 동시 상승을 그리고 있었으며 단지 간혈적으로 단기 사이클들에 의해서 이런 상승이 중단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지속 성장"이 영원히 약속된 듯하다.
그러나 1850년부터 1970년까지 단지 12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장기추세의 장기적 위기는 "근대”와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인 논리를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 권위적인 전체적 리듬(장기 사이클)에 복종하는가? 나는 분명히 그렇다고 믿는다. 기후 사이클의 존재는 분명히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으나 학자들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추측 이상의 것을 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세계의 물질의 역사와 경제의 역사에 리듬을 부여하는 조수와 같은 이 운동들을 믿는다.
1972-1974년부터 세계의 곤경이 시작된 이래 나는 종종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해보았다. 우리는 콘드라티예프 사이클의 하강국면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혹은 그보다도 더 긴 장기추세의 하강국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854
그리고 브로델이 끊임 없이 하고 싶어했던 말, 문장마다 밑에 깔아놓았던 말.
오늘날에든 과거에든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권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난날 자본주의가 모든 상업경제를 다 장악하지 않은 것처럼, 오늘 날의 자본주의 역시 많은 범위의 활동에 대해서 지배를 포기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스스로 운영되고 있는 시장경제, 소기업의 주도, 장인과 노동자의 열성, 서민의 노력 등에 맡겨져 있다. 자본주의가 도맡는 분야는 따로 있다. 대규모 부동산 및 증권투기, 대은행, 대규모 산업, 국제무역 그리고 또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농업과 수송업도 포함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어느 순간에라도 방향을 선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활력의 비밀이다.
대위기가 닥치면 많은 자본가들이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때에도 다른 자본가들은 살아남고 또 이를 이용해서 제자리를 잡는 자본가들도 있다. 이때 새로운 해결책들은 흔히 자본가들 바깥에서 만들어진다. 혁신이란 대개 아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혁신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자본 소유주들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결국 혁신된 자본주의, 흔히는 강화된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모든 것이 바뀌지만 그러는 가운데 자본주의는 계속 이어진다.
-862-863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체제"로만 상정한다면 그 어느 것보다도 큰 실수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질서를 근간으로 하여 살아가며, 또 적대적이든 우호적이든 국가라는 그 거추장스러운 존재와 (거의) 동격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본은 도로나 통신 등의 하부구조, 군대, 연구 및 교육과 같은 부담이 큰 과업 등 거의 수익성이라고는 없으면서도 아주 많은 비용이 드는 일들을 국가에 떠맡기고 있다. 그 외에도 공중위생, 사회보장 등의 많은 부분 역시 국가의 일이다. 더군다나 자본은 염치 불고하고 국가로부터 온갖 종류의 면세, 보조금, 지원금 등을 누린다.
-863-864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인간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곧 사회 역시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는 언제나 부정의하고 계서화되어 있었으며 불평등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정당화의 힘을 제공한다.
시그먼드 다이아몬드는 미국의 이른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사실은 수 세기 동안 축적되어온 가산을 이용하여 성공한 것이면서도 그들이 그 사실을 교묘히 숨겨왔다는 것을 폭로하며 그들을 비웃었다.
-866
자본주의와 하층 사이의 갈등이 순전히 경제적 차원의 것이라면 양자 사이의 공존은 마찰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정부의 정책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대규모 사기업들만이 국가로부터 크레딧과 지원을 받고 있다. 이보다 더 위험한 정책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저지른 중대한 실수를 다른 형태로 재현하는 것이다.
…레닌의 이와 같은 언급들은 시장, 교환의 하층영역, 장인층이 가지는 거대한 창의적 능력에 대한 경의의 표시가 아니겠는가? 경제에서 창의적 능력이란 기본적으로 중요한 부일 뿐 아니라 전쟁이나 경제의 심각한 고장 등으로 구조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위기의 기간에 후퇴할 수 있는 진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지상층(1층)이란 설비와 조직의 육중함 때문에 마비되는 일이 없는 곳으로서 언제나 유연한 적응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자원, 즉흥적인 해결의 구역이며 혁신의 구역이기도 하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정치가들이 우리에게 강요해왔던 "전부 아니면 무"라는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가들은 독점에 대해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시장경제를 보존할 수 없다든지, 이 독점을 모두 국영화하지" 않고서는 처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876-877
그래서 브로델은 혁신가가 경제를 이끈다는 슘페터의 주장에 반대한다.
다만 경제의 하층이 상당히 두텁게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상관없지만, 중요한 것은 여하튼 그것이 존재하며 독립된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총화이며 우리 사회 전체를 포괄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상층의 자본주의가 옆에 제쳐놓은 것 혹은 방기한 것을 경쟁영역이 모두 차지하지는 않는다.그와 같은 영역은 시장과 국가통제의 바깥에 놓여 있는 밀수, 재화와 서비스의 물물교환, "암거래노동", 가정 내의 활동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가계경제만이 "순수한 경제(economia pura)"라고 보았으며, 이 영역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등을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상층에서 하층까지 모두 아우르는 "자본주의체제"라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875
자본주의가 여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 지배하고자 하는 영역, 그 지배하에 드러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끊임없이 '사회화'와 '임금화'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사노동이야말로 물질문명의 핵심이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해서 복잡하고 다면적인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 이반 일리치의 <젠더>다)
모든 문제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만큼 오늘날의 사회 및 경제의 증대하는 위기는 심층적인 문화의 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1968년의 경험이 우리에게 그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사이에 1968년 혁명의 아버지가 된 허버트 마르쿠제는 “1968년을 실패라고 보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1979년 3월 23일). 이 혁명은 사회의 구조를 흔들어놓았고 인습과 제약, 끝내는 무관심까지 깨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흐른다. 10여 년이란 사회의 느린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긴 시간이다. 1968년의 활동가들은 인내력이 큰 사회 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다.
-867
슬프다.
마지막으로, 앞부분에 나온 문장.
혹시 이 책이 기원후 2000년 이후의 독자들 손에 들려 있어서 그들이 여기 쓰여 있는 몇 줄을 본다면, 마치 내가 장-바티스트 세가 쓴 바보 같은 내용을 보고 다소 악의적으로 비웃었던 것처럼 그들 역시 웃게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111쪽)
아닙니다!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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