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실크로드의 옛 도시, 오슈의 비극

딸기21 2010. 6. 1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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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산(천산) 산맥에서 흘러내려온 나린 강과 카라 다리야(카라 강)은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세 나라가 접경한 페르가나 계곡에서 만난다. 거기서 중앙아시아의 생명줄인 시르 다리야로 합쳐져 아랄해까지 흐른다.
페르가나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아시아 남·서부를 잇는 비단길의 교역중심지이자 곡창이었다. 지금은 인구 22만명으로 키르기스스탄의 2위 도시가 된
오슈는 이 계곡에 자리잡은 3000년 역사를 지닌 도시다.


유서 깊은 오슈가 며칠 새 피바다로 변했다. 지난 10일부터 키르기스계 주민들이 우즈벡계 이웃들을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무차별 폭행·강간을 일삼으며 제노사이드(종족말살)나 다름없는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 


18일까지 20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공식집계됐으나, 실제 사망자는 그 몇 배로 추정된다. 숨진 이의 90%는 우즈벡계이고, 특히 여성·어린이·노인들이 많다. 키르기스계는 군용차까지 탈취해 ‘인종청소’에 나서고 있다. 오슈 시내 체료무슈키의 한 집에는 무장한 남성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때리고 그 앞에서 16세 딸을 성폭행했다. AP통신은 “12살 소녀와 임신부까지 성폭행당했다”고 보도했다. 한 50세 남성은 목이 난자당한 채 숨졌다.
 

유엔난민기구가 우즈베키스탄 접경지대에 난민촌을 만들었지만, 난민들은 기본적인 생필품·의약품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키르기스계의 추가공격이 있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RCR)는 “현 상황은 엄청난 위기”라고 전했다. 유엔은 지금까지 10만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갔고 30만명이 오슈 일대에 유민으로 떠돌고 있는 등 이번 사태로 난민 40만명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키르기스스탄 내 우즈벡계 인구(약 82만명)의 절반 가까이가 난민이 된 셈이다.


Uzbeks inspect their burned house in an Uzbek district in the southern Kyrgyz city of Osh,Thursday, June 17, 2010.


오슈 사태는 옛 유고연방이나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그대로 닮았다. 사실 두 민족은 터키어 계통의 유사한 언어를 쓰고, 종교적으로도 똑같은 이슬람 수니파다. 옛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키르기스계와 우즈벡계는 같은 마할라(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랬던 이들이 끔찍한 ‘인간사냥’을 벌이게 된 데에는 역사적, 정치·경제적인 배경이 있다.

오슈는 이미 1200년 전부터 중국 신장위구르의 카슈에서 서쪽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경유지이자 남쪽의 파미르 고원으로 내려가는 교역로의 출발점이었다.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티무르의 후손으로 인도의 무굴제국을 세운 15세기의 정복자 바부르는 “오슈는 천혜의 요새”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오슈는 19세기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중앙아시아 쟁탈전)’의 주무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카라-키르기스자치현을 만들어 오슈를 거기 편입시켰다. 36년 키르기스 소비에트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모스크바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우즈벡족 거주지였던 오슈와 오즈겐 등 페르가나 계곡 동부 지역들을 키르기스에 집어넣었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오슈 일대 키르기스계 인구는 전체의 10%에도 못 미쳤으나, 키르기스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인구구성이 바뀌기 시작했다.

20년 전 소련이 붕괴되자 키르기스 남부 농촌지대 주민들이 대도시인 오슈로 모여들어 키르기스계와 우즈벡계 인구가 반반이 됐다. 그러나 오슈 일대의 경제적 인프라도 소비에트 몰락과 함께 모두 무너졌고, 농촌출신이 대부분인 키르기스계는 극심한 실업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이 오슈 쪽과의 경제적 연계를 끊으면서 경제상황이 더 나빠졌다. 페르가나뉴스 등에 따르면 지금도 키르기스계 주민들 대부분은 15~20명이 방 한두개짜리 소비에트식 아파트에서 궁핍하고 살고 있다. 이들은 대개 우즈벡계보다 교육수준도 낮고 소득수준도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티무르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한 우즈벡계는 키르기스계 빈곤층의 증오 대상이 됐다. 오슈의 우즈벡계 언론인 바크티에르 샤크나자로프는 “오슈에서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꺼져라’는 욕설을 흔히 들을 수있다”고 전했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우즈베크계를 차별하면서 민족적 증오감을 교묘히 조장했다. 우즈베크계의 시민권을 제한하고, 의회·정부 참여를 늘려달라는 요구를 묵살했다. 2005년에는 우즈벡계의 대학진학자 수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우즈벡어를 못 쓰게 하는 등 문화말살에 들어갔다. 


특히 형식적으로나마 민족간 화합을 주창했던 초대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물러나고 2005년 집권한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은 노골적인 차별정책을 펼쳤다. 2006년에는 오슈 시내 메살리예프 대로변에서 우즈벡계 지도자 아이벡 알리먀노프가 살해되는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우즈벡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차별에 반발한 우즈벡계 주민들 사이에 이슬람 분리주의 운동이 퍼지면서 양측 갈등은 더 심해졌다.

지난 4월 바키예프가 축출된 뒤 정권을 넘겨받은 로자 오툰바예바 과도정부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전임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오툰바예바 정부는 “바키예프 일가가 폭도들에 돈을 주어 학살을 사주하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페르가나뉴스는 “두 민족이 쫓겨난 칸(왕·바키예프를 지칭)의 꼭두각시가 되어 서로를 순교자로 만드는 꼴”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 정부도 이번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군을 오슈에 보냈지만 치안확보에는 실패했다. 우즈벡계 주민들은 “정부군은 우리가 당하는 걸 보고 있거나 심지어 공격에 가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즈베키스탄도 난민들을 나몰라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독립 이래 장기집권 철권통치를 해오고 있다. 정부 검열과 감시를 받는 우즈베키스탄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과거 오슈에서 키르기스계가 우즈벡계를 공격하면, 국경 너머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잔과 나망간 등지에서 주민들이 넘어가 보복전을 하곤 했다. 2005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안디잔에서 반정부시위가 일자 이슬람 극단세력으로 몰아 시위대 2000여명을 학살했다. 카리모프 정권은 이번 오슈 사태로 안디잔 일대가 다시 들썩일까 걱정해, 국경을 닫아건 채 쉬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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