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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정일, '삼중당 문고'

딸기21 2003. 5. 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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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당 문고

장정일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 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히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 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 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였던 거 같습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란 영화가 한참 이야기 꺼리가 되었던 그 때에도 순진무구했던(제발 좀 믿어주세요..^^;) 줄리는 뭐 그런영화가 있다구?? 우아한 사람들은 그런거로 눈버리는 거 아니다..라는 소신으로 문학동네의 책들을 읽었었지요. 
그러나, 줄리보다 1년 선배였던 한 남자선배가 '내게 거짓말을 해봐.'란 장정일의 소설을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한참 호르몬의 활동도 왕성했었고..(흠...^^;;) 나름대로 그 선배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해서 '선배, 책좀 빌려주세요..아잉~'의 애교작전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소리만 한 소리 듣고 말았었어요..'이런 책은 너같이 어린애가 읽을 책이 아니야.'..어리다구..어리다구..어리다구...한참 멍하게 있었더랬습니다. 
결국은 반발심이 화르륵~ 솟아올라서 장정일이 썼다고 하는 것은 섭렵하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었습니다. <아담이 눈뜰 때><너에게 나를 보낸다><내게 거짓말을 해봐><장정일의 독서일기 1,2,3,4,5><햄버거에 대한 명상> 등등... 
솔직히 그의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를 제외하고는 저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실험적인 그의 소설들과 외설적인 표현들, 남성들의 성적 환타지에 대한 것들은 단지 놀라울 뿐이었지요. 그러나 그의 시는 좀 달랐습니다. 시 속에서도 여러가지 실험은 진행이 되었지만, 무척 아름다운 시들이 많았거든요. 이 시도 그렇구, 바람구두님의 집에 걸려있는 장정일의 시도 그렇구요. 
(바람구두님의 집에 걸려있는 시는 한동안 제 수첩에 적혀서 힘들 때 읽었던 시였습니다. ^^) 장정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것저것 할 말이 많지만(외설시비부터 시작해서 그의 여러가지 실험성, 그의 시,소설이 영화화 된 것들, 그리고, 그의 엄청난 독서량과 그에 대한 메모정신과 독자가 주체가 되는 책읽기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등등) 그는 동시대에서 여전히 주목해서 봐야 할 요주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장정일에 대한 이야기도 꼽...... 
이상한 아이 장정일. 
중학교만 나온 장정일. 
소년원을 학교 드나들 듯 다닌 장정일. 
시인들이 들끓는 도시에서 태어난 장정일(기형도曰). 
책은 초판만 산다는 장정일. 
가슴 아픈 아름다운 시를 아는 장정일. 
정규교육의 변두리에서 문학을 배운 아니 그냥 알게 된 장정일. 
술 먹다 몰래 도망가는 버릇이 있는 장정일. 
시를 먼저 알게된 장정일. 
욕망의 방향을 20십대에 안 장정일. 
그걸로 한국 사람들 보기 민망한 욕망의 지형도를 시로 그려버린 장정일. 
그래서 劇같은 시를 쓰는 장정일.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장정일. 
단지 극일 뿐인 극을 쓰는 장정일. 
그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꿋꿋하게 소설을 쓴 장정일. 
그래서 재미없는 섹스로 소설 쓴 장정일. 
섹스가 진부한 시대에 불행한 소설을 쓴 장정일. 
결국 다시 감옥 간 장정일. 
나쁜 영화 만들어도 감옥 안 가는 놈 땜에 불쌍하게 뵈는 장정일. 
현금만 쓰는 장정일. 
세상 물정을 몰라 감옥 간 것 처럼 뵈는 장정일. 
아직도 잘 사는지 궁금한 장정일. 
작품을 내는 지 내지 않는 지 더 이상 내 관심이 아닌 영역의 장정일. 
내가 나온 경원 고등학교 옆 성서 중학교를 나온 동네 형 장정일. 
장정일 장정일......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어도 장정일의 시는 좋아했지요. 
근데 왜 이 시는 기억이 안나징-_-


오옷... 보헤미안, 너의 시도 좋은 걸. 
줄리님 또치님 저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장정일의 시를 처음 읽어봤어요. 
그런데 저 시가 참 좋더라구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정일의 시입니다. 
딸기님..이 시도 읽어주세요.^^(바람구두님의 홈에서 퍼왔답니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 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하며 
스물 두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줄리님, 시 정말 좋네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 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주루룩 ㅠ.ㅠ 
장정일 생각이 나는 요즈음이었습니다. 
딸기님 고맙구요, 줄리님 더더욱 고맙습니다. 장정일은 시인이란 말입니다!! 
왜 그걸 잊고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는 장정일 시집 중 쓰레기라고 생각한답니다(이견 있으신 분, 죄송합니다) 위의 저 시는 그 안의 보석이지요... 
장정일, 돌아와라. 그 시절, 그 아름답던 시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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