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진보를 생각하는 보수’ 英 이끌 젊은 지도자

딸기21 2010. 5. 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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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정부, 나이든 이들과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정부다. 나의 목표는 정부에 대한 신뢰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신임총리(44)는 12일 보수-자민 연정 성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강하고 따뜻한 정부가 이끄는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선언했다. 유럽 정치의 중심축 중 하나인 영국을 이끌어갈, 13년만의 보수파 총리에게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영국 언론들은 귀족집안 엘리트 아들에서 ‘새로운 보수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한 캐머런의 리더십을 분석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200년만의 최연소 총리

보수-자민 연정협상 결렬, 노동당 고든 브라운 총리의 배수진을 친 사퇴 발표, 보수-자민 연정 합의, 브라운 사퇴, 여왕의 총리 지명,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입성.
11~12일 24시간 런던의 정치 시계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닷새 동안의 협상을 거쳐 연립정권을 성사시킨 캐머런은 2001년 하원에 첫 진출한 뒤 9년이라는 초단시간 만에 영국 총리가 됐다. 보통선거가 도입되기 이전인 1812년 로버트 존슨 이래 영국 사상 최연소 총리다.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당시 44세)의 최연소 기록을 6개월이나 앞당겼다.

캐머런의 성공요인은 보수당에서 우익 정당 냄새를 없애고 ‘젊고 새로운 보수주의’의 이미지를 세운 데에 있었다. 캐머런은 윌리엄4세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출신이지만 다른 귀족 정치인들처럼 뿌리를 되도록 감추는 대신 ‘참신하고 도덕적인 귀족’의 이미지를 오히려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캐머런은 “기존 보수당 주류가 아닌 의회 도입 초창기의 토리(보수당) 지도자들과 닮았다”고 BBC방송은 보도했다.

정치스타일에서는 블레어와 닮은꼴이다. 젊고 역동적이면서도 가정적인 이미지, 비디오친화형에 능력보다는 카리스마가 앞서는 지도자, 재치있고 달변에 세련된 엘리트라는 점에서 ‘보수당의 블레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닌다. 블레어가 총리관저에서 넷째 아들을 봤듯, 캐머런도 곧 세째 아이를 얻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공과나 능력보다는 스타일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아직 이렇다할 경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실용주의자다. 자신이 바라는 걸 명확히 알고 있지만 그리로 가는 한가지 방법만 고집하지는 않는다.”“나는 고양잇과(科)라기보다는 개과다. 사람을 좋아하고 여럿이 모이는 걸 좋아한다.” 캐머런이 스스로에 대해 한 이야기들이다. 반대로 주변에서 본 캐머런은 사람을 다루는 데에 능숙하고, 야심만만하면서도 몹시 신중한 사람이다. 2005년 보수당 당수가 되기 전까지 그는 정치신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세련된 귀족으로만 본다면 오산”이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 내무부에서 그의 상관이었던 마이클 그린은 “보통의 영국사람과는 다르다. 쉽고 편하게 말할 줄 아는, 오프라(윈프리)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보수당 간부를 지낸 닉 번은 “다른 대안이 있을 때에는 절대로 자기가 생각한 해법을 곧바로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90년대 캐머런이 내무부 정책보좌관 겸 공보담당으로 일할 때 알고 지냈던 언론인 제프 랜달은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못 믿을 사람”이라며 “나같으면 저런 사람에게 딸을 내주진 않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캐머런은 66년 런던에서 4남매 중 세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언 캐머런은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했으나 다리에 장애가 있어 한쪽을 절단했고 한쪽 눈도 실명했다.
장애를 갖고도 긍정적인 삶을 살았던 아버지는 캐머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2월 희귀병으로 숨진 큰아들 이반을 지극정성으로 돌봤던 캐머런 부부의 이야기는 영국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준 바 있다. 보수파이지만 장애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보건의료·복지에 관심이 많은 데에는 이런 가정적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귀족집안 아들에서 '새로운 보수'의 얼굴로

버크셔의 영지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캐머런은 에드워드, 앤드루 왕자가 다닌 헤더타운의 귀족학교를 다녔다. 어릴적 친구들은 “성적이 대단히 좋지도 않았고, 정치인이 될 줄도 몰랐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유년기를 지나 이튼스쿨을 졸업할 무렵의 캐머런은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한 전혀 다른 청년이 되어있었다. 옥스퍼드대에 진학하기 앞서 그는 1년간 세상경험을 쌓았다. 서섹스주의 보수당 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홍콩으로 가 석달간 선박회사 인턴사원으로 근무했고, 그 후엔 소련과 동유럽을 철도로 횡단해 귀국했다. 냉전의 장벽이 높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는 과음과 악동 짓으로 유명한 학내 클럽에 들어갔는데 그 시절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않는다고 한다. 옥스퍼드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버넌 보그대너 교수는 “아주 능력있는 학생이었다”며 “온건하고 지각있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88년 6월 캐머런은 보수당 중앙당사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오늘날 보수당의 ‘신(新) 브레인’이 된 동료들을 그 때 만났다. 38세에 연립정권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조지 오스번, 캐머런 캠프의 최고 선거전략가였던 스티브 힐튼, 보건장관 내정자인 앤드루 랜슬리가 그들이다. 당내 주류파들이 ‘꼬맹이들(Brat Pack)’이라 불렀던 이들 3인방은 캐머런 정부의 주축으로 떠올랐다.


캐머런은 더킬러스, 더스미스 등 인디락밴드의 음악을 즐겨 듣고 프리미어리그 아스톤빌라를 좋아한다. 휴가는 귀족출신 아내 사만다와 함께 터키나 프랑스의 휴양지에서 보낸다. 혼재된 캐릭터만큼이나, 연립정권의 정책에는 좌-우의 공약들이 섞여 있다.
총리-부총리를 나눠맡으면서 캐머런은 ‘새로운 정치’를 이야기했고, 자민당의 닉 클레그는 ‘새로운 정부’를 이야기했다. 빛깔 다른 두 정당의 연립 합의안은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이다. 재정 삭감과 이주자 수 제한, 핵 억지력 유지 등에선 보수당의 입김이 먹혔다. 선거제도 개혁과 상원 ‘귀족의회’의 선출직 재편, 저소득층 감세와 자본수입세·은행세 부과 등에선 자민당 주장이 채택됐다. 세금정책과 금융규제정책은 노동당보다도 ‘왼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캐머런은 “(마거릿) 대처 여사가 경제개혁가가 됐듯 나는 급진적인 사회개혁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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