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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가 케네디가문 이을까

딸기21 2010. 8. 1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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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케네디가의 희망은 비키(Vicky)에게 달려 있다.”

2세들의 잇단 불운으로 정치명문으로서의 운명이 다하게 된 ‘미국의 왕조’ 케네디 가문에 새로운 희망이 피어나는 것일까요. 1년전 사망한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부인 빅토리아 레기 케네디(56·사진)가 2년 뒤 총선에 출마, 남편의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인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4일 보도했습니다. 애칭 ‘비키’로 불리는 빅토리아는 출마설을 부인하고 있지만, 케네디가와 민주당 안팎에서 비키가 후보로 나설 가능성을 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비키 출마설은 먼저 케네디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비키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뛰어난 정치감각과 수완을 보여왔을 뿐 아니라, 에드워드 스스로도 아내가 자리를 물려받기를 바란다는 뜻을 피력한 바 있다는 것이죠. 
비키는 남편의 명성과 본인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의 선거캠페인이나 후원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사실상 이미 정치행보를 시작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키는 대륙 반대편인 캘리포니아주 바버라 복서 상원의원의 캠페인을 지원했는가 하면, 미 역사상 최장기 상원의원을 지내다 6월에 사망한 로버트 버드 의원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음... 상당히 '상품성' 있어보이는 외모죠?



하지만 출마할 경우 2012년 선거에서 맞붙어야 할 상대가 공화당의 스캇 브라운 현의원이라는 점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에드워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올 1월 보궐선거에서 브라운은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의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어내 민주당과 케네디가에 엄청난 충격을 줬지요. 브라운은 민주당과 케네디가의 아성이던 매사추세츠주에서 37년만에 탄생한 공화당 연방상원의원입니다. 비키가 지지를 선언했던 민주당의 마타 코클리는 뼈아픈 패배를 맛봤고, 상원 60석을 노리던 민주당과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비키가 출마를 하게 되면 남편의 자리를 가져간 브라운과 진검승부를 펼쳐야 합니다. 브라운 측은 케네디가의 ‘귀족 정치’를 맹공격할 것이 뻔하고요. 
만일 패배하게 되면 케네디가에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겠지요. 케네디가 안에서도 이 점 때문에 비키 출마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에드워드의 전처 소생 아들인 패트릭 케네디 하원의원도 계모가 정치일선에 나가는 대신 아버지의 뜻을 이을 비영리재단 일에 집중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비키 스스로도 최근 보스턴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의석을 찾으러 직접 나설 생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비키가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케네디가와 친밀한 관계인 매사추세츠주의 윌리엄 델러헌트 하원의원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키는 최고의 후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전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과 비키. 2004년 사진입니다.


비키는 그 자신 루이지애나주의 명문가 태생이죠. 아버지 에드먼드 레기는 레바논에서 이민온 부유한 금융가였고, 어머니 도리스 앤은 민주당전국위원회(DNC)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 쪽 조부모는 레바논의 독특한 기독교 일파인 마론파 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키의 부모는 1956년 존 F 케네디(JFK)가 부통령 후보지명전에 도전했을 때 도움을 주면서 케네디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JFK는 부통령후보가 되는 데에 실패했으나 두 집안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뉴올리언즈 툴레인대학 영문학과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 연방법원 검사를 거쳐 변호사가 된 비키는 81년 그리어 래클린이라는 변호사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으나 9년만에 이혼했습니다. 비키는 대학 졸업 직후 에드워드 케네디의 의원사무실에서 편지를 정리하는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에드워드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집안끼리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92년 결혼을 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유명 정치인이었지만 여성편력, 음주, 거친 행동 등으로 늘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비키와의 결혼 뒤 에드워드는 온갖 추문에서 벗어나 모범적인 정치인의 이미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상원의원 활동에서도 빛을 발하게 됩니다. 에드워드는 아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비키가 데려온 두 아이에게도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던 에드워드가 94년 공화당의 미트 롬니와 맞붙었을 때 뉴욕타임스는 “비키 덕에 에드워드가 어려운 시험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됐다”고 썼답니다. 비키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에드워드가 살아있을 때부터 최고의 조언자로서 뛰어난 정치감각을 보여왔다는 점을 듭니다. 97년 케네디가의 희망이었던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비행기 사고로 숨졌을 때 비키는 집안을 아우르며 수습을 도맡아 케네디가 전체의 안주인으로 인정받았다고 하고요. 
그 해부터 아예 변호사 생활을 접은 비키는 아동 총기사고 피해를 줄이기 위한 비영리기구를 만들었으며 총기 폭력을 막기 위한 브래디센터 등의 이사로 일하면서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지난해 말부터는 존 F 케네디 예술공연센터의 이사직도 맡고 있습니다. 2008년 5월 남편이 뇌종양 진단을 받자 남편을 중심으로 한 결집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케네디가를 단속했습니다.

케네디가의 2세들은 정치적으로 1세대보다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요. 에드워드의 차남 패트릭은 약물중독 등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아오다가 이번 하원의원 임기를 끝으로 물러나겠다고 지난 2월 밝혔습니다. 장남 에드워드2세는 소아암으로 어려서 장애인이 됐고요. JFK의 아들은 앞서 얘기한대로 추락사했고, 딸 캐럴라인은 지난해 뉴욕주 상원의원에 도전하려 했다가 능력부족으로 밀려났습니다. 비키가 출마하지 않으면 케네디가의 정치계보는 끊기게 됩니다. 뭐'그까이꺼 끊기거나 말거나'인 것 같습니다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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