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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일기/ 세 가지 지극한 경지

딸기21 2006. 12. 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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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지극한 경지


14.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었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道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愛)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란 따로 없는 것 아닐까?


15. 이룸과 허물어짐이 있다는 것은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룸과 허물어짐이 없다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음에 해당된다. 소문이 거문고 타는 솜씨, 사광(師曠)이 북채를 들고 장단 맞추는 솜씨, 혜자(惠子)가 책상에 기대어 변론하는 솜씨는 모두 완벽에 가까워 그 이름이 후세에 남았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특출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로 남을 깨우치려 했다. 그러나 남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남을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혜자같은 사람은) ‘단단한 것, 흰 것(堅白論)’ 같은 아리송한 변론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은 아버지의 거문고 타기를 이어받았지만 일생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것을 이룸이라 한다면 나도 이룬 것이 있다 하겠고, 이런 것이 이룸이 아니라면 나나 다른 아무도 이룸이 없다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밝음(明)’이다.


이룸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는 경지로 가려면 장자 수준은 돼야 할 것 같다.

말은 멋진데 별로 감동은 못 받겠다.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밝음(明)’이다.”

장자는 별로 출세를 못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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