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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디자인

딸기21 2009. 4. 18.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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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디자인 ENERGY AT THE CROSSROADS: Global Perspectives and Uncertainties

바츨라프 스밀. 허은녕 외 옮김. 창비



대작이라면 대작이고, 지루하다면 지루하다. 저자는 체코 출신으로 프라하대학을 나와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인데, 요즘 유행하는 지속가능성이나 저널리스틱한 환경-에너지 연구를 해왔던 사람이 아니라 화석연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쓸 것인지를 평생 연구해온 학자다. 그래서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구체적이다. 이는 장점이자 단점이다. 국내 출간본에 붙은 세련된 제목과 깔끔한 표지만 보고 ‘에너지-환경문제를 트렌디하게 다룬 책’으로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옛소련과 동유럽 석탄연구에서부터 미국과 유럽의 재생가능 에너지 최근 연구현황까지를 꿰뚫고 있는 저자는, 그래프까지 잔뜩 동원해가며 세계 에너지 실태를 설명한다. 책은 제목과는 달리 ‘미래 에너지 디자인’에 대한 개론서라기보다는 ‘지구촌 에너지 종합연구서’에 가깝다. 미래의 에너지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센세이셔널한, 재미나고 상상력 넘치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책은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새로 나온 원자로, 요즘 많이 쓰이는 석탄 오염방지 기술, 최근에 많이 팔리는 풍력발전터빈의 설계 같은 것들을 설명한다. 기후변화-에너지를 다룬 다른 책들처럼 저널리스틱하고 생동감 넘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지만 진지하고 묵직하다.


저자는 기후변화-재생가능에너지 담론의 ‘센세이셔널리즘’을 배척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로의 이행을 강력히 주장하면서도 ‘석유 피크론’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이행을 주장하는 이론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는 “석유가 이른 시일 내에 고갈될 것이므로 다른 에너지원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 셸, BP 등의 메이저 석유업체에서 일하다 ‘석유시대 종말론’의 선두주자가 된 콜린 캠벨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른바 ‘허버트 종형 곡선’이란 것을 제시하면서 21세기의 초반에 석유생산의 정점(peak) 즉 ‘이미 파낸 양이 남아있는 양보다 많아지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세계의 석유생산은 2010년 이전에 정점을 지나가거나 지나간 것이 된다. 국내에서는 이필렬 에너지대안센터 대표 등이 대표적인 ‘피크론자’다.

 

하지만 바츨라프 스밀은 “석유 탐사·시추·채굴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석유자원의 고갈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얼핏 석유체제 옹호론자의 말처럼 들리지만 분명 차이는 있다. 석유 중독자들은 “그러므로 석유를 더 펑펑 써도 된다, 괜히 재생가능에너지에 헛돈 들일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밀의 논지는 다르다. “석유가 곧 말라버린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에너지 시스템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석유시대의 종말은 21세기 100년 이상에 걸쳐 서서히 올 것이다. 이는 석유가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석유가 경쟁력 없고 환경비용이 지나치게 높은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석유가 갖고 오는 환경적 폐해를 받아들이기 싫다고 생각하게 될 때, 석유보다 재생가능에너지의 수급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때가 되면 석유시대는 끝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석유 곧 떨어진다더니 아직도 펑펑 나오네, 하면서 석유시대 종말론자들을 냉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환경주의자들을 ‘양치기 소년’ 취급하곤 한다. 스밀은 양치기 소년들이 불러오는 역작용을 경계한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시뮬레이션에 대한 거부감이다. 옮긴이들이 잘 설명해놓았지만, ‘컴퓨터 이전 세대’의 과학자인 저자는 “나도 처음에 시뮬레이션이라는 거 나왔을 때 홀딱 반한 경험이 있지만 뒤에 돌아보니 헛물만 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에너지-기후변화 연구의 제반 작업들이 너무 단순하고 너무 편협해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몽땅 틀린 것으로 판가름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 예측은 몽땅 헛일이네, 하고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예측 시나리오를 과신하지는 말자고 그는 말한다. 미래를 점치며 어느 한 쪽에 올인하기보다는 규범적인(즉 환경과 성장의 공존을 위해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할) 미래의 룰을 만들고, 현실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들을 차근차근 해나가자는 주장이다.

 

이 ‘규범적, 현실적인 미래의 룰’을 직접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책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유추하건대 현실적으로 지구상 수많은 이들이 쓰고 있는 석탄에서는 청정기술을 널리 보급하고, 역시나 지구상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연료인 땔감(거창하게 말하면 ‘바이오매스’)도 환경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도록 도와 에너지 결핍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재생가능에너지로 각광받는 태양광·풍력·조력 등의 연구와 실용화를 지원하고, 탄소세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나가도록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되, 너무 폼 잡고 너무 과장하지는 말자, 재래식이라고 몽땅 배제하고 없애자 주장하지는 말자, 하는 것.

 

상식적인 내용을 방대하게 구술해놨으니 ‘재미있는 책’이라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넘쳐나는 에너지 관련 책들 중에 이 책이 ‘대작’인 것은 분명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식적이고 구체적인 지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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