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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인가 생존인가 - 번역 개판 촘스키 책

딸기21 2005. 1. 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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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인가 생존인가 Hegemony or Survival : America's Quest for Grobal Dominance (2003) 
아브람 노엄 촘스키 (지은이) | 오성환 | 황의방 (옮긴이) | 까치글방 | 2004-11-20


뭐랄까, '촘스키식 글쓰기'라고 해야할까. 어느정도 그런 식의 말투엔 익숙해진 것 같다. 촘스키의 전작들, 언어학에 대한 책들 말고 '미국'에 관한 책들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은 낯익다 못해 솔직히 지겨운 감마저 든다는 점. 언뜻 떠올려봐도 '불량국가'라든가, '전쟁에 반대한다' 등등의 책들과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촘스키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아직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저지른 일들은 (특히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촘스키의 책들이 '반미주의자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지명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중소설가가 아닌 이상에야, 그의 책을 한권이라도 꼼꼼히 읽은 독자들이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 '많다'고는 결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을 제대로 보고, 감춰진 사실들에 눈을 뜨고, 거듭해서 비판하고 비판하고 또 비판하는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보면, 촘스키 같은 지식인의 작업(저술/강연)은 아주 중요하다. 

우선 책의 내용을 얘기하자면. 이 책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미국이 저질러온 '제국 깡패 노릇'을 예로 들면서 미국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이미 다른 저술들에서 미국이 저지른 짓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인지, 이 책에선 그저 '예를 드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마도 촘스키의 다른 책들을 보지 않은 독자 혹은 미국의 위선에 대해 풍부한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촘스키는 훌륭한 지식인이지만 친절한 선생님은 아니다). 

언제나 '언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온 촘스키답게, 이 책에서도 '미국의 위선'과 '미국의 위선적인 언술이 생산/유통되는 과정' 두 가지를 축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부시 개쉐이가 내세운 '테러'개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설명하는 동시에 미국이 저지른 짓들에 '국가테러'라는 이름을 붙여 '테러' 개념을 무찌르는 방식의 서술. 

하지만! 의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독자로서 이 책에는 선뜻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내용에 동의를 하지 않아서...는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국의 '현재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분석해줬으면 하는 바램. 이런 저술들이 반복적으로 계속되면, 촘스키 책에 곧 물려버릴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정말이지 참을수 없는 번역! 안타깝게도 나는 촘스키의 책을 '한국말로' 읽는 독자다. 그런 만큼, 책 읽기가 무진장 괴로웠다면 그 책에 별 다섯개를 쳐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문장이 진짜 개판이다. 촘스키의 비비꼬인 문체를 감안하더라도,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후 다시 보는 '촘스키 최악 번역서'로 꼽을만 하다. 오자, 탈자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두 사람이 번역을 했는데, 예를 들어보면

"그(폴 월포위츠)의 입장은 특히 교훈적인데, 그것은 그가 중동 민주화의 십자군에서의 그의 지도적인 몽상가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73쪽)

너무하지 않은가? 저런 글로 가득찬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독자를 좀 생각해달란 말이다. 거의 범죄수준이다, 저런 번역은. 이 번역자들, 서로 상대방이 번역한 부분을 읽어보지도 않았나보다. 뒤의 후기에 가면, 앞의 저 문장이 이렇게 번역돼 나온다.

"월포위츠의 이런 행동은 특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그는 민주주의를 위한 십자군 운동을 이끄는 몽상가의 역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312쪽)

아마도 후기에 본문의 문장이 한차례 더 나오는 모양이고, 본문과 후기를 서로 다른 번역자가 각각 맡아서 했나보다. 후기의 문장은 100배 나아졌다. '이것이 나쁜 번역이다'를 보여주기 위해 두 번역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독자를 약올리고 있는 것일까? 

또 아라파트를 '수상'이라고 해놨다. 가끔 번역책들에서 '수상'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수상은 없고 총리만 있다. 과거엔 외국 정부기구 이름을 일본식으로 수상/국무성/외무성 이런 식으로 썼지만 벌써 오래전에 우리식으로 총리/국무부/외무부로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도 수상 어쩌구 하는 표현이 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번역자들의 무성의와 무관심에 한숨이 나올 정도. 

더우기 아라파트는 '수상'도 '총리'도 아니었다. -_-

한술 더떠 이 책은 인명색인조차도 엉터리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한심한 번역책들을 더 읽지 않으려면-- 어서 어서 촘스키보다 더 멋지게 미국을 제대로보고 비판해주는 한국 지식인들의 책이 나와주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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