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폴란드 사고에 '러시아 음모설'

딸기21 2010. 4. 11. 22:02
728x90
러시아 스몰렌스크 항공기 사고로 대통령과 정부 주요인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초유의 비극이 일어나자 폴란드 국민들은 악연을 떠올리며 비통해하고 있다. 러시아 측은 이번 참사에 애도를 표하면서 사고 경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 밝히고 있지만, 폴란드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타르타스 통신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10일 스몰렌스크의 참사 현장을 찾아가 헌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푸틴은 투스크를 끌어안고 애도를 한 뒤 현장 근처에 설치된 긴급구호사령부를 함께 방문하면서 사고 경위를 철저히 가려낼 것이라 약속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러시아(옛소련)로부터 침공 혹은 탄압을 당해온 폴란드인들은 국가 지도부와 엘리트들이 몰살당한 이번 참사를 바라보며 새삼 악몽을 되새기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폴란드는 20세기 내내 옛 소련의 통제를 받으며 공산독재에 시달렸고,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러시아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특히 이번 사건은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67년전 지브롤터에서 일어난 항공기 추락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이끌던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총리는 1943년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 지브롤터 해협 상공을 지나다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기체 이상으로 인한 것으로 판명났지만 폴란드에서는 ‘소련 비밀조직의 암살’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시코르스키는 40년의 ‘카틴 숲 학살사건’ 조사를 요구하다가 소련의 미움을 샀던 사람이다.

이번 비행기 사고는 짙은 안개 속에서 조종사가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했다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기는 러시아제 투폴례프 Tu-154 비행기로 운항된지 26년이나 된 노후기다. Tu-154는 이미 옛소련권 여러 곳에서 사고를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는 벌써부터 ‘음모론’이 나오고 있다. 조종사가 관제탑의 회항 지시를 무시한 채 착륙을 시도한 이유 등을 놓고 추측이 무성하다. 음모론을 펼치는 이들은 러시아가 이번 사고로 숨진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파인 카친스키가 2005년 대통령이 된 뒤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가 더 나빠진 것은 사실이다.

카친스키는 옛 소련권 국가들 중 서방과의 친화력이 높았던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우려한 독일이 카친스키의 거친 행보를 비판한 적도 있었다. 카친스키는 또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동유럽 미사일방어(MD) 체제 도입을 지지했다.
지난주 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행사에 러시아가 좌파 성향의 투스크 총리만 초대하고 카친스키는 초대하지 않은 것도 그런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다. 러시아 언론들은 투스크의 방문은 대대적으로 다뤘지만, 비행기 사고가 나기 전까지 카친스키의 스몰렌스크 방문은 거의 보도하지도 않았다.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이지만, 향후 폴란드 정국에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대통령은 10일 “시코르스키의 죽음이 옛소련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반감에 큰 영향을 미쳤듯, 이번 사건을 둘러싼 ‘추측’도 폴란드인들의 정서를 자극해 ‘사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러시아 정부도 음모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카친스키는 누구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레흐 카친스키(60) 폴란드 대통령은 폴란드는 물론 유럽 정계에서 늘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었다.
카친스키는 1949년 바르샤바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62년 쌍둥이 형제인 야로스와프와 함께 <달을 훔친 두 아이>라는 아동영화에 출연, 아역배우로 큰 인기를 끌었다. 형제는 나란히 70년대 공산당의 억압통치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뛰어들었고, 폴란드 민주화 투쟁의 상징인 그단스크 조선소 자유노조 ‘연대’의 파업에도 함께 했다. 하지만 90년대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노조 지도자 출신의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민주화 세력 주류와 거리를 두고 정치에서 떨어져 있었다.
카친스키가 다시 두각을 드러낸 것은 2001년 야로스와프와 함께 가톨릭 가치에 기반을 둔 ‘법과 정의’ 당을 만들면서였다. 이듬해 카친스키는 바르샤바 시장으로 당선돼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게이 퍼레이드를 금지시키고 ‘전통의 부활’을 주장하며 보수적인 가톨릭 유권자들의 지지를 샀다. 2005년 대선에서는 좌파 성향의 도널드 투스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듬해에는 야로스와프가 총선에서 승리, 총리가 됨으로써 유례없는 ‘쌍둥이 정부’가 탄생했다.

우파 포퓰리즘 성향의 카친스키는 “강력한 폴란드, 폴란드인을 위한 폴란드”를 내세워 농민 유권자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다. 2004년 폴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 뒤 서유럽 경제에 통합돼가는 과정에서 소외된 서민들도 카친스키의 반유럽적인 입장에 동조했다. 카친스키는 EU 가입 때 폐지한 사형제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EU에서는 그를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다. 카친스키는 지난해 바웬사 전대통령이 옛 소련 스파이였다고 주장했다가 바웬사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쌍둥이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7년 야로스와프를 제치고 카친스키의 숙적인 투스크가 총리가 됐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는 외교분야를 제외하고는 대통령보다 총리의 권한이 더 크기 때문에 카친스키의 힘은 크게 축소됐다. 풍운아 같은 인생을 살았던 카친스키는 러시아 영토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말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