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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기원 -엘러건트하고 아카데믹한 경제학

딸기21 2007. 11. 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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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기원 The Origin of Wealth

에릭 바인하커. 안현실, 정성철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경제학은 과학인가. 과학이라면, 어째서 실물 경제를 설명하는데 그렇게 무용한가. 


원래 경제학은 생물학과 발걸음을 같이 했다. 맬서스 인구론을 생각해보라. ‘적자생존’을 경제에서의 흥망에 적용하면서 근대 경제학이 시작됐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리학을 닮은 쪽으로 바뀌었다. 경제를 수요-공급의 함수곡선과 ‘균형’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물리학적 균형에 경도된 경제학에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적용, 다시 되돌리자는 것. 저자가 제안하는 ‘생물학적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물론 적자생존 생물학과는 다른 ‘복잡계 경제학’이다. 복잡계는 이 책의 저자가 부의 근원에서 경제의 진화까지, 경제의 모든 영역을 설명하는 키워드다.


여러 행위자들의 미시적인 움직임이 거시적인 패턴을 만들어내면서 행위자와 시스템이 공진화(共進化)하는 그런 체제를 복잡적응계(CAS)라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복잡계 경제학이란 말을 했더니, 누구는 “복잡계가 뭔데”라고 묻는다. 나도 잘 모른다. 쉽게 말하면, ‘복잡한 체계’가 복잡계다. 이렇게 복잡한데 어떻게 그럭저럭 잘 움직여나갈까 싶은 그런 것이 복잡계다. 서울 시내에 1300만명이 사는데, 맨날 교통체증 붐빈다고 하면서 그래도 어떻게 교통시스템은 잘 굴러가네. 우리 몸은 참 누가 만들었는지 병균 들어오면 알아서 저항하고, 힘에서 밀리면 좀 아프다가 또 낫고, 추울 때 더울 때 생각하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조절하고 참 신기하네. 이런게 복잡계다. 완벽한 설계자 없이도 어떻게든 돌아가는, 가끔씩 탈을 일으키지만 그런대로 돌아가는 그런 복잡한 시스템을 말한다. 


경제는 복잡하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복잡계 경제학’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경제학은, 경제의 바탕인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천재적인 분석가에다가 완벽한 정보를 갖고 빈틈없이 판단한다, 시장은 이렇게 퍼펙트한 사람들이 퍼펙트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간간이 요동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수요공급의 황금률에 따라가게 된다는 걸 전제로 깔고 있었다. 그래서 증시의 변동도, 물건들 가격도 결국은 제대로 예측해낼 수가 없었고 심지어 설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완벽을 가정(假定)해놓은’ 과거의 경제학에서 벗어나 경제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경제의 행위자들(사람들)이 움직일 때에는 정보의 오류·부족이나 시간 차이 같은 것들이 있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렇게만 해놓으면, 대체 복잡계 경제학이 생물학의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책의 타이틀인 ‘부의 기원’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인지 감이 안 오기 쉽다. 이 점에서 ‘진화’라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생물학에서의 진화는 대략 이러저러하게 생명체들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돼 왔다는 의미. 저자는 진화라는 것이 생물학에서 말하는 이런 메커니즘을 넘어서, 사회적 제도적 변화, 그러니까 인간 세상이 굴러가고 흘러가는 근본적인 알고리즘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인류사회는 진화해왔다! 경제는 진화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진화는 보편적 알고리즘이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진화하고, 행위자들의 작은 진화가 모여 시장 자체가 진화한다. 시장이 진화하면 국가적 사회적 제도적 장치들도 진화하고, 그래서 다시 시장과 행위자에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경제의 진화를 물리적 기술, 사회적 기술, 사업계획이라는 세 가지의 공진화로 설명한다. 경제의 진화는 하나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세가지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진화의 결과라는 것. 물리적 기술은 말 그대로 테크놀로지, 전통경제학이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기술의 발전을 말한다. 사회적 기술은 공적인 제도는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태도 같은 것들(사회적 자본)이 다 들어간다. 사업계획은 비즈니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시 ‘부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자. 전통경제학자들은 시장과 행위자의 존재를 가정하는데, 시장은 어떻게 해서 생겼으며 부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전통경제학자들의 가정과 달리, 태초에 시장은 없었다! 저자는 몇몇 학자들이 시도한 ‘슈거스케이프(설탕 나라)’라는 간단한 시뮬레이션 실험을 소개하는데,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다. 가상 공간에 설탕 산(山)이 있고 설탕을 열량 공급원으로 필요로 하는 행위자들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실험은, 자원이 있고 그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제활동이 생겨난다, 시장과 거래가 생겨나고 금융과 계층간 격차가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학은 실험이 불가능한 학문이었다고 하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경제학도 실험적 모델들을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슈가스케이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큰 차이를 불러온다는(경제는 경로의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복잡계와 진화의 알고리즘은 경제에서도 통용된다. 한번 경로를 잘못 들이면 격차는 벌어지게 돼 있다.


복잡계와 진화라는 개념을 통해 저자는 경제의 패턴들을 설명해나간다. 어떤 사회 혹은 기업의 문화(사회적 자본)가 서로 다른 사회 혹은 기업들 간에 성공과 실패의 차이를 불러온다는 것, 경제의 행위자들은 연역적 추론 대신 과거 경험을 통한 귀납적 판단을 따르기 때문에 시장에는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완벽한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복잡계 경제학이 주는 실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슈가스케이프라는 단순한 모형이 주는 시사점은, 가난과 불평등의 인과관계가 결코 간단치 않다는 점이다. 가난과 불평등은 아주 복잡한 요소들이 혼합된 결과다. “가난은 착취 때문에 생겨난다”는 좌파적 진단이나 “가난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는 우파적 진단 모두 극도로 1차원적이고 단순한, 현실에 맞지 않거나 혹은 일부분만 맞을 뿐이다.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는 복잡계에서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지만, 동시에 정치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시장은 효율적이다. 그러나 공진화의 세 가지 공간, 즉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은 시장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시장을 벗어나 사회·제도·문화에서 나온다. 그래서 저자는 과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논자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제3세계(딱 집어 아프리카)의 빈곤 원인 같은 것이 분명 ‘문화적 요인’에도 있음을 명시한다.


원인을 복합적으로, 자신있고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좌우의 색안경을 벗어던져야 그런 자신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 아니라 좌우를 벗어나야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원인이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해법이 나온다. 이 지점에서 복잡계 경제학은 전통경제학과 완전히 갈 길을 달리 한다. 


“복잡계 경제학은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한가지 방편을 넘겨주었다. 경제적 진화를 예측하거나 지휘할 수는 없겠지만, 진화를 잘 하느냐 잘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제도와 사회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514쪽) 


저자가 초반부에서 설명했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에는 산타페 연구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책에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산타페 연구소는 복잡계 이론의 메카에 해당되는 곳이다. 칼텍(CalTech)에서 오만한 장난꾸러기 리처드 파인만의 앙숙이었던 머레이 겔만의 제자들이 이 메카의 사도들이다. 어떤 책에서인가, 환원주의의 아버지 격인 겔만의 후예들이 복잡계 학문을 연 것은 역설적이라고 쓴 구절을 읽은 바 있다.


이 책에서는 산타페 연구소 존 홀런드의 복잡계 이론이 계속 강조된다. 더불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모델도 경제적 행위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틀로 자주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듯 복잡계 경제학의 탄생은 1970년대 일리야 프리고진 이래 비선형 열역학과 복잡한 세상을 바라보는 ‘겸손한 학문’들의 등장, 물리학자와 경제학자들 간의 ‘통섭’의 결과물인 셈이다. 


책의 전반부가 복잡계 이론의 기본 개념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경제학에 적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계 경제학의 면면들, 복잡계 이론의 프레임을 통해서 본 실물경제와 시사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복잡계 경제학은 아직 세상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저자의 설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촘촘하다.


엔트로피 문제에서 기업 조직을 혁신적으로 만드는 방법, 주주자본주의와 스톡옵션의 문제점까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면서도, 저자는 스스로 설정해놓은 복잡계 경제학의 주요 개념들과 분석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70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인데 내용이 모두 일관되고 흐름이 명확해서 끝까지 느슨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홀런드의 이론이나 생물학 개념들을 미리 접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좀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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