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절망을 치료하는 사람들 Inside the World of Doctors Without Borders.
댄 보르토로티, 고은영 옮김. Hantz
국경 없는 의사회(MSF)에 대한 보고서. 저자는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겸 논픽션 작가이고, 번역자는 MSF에 소속돼 니제르에서 일을 했었던 소아과 전문의라고 한다. MSF라는 존재가 워낙 명성과 논란거리를 동시에 안고 있는 단체인 탓에 책이 이 단체 혹은 이 ‘운동’ 그리고 ‘윤리’를 어떻게 다룰지 자못 궁금했다.
책은 아주 좋았다. 탄생에서부터 최근(2005년)까지 MSF의 안팎을 충실히, 격렬하고 논쟁적으로 다룬다. 비아프라에서 시작된 MSF의 역사와 르완다, 보스니아를 거치면서 쌓아올린 MSF의 활동과 핫이슈들이 망라돼 있다. 앙골라, 비아프라, 아프가니스탄, 체첸 등으로 이어지는 MSF의 ‘전선’들이 지구촌 곳곳을 가로지른다. 철망처럼 들쭉날쭉한 분쟁과 인도적 위기의 최전선에서 뛰어다니는 MSF 사람들의 숨 가쁜 호흡과 그 뒤의 고민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피 튀기는 분쟁의 현장에서 일했던 MSF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후유증까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요는,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려 뛰는 MSF를 논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사람들의 ‘좋은 일’을 말하는 데에도 시간이 벅찰 텐데 왜 그들의 활동에 대해 논란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MSF를 본격 소개한 이 책은 눈물 뚝 콧물 뚝뚝 떨어지는 ‘미담’이 아닌 글로벌 사회의 윤리 논쟁 백화점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가.
비아프라 기아가 자연재해가 아닌 대량학살임을 고발(그들의 용어로는 ‘증언’)하면서 탄생한 MSF는 출발부터 논쟁을 안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인도주의적 개입’의 문제가 될 것이다.
국제뉴스를 읽으면서 사실 가장 어렵다 싶은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개입은 옳은가. 무기 팔아 돈 챙긴 서방 선진국들이 제3세계의 고난에 인도적으로 개입한다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옳은가.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살리기 위해 사라예보를 폭격하는 것은 옳은가, 아니면 세르비아계가 무슬림들 다 잡아죽여 갈아먹도록 놓아두는 편이 옳은가. 수단 다르푸르에 아프리카연합과 유엔이 군대를 들여보내는 것은 옳은가. 미국이 쿠르드족을 구하기 위해(지랄염병;;)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옳은가.
개입의 문제가 첨예한 논란을 불러오는 것은, 이것이 근대 이후 세계의 버팀목인 ‘주권국가’의 국경과 정면충돌하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이 부딪치는 선상에서 인도주의를 위한/내세운 개입이 이뤄진다. 그리하여 인도주의는 글로벌 시대 지구촌 주민들의 사명과 책무이면서 동시에 부시 같은 놈들이 이용해대는 허울 좋은 간판이 되는 것이고,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에 단돈 만원 안 보태는 사람들까지 “구호활동 문제 많아”라는 발뺌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할일은 많은데 세계는 복잡하다.
MSF 사람들의 스토리가 전해주는 감동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첨예한 논란의 현장에서 나온다.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긴급구호의 와중에 ‘증언’을 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그들은 ‘말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향해 “대량학살을 중단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번역자는 본문 못잖게 재미있는 옮긴이 서문에서 인도주의의 정의와 한계 그리고 MSF의 존재 의미와 역동성을 정리해 놓았다. MSF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장 굶어 죽어가는 환자의 입에 물고기를 넣어주는 사람들이다. MSF는 에이즈를 예방하거나 전쟁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누가 됐건 다치고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고 상처를 꿰매 주는(실제로 MSF의 업무 중 상당수는 지뢰나 총격 따위로 너덜너덜해진 팔다리를 절단하는 일인 듯 보이지만) 것이 MSF의 사명이다.
그래서 그들의 일은 험하고 역동적이다. 더불어 낭만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관료주의를 뒤로한 채 기민하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렇기 때문에’ 긴급구호를 넘어선 개입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마음을 흔들고, 더불어 격한 반응을 불러오는 것 아닐까.
문제는 MSF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인도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도주의를 내걸고 남의 나라 이권 뺏으려 전쟁 벌이고 악용하는 자들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악용해 다르푸르 사태를 가리려는 수단 정권, 감히 인도주의를 입에 올리며 이라크에 인도적 위기를 가져온 부시 같은 놈들이 나쁜 것이지 MSF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개입을 요구하는 인도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왜 나쁜가. 제 나라 사람들 다 죽이는, 그런 나라/정권의 주권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또한 개입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기준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지구적인 분쟁의 시기에 이런 기준을 만드는 것은 아마도 국제사회의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유엔을 존중하고 유엔평화유지군을 통해 분쟁지역의 치안 활동을 벌이는 것도 가능한 해법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인도주의는 6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지상과제다. MSF가 ‘지구의 절망을 치료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은 우문이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세계를 구할 수는 없는 일이며 오래 전에 그럴 수 있는 척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대서양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구조선이다.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생명을 구하며, 더 중요한 것은 희망을 약속하는 일인 것이다.”(293쪽)
인도주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로니 브로만은 “인도주의 철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얘기한다. 즉 인간의 고통을 어떤 역사적 혹은 정치적 잣대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인도주의는 어떤 정치적 야심과도 거리가 멀며 오히려 이들을 경계하고 구호 활동을 하는데 있어 정치적 중립성과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비편파성을 근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또한 로니에 의하면 인도주의는 보편적 도덕이나 모든 인간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거창한 과제를 짊어지지 않으며 이것은 인도주의가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아니라 특수하고 일시적인 현실의 한계 상황에서 희생자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를 채워주는 행위이기 대무닝라고 말한다. 인도주의는 이런 면에서 최소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8쪽, 역자서문)
MSF는 인도주의 구호 단체로서 중립성과 비편파성을 현장에 명시하고 있으나 필요한 경우에는, 즉 구호활동의 이상이 현실에서의 결과와 심하게 어긋날 경우에는 과감하게 철수를 결정하고 불의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겠다는 증언의 정신 또한 명시하고 있다. (10쪽, 역자서문)청은 시에라리온에서 몇 년간 일한 한 독일인 외과 의사를 만났는데, 거기서는 수천 명이 도기를 휘두르는 반군들에게 손을 잃었다. 이 의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크루켄버그 Krukenburg 수술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수술은 척골과 요골을 분리해서 가재 모양의 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수술은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의수를 곧바로 달 수 있는 서구에서는 시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에서 이 수술은 불구가 된 사람들이 생산적인 삶을 일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9쪽)
청은 시에라리온에서 몇 년간 일한 한 독일인 외과 의사를 만났는데, 거기서는 수천 명이 도기를 휘두르는 반군들에게 손을 잃었다. 이 의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크루켄버그 Krukenburg 수술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수술은 척골과 요골을 분리해서 가재 모양의 손을 만드는 것이다. 이 수술은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의수를 곧바로 달 수 있는 서구에서는 시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에서 이 수술은 불구가 된 사람들이 생산적인 삶을 일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9쪽)
국경이라는 말은 다른 것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부 콩고의 도시인 부냐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헤마 족과 렌두 족과 같이 일해왔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쪽하고는 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족 간의 국경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기독교-이슬람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 자선과는 달리 인도주의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더러운 현실에서 일하는 것이기에 원칙을 가지고 일할 수밖에 없죠. 이것은 단지 순수한 실행이 아닙니다. ‘국경 없는’이라는 의미는 하나의 정신이며 언제나 추한 현실에 참여해서 뭔가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국경 없는’은 단지 카우보이식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반항아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주의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고통을 돌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153쪽)
우리는 내년에도 치료가 가능하게끔 노력하겠지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장하는게 MSF의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몫이죠. 종종 우리는 과거 개발 현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향후 1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년이 흐르면 백신이 개발될지도 모르죠. 단지 올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자는 겁니다. (190쪽)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적으로 정부를 비난한 후 MSF는 그 나라에서 철수해야 한다. 1985년 에티오피아와 1998년 북한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MSF가 불완전하게나마 돌봐왔던 사람들은 철수 이후에는 전혀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비난은 최후의 수단이며 모든 다른 방법들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분노에 찬 시인이다. 세계가 인권침해에 주목하게 하는 것은 MSF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의교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주변에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을 때 혹은 의료 구호가 이용당하고 있을 때, MSF는 영역을 확장할 것이다. (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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