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들어선 길에서 Auf Abwegen und Andere Verirrungen
귄터 쿠네르트 (지은이) | 권세훈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00-11-30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으련다. 모두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1730년 이후 여러 명의 산지기를 먹어치웠음을 고백하는 바다. 그들이 풍기는 역겨움에다가 값싼 담배, 사슴뿔 단추, 더러운 로덴천 등의 냄새는 내 식욕에 대한 충분한 형벌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백년이 넘도록 산지기를 두번 다시 건드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산지기를 먹어치운 '그 누구'를 상상하게 만들고, 압도되게 만들고, 기어이 충격을 주는 소설, 그리고 한바퀴 돌아서 어이없이 '그 누구'를 먹어치워버리는 세상에 대한 풍자.
귄터 쿠네르트, 동독 출신으로 서독에 망명했던 소설가, 처음 접하는 단편소설집, 작고 얇은 책, 역시나 가벼운 책값. 책표지에는 '전체주의 체제로의 편입을 거부한 아웃사이더의 목소리! 국내 처음 소개되는 귄터 쿠네르트의 대표 단편 모음집'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쓰인 옮긴이의 말 따위는 한번 훑어보지도 않은채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그만 깜짝 놀라버렸다. 첫째 이런 식의 판타지, SF 소설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둘째 다소 엽기적인 판타지들이 뭔가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면 이 책은 그저 '동독 지식인의 독재정권 비판' 혹은 '서독에서 더 인기가 있었던 동독 작가의 작품'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은 단편집에서 때로는 전체주의 정권의 사상검열을 비판하고(G.라는 남자와의 만남에 대한 검열관의 보고) 때로는 물질문명 전체에 대해 씨니컬한 시선을 던져보낸다(때아닌 안드로메다 성좌/아담과 이브/올림피아2). 어떤 소설에서는 두 가지 비판이 결합되기도 한다(동화적인 독백).
그런가 하면 꼭 동독이 아니어도,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현대사회의 허망한 사랑이야기(러브 스토리 메이드 인 DDR/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진다)도 있고, 갈곳 모르는 인간 심리의 단면을 단칼에 토막쳐버린 단편들(잘못 들어선 길에서/대리인)도 있다. 결국 작가가 그려보이는 것은 전체주의, 자본주의, 과학지상주의,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된 현대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다. 시체를 배달하고 배달받는 사회, 타인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 중에 죄 없는 자 누구인가". 1929년생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다른 작가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어술러 르 귄의 단편들이 인류에 대한 SF적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누군가가 내게 말한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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