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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뿌리내릴 곳 없는 자의 슬픈 여행기

딸기21 2014. 7. 3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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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팔레스타인 시인이 쓴 귀향의 기록 (후마니타스)
I Saw Ramallah
Mourid Barghouti. Edward W. Said (Introduction). Ahdaf Soueif (Translator)  


“팔레스타인 시인이 30년의 망명 뒤 고향인 요르단강 서안에 돌아와 기억을 되새겨본다. 지나온 세월의 기억이 남긴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바르구티는 이스라엘이 6일전쟁에서 이겼을 무렵 카이로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가 고향을 다시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오슬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난 뒤인 1996년에 이르러서였다. 누구인들 마찬가지였겠지만 바르구티는 고향을 다시 찾아가 친척들과 친구들을 재회했다. 라말라에서 살고 있는 그 사람들, 라말라의 물리적인 풍경에 일어난 변화들을 보면서 바르구티는 추방됐던 자신과 똑같이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서 ‘추방’된 고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적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적들이 애초에 저질렀던 범죄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느끼는 분노는, 그들과 맺었다는 평화협정이 결코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카이로에 살고 있는 바르구티는 시인의 섬세한 눈과 언어를 가지고, 라말라 여행기를 통해 아랍 세계 전체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서평) 

마음의 울림이 참 컸다. 읽으면서 가슴이 시큰했고, 오며가며 책장을 넘기다가 갑자기 서글퍼져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뿌리내릴 곳 없는 자의 슬픔. 


저자인 무리드 바르구티(공식 홈페이지 http://mouridbarghouti.net)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바르구티는 1944년 7월 8일 팔레스타인 라말라 부근에 있는 데이르 가사나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바르구티라는 성(姓)은 아주 흔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열 명 중 하나는 바르구티’라고 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지도부에도 바르구티라는 성을 가진 이들이 여럿 있어서, 외신에서는 심심찮게 이 이름을 볼 수 있다. 

라말라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중심도시다. 팔레스타인은 아직 공식적으로 유엔 회원국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인정받아 유엔 산하 기구들에 최근 몇 년 새 잇달아 가입을 했고, 한국도 팔레스타인과 수교해 대표부를 두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은 당초 2차 대전 뒤 정해진 영토가 있었으나 이스라엘이 네 차례의 전쟁으로 야금야금 빼앗아가고 이웃한 요르단이 끼어들어 대부분의 땅을 집어삼켰다. 그래서 지금은 이스라엘의 서쪽과 동쪽으로 영토가 나뉘어 있는 지경이 됐다. 서쪽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낀 작은 땅 가자지구가 있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의 잦은 봉쇄 때문에 외부로 오갈길이 막혀 유엔 구호기구의 구호식량에 의존하고 있다. 

2014년 7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또 다시 침공, 사망자가 1400여명에 이르는 등 팔레스타인에 엄청난 희생을 안겼다.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면서 웃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 수십년간 맨 몸으로 겪어왔던 일들임을 이제는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게 되어버렸다. 비록 미국은 이런 진실을 비웃으며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장악한 무장 정치조직 하마스를 ‘테러집단’ 리스트에 올리고 ‘무력화’하겠다며 수시로 공격을 하곤 한다. 

라말라, 나라 아닌 나라의 수도 아닌 수도 

라말라는 이스라엘 동부에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있다. 라말라는 자치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독립국가가 출범하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생각이지만 이스라엘이 자기네 땅으로 합의를 본 서예루살렘을 넘어 동예루살렘까지 사실상 점령하고 있어 쉽지 않은 문제다. 이 때문에 현재로선 사실상 라말라가 팔레스타인의 수도 노릇을 하고 있다. 라말라를 중심으로 한 서안지구에서는 자치정부의 주축인 파타(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최대 정파)가 권력을 잡고 있다. 

무리드 바르구티는 라말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인생은 자기 고향에서 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고향을 다시 밟기도 힘들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유학을 갔던 그는 그곳에서 1967년의 전쟁을 맞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앗아간 ‘점령(The Occupation)’으로 귀결됐던, 이른바 ‘3차 중동전쟁’이다. 그의 고향 라말라와 요르단강 서안, 아니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가 이스라엘에 ‘점령’됐고 국경은 막혔다. 이제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난민이 되었다. 

1980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이스라엘하고 손을 잡아버린다. 중동아랍권의 맹주라는 이집트가 아랍국가들 중 (요르단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집트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의 편이 아니다. 이집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팔레스타인 망명단체들과 운동가들은 추방당한다. 카이로에서 대학을 나와 이집트 여성과 결혼해 시인으로 살고 있던 바르구티 역시 추방 대상이 됐다. 

이렇게 그는 ‘이중의 난민’이 됐다. 역시 문인이자 대학교수였던 이집트인 아내 라드샤와 돌배기 어린 아들을 카이로에 남겨둔 채, 그는 이집트에서마저 쫓겨나 세상을 떠돈다. 이 책은 그렇게 뿌리 뽑힌 채 살아가야 했던 한 지식인의 자기 기록이다. 떠돌아다니는 사람, 세상 어디에도 ‘나만의 풀뿌리 하나’ 심을 곳 없는 사람. 

“떠돌이는 언제나 주거지 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주거지등록 신청서의 빈 칸을 채우고 인지(印紙)를 사 붙인다. 떠돌이는 끊임없이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사람, 언제나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떠돌이는 존재하는 장소와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 곳에 다가가려 하지만 동시에 그 장소를 밀어낸다. 그 월요일 정오에, 나는 추방당했다.” 

displacement. 난민은 영어로 refugee 라 하고, 국경을 넘지 않고 한 나라 안에서 집을 잃거나 해서 떠도는 유민(流民)들은 (internally) displaced person 즉 ‘IDP’라 부른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67’이라는 공포의 숫자로 남은 그 전쟁으로 바르구티는 displaced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두번째 집’에서도 displaced 되었다. 영어 그대로 해석하면 잘못된 장소에 놓이게 된 사람,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게 된 사람이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렇게 정처를 잃었다. 아버지는 요르단에, 어머니는 팔레스타인에, 큰 아들은 돈 벌러 사우디아라비아에, 작은 아들은 공부하러 카이로에, 딸들은 시집가서 아랍에미리트연합에, 삼촌은 불법이주노동자로 프랑스에. 이런 일이 허다하다. 

뿌리 뽑힌 바르구티는 곳곳의 아파트들과 호텔을 전전한다. 집 없이 어디를 가든 호텔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에게는 꽃병의 물을 갈아줄 의무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화분 하나, 꽃병 하나를 보면서도 슬픔을 느낀다. 그의 글은 슬프다. 여러 나라로 흩어진 가족의 전화를 늘 기다리지만, 혹시나 그 전화가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은 어느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일까 늘 두렵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나날들이다. 

일상의 언어로 ‘역설’을 쓰는 시인 

1993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중재로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다.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Ra‘ytu Ramallah>에는 여러 가지 층위가 있는데, 이 책의 제목과 관련된 두 번째 층위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훗날의 자치정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정치적 실체로 부상하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정부는 십수년 전 쫓아냈던 팔레스타인 망명자들에게 다시 문호를 연다. 오랜 방황 끝에 이집트의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느새 바르구티의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그리고 3년 뒤, 1996년 어느 날 드디어 바르구티는 고향 라말라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스라엘이 국경을 ‘개방’해준 것이다. 그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닌데도 국경의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동 통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이 모든 권한을 갖는, 그런 협상, 그런 개방. 그것이 오슬로 평화협정의 한계이자 실체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협정 이후로 팔레스타인은 라말라에 자치정부를 세웠고, 국가의 모양을 조금씩 갖춰갈 수 있게 되었다. 


책은 수십 년 만에 단 며칠 동안 라말라를 방문한 바르구티가 느끼는 것들, 돌아본 것들을 담고 있다. 라말라로 가는 다리를 건너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천년의 시간이자 인생의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돌아간 라말라는 또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멈춰져버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이스라엘에 빼앗겨 버린 도시에서 그는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맛본다.
이 세상 모든 곳이 ‘발전’하고 있을 동안 라말라는 ‘헤브루 국가 주변의 언덕배기 시골’이 되어버렸다. 점령은 그곳 사람들에게서 상상력과 배움과 모든 기회를 앗아갔다. 바르구티는 미래에 대한 꿈을 이제부터 다시 꾸어야 하는 사람들, ‘고향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들과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애와 고통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 얘기’에 치중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조차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음에 흐르는 생각들, 자신에게 강요된 느낌들을 보여주고 눈에 비친 것들을 전해줄 뿐이다. 

바르구티는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다. 나기브 마흐푸즈 Naguib Mahfouz (1911-2006)는 이집트의 작가로서, <게벨라위의 아이들>이라는 소설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현대 아랍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대문호다.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아랍권 작가에겐 큰 영광이다. 

바르구티는 에세이 성격의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로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받았고, 이 책이 2000년 이후 영어로 출간됨으로써 구미권에도 이름이 알려졌다. 하지만 실은 그는 12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가장 최근 발표한 것은 2005년 베이루트에서 펴낸 <한밤 Muntasaf al-Lail>이라는 시집이다. 떠돌이처럼 살아온 인생을 반영하듯 그의 글은 이집트나 레바논 등지에서 주로 출간됐다. 2000년 팔레스타인 시인상(Palestine Award for Poetry)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고향에서 펴낸 책은 없다.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는 미국 랜덤하우스에서 영역본이 발간됐고, 영국에서는 블룸스베리 출판사가 발간을 했다. 오리엔테 이 델 메디테라네오 출판사를 통해 스페인어로도 번역본이 나왔다. 한국어판인 본서는 미국에서 나온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아랍어 원문은 아니지만, 영어로 된 이 책의 문장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제된 슬픔, 담담한 희망을 잘 전해주는 문체. 영역을 한 아흐다프 수에이프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권두의 추천사는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1935-2003)가 썼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이다. 사이드 역시 바르구티처럼 팔레스타인 태생이면서 카이로에서 공부를 했다. 

사이드는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에 대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추방을 가장 잘 묘사한 실존적 기록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영국의 비평가 겸 작가로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존 버거 John Berger는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날 선 통찰력과 추방의 쓰라린 고통이 들어있는 책”이라고 썼다. 요르단의 시인으로 아랍출판연구소의 기관지 편집장인 주하이르 아부 샤예브 Zuhair Abu Shayeb는 2008년 12월 가디언에 실린 이 책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서 “바르구티는 현대 아랍 시들의 유행처럼 되어버린 영웅주의적인 톤과 슬로건들을 모두 버렸다”면서 바르구티의 작품이 흔한 ‘저항시’혹은 ‘저항문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래는 바르구티가 홈페이지에서 밝힌 ‘나의 글’이다. 

“인생은 단순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삶을 단순화하는 건 시인인 나에게는 적이나 다름없다. 지나온 내 인생 50년 동안 내가 속한 세상에선 정상과 비정상이 노끈처럼 비비 꼬여 있었다. 전쟁과 이주와 억압과 불확실성이 극단으로 넘나드는 역사적인 순간에도 사람들은 매일매일의 일상을 찾아간다. 나는 내 작품들을 통해, 전형화할 수 없는 세상을 전형화된 언어로 표현하는 관행에 도전하려고 애썼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경이를 발견하려 애썼고, 극단 속에서도 일상을 찾으려 노력했다. 팔레스타인의 역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폭격을 받았다는 것보다도 한 가족이 만났다는 게 더 큰 뉴스가 되는 현실! 나 역시도 그런 일상과 비일상의 직조(織造)에 작가로서 매료되곤 한다. 평범한 식구들이 아침 식탁에서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그런 이상한 일이 늘 일어나지만 그 자체가 나를 둘러싼 세상에선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 

나의 언어는 실체적이고 정확하고 눈에 보이는, 견고한 언어였으면 한다. 일상적인 보통의 언어를 통해 비정상적인 상황을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고관들이 쓰는 웅장한 수식어구나 현란하고 거짓된 말들을 모두 거부하고, 평범한 이차원적인 메타포에 복잡한 현실을 압축한 새로운 언어를 제시해 보이려 애쓰고 있다. 

나는 이론 따위에 짓눌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한편의 시와 글 속에 드러난 우리네 삶은, 어떤 문학이론으로도 전복시킬 수 없을 만큼 풍성하니까.”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역설은 오슬로 협정 이후에도, 지금도 그대로다. 바르구티는 라말라 방문 이후 잠시 자치정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1999년 그는 라말라에 돌아가 세계은행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팔레스타인 고고학·문화유적 자료조사 프로그램 담당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3년간 세계은행에서 받은 기금은 누군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리기 일쑤였다. 바르구티는 “추한 일들을 접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 자신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위조된 기금 사용 영수증을 찾아내 ‘윗사람들’에게 찾아간들, 윗사람들 모두가 횡령한 이를 두둔하는 상황에 맞부딪칠 뿐이었다. 바르구티는 결국 물러났고, 짧은 근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끝나버렸다. 뒤에 바르구티는 영국 ‘가디언’과 인터뷰하면서 자치정부에서 일했던 기억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둘러싼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실수도 하고, 부패를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횡령범을 찾아내 끌고가면 사람들은 ‘바르구티는 그 중 얼마를 챙겼는지’를 궁금해했다. 사람들이 지원받은 예산을 가지고 내 사무실에 가죽 의자들을 새로 들여놓은 걸 봤을 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물러났다.” 

바르구티의 이런 경험은 그 혼자만 겪은 것은 아니었다. 아랍의 몇몇 산유국들과 유엔, 국제 구호기구들이 자치정부를 지원하고 있지만(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압박하고 싶을 때면 이들 자금줄을 막는 수법을 쓴다) 그렇게 모은 돈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서 온전히 쓰이는 것은 아니다. 자치정부의 부패와 관료주의, 비효율성 등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설립운동의 정당성과 단결을 갉아먹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 2006년 총선에서 가자지구에 기반을 둔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승리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도, 파타를 중심으로 한 자치정부 주류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한 사람들이 하마스에 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틀린 역사 

바르구티의 인생에서 벌어진 일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이후 열강에 의해 결정된 ‘유대국가 수립’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발단은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는 당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 즉 아랍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이 갈수록 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2000년 전 자신들의 고국이었다고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고 나선 것이다.  

근거가 희박한 성서고고학 차원의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자기네 선조의 땅이라 주장했다(학문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띤 성서고고학의 허상에 대해서는 키스 W.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이산) 등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일부 유대인 집단은 자금을 모아 조직적으로 유대계 유럽인들의 중동 이주를 추진하기도 했다. 

 


1차 대전 말미에 영국은 자기네가 점령하고 있던 이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유대인 정치집단에 약속을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영국 총리였던 아서 밸푸어 Arthur Balfour (1848-1930)의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었다. 

1920년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것을 발표, 일부 지역을 위임통치 지역으로 만들고 그 나머지 점령지에는 ‘요르단 왕국’을 세운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만 여기엔 ‘요르단도 영국의 보호령으로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에선 영국의 공식·비공식적 지원을 받는 유대인 이주자 집단과 아랍계 주민들 간 유혈 갈등이 벌어졌다.


1929년이 되자 예루살렘을 향후 출범한 유대국가의 수도로 삼겠다는 유대계 이주자들과 아랍계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훗날 예루살렘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령,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땅이 됐지만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으로 동예루살렘마저 무력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유엔 결의안 등을 모두 무시한 채 동예루살렘을 불법 점령하고 있다. 이것이 이름하여 ‘예루살렘 귀속문제’다.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실상 텔아비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는 사실상 라말라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차지하려 하고 있고, 반대로 팔레스타인은 독립국가를 세워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으려 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그 사이에 끼어 억압과 테러와 갈등의 도시가 됐다. 

나치를 피해 독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 까닭에, 1930년대 중반이 되자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 비율은 거의 3분의1로 늘어났다.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유대계 민병대가 아랍계 주민들을 공격, 학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고, 갈등은 고조됐다.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아랍계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9년 잠시 ‘유대 독립국가 건설을 유보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뒤늦게 제한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정치적 줄타기를 했던 셈이다.
 

이번엔 유대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된 강경파 시오니스트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유대계 테러집단 ‘이르군’이 예루살렘 시내 다윗호텔에 차려져있던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통치당국을 공격해 91명이 사망했다. 이듬해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내 영국 점령당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이 2차 대전 기간 실시했던 유대인 이민 제한 조치에 반감이 쌓여왔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동시에 유대계는 유대 독립국가를 세울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고, 1948년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건국’, 팔레스타인인들에겐 ‘알 나크바(대재앙)’가 일어난 것이다. 

갓 창설된 유엔은 중동 분할계획을 만들어 이스라엘과 아랍계의 땅을 구분했지만 이스라엘은 유엔이 정한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공격해 점령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 그 이후로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에는 거대한 팔 난민촌이 형성돼 수십 년 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쫓겨난 이들이 모여 살면서 가자지구는 사실상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유엔 구호캠프에 1950년 공식 등록된 팔레스타인 난민 수는 96만 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2세, 3세들로 인구가 불어나면서 오늘날에는 40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중엔 바르구티처럼 이집트 등 팔레스타인 주변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고, 이스라엘에서 밀려나 요르단강 서안지구 혹은 가자지구의 난민촌에 들어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은 바르구티의 아들같이 한번도 ‘부모의 고향‘에서 살아보지 못한 난민 2세대, 3세대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난민들을 팔레스타인에 귀환하도록 허용해줄 것인지가 오슬로 협정 협상에서 논란거리가 됐는데, 이스라엘은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 문제는 결론 없이 넘어갔고, 지금도 잠복해 있다. 

‘알 나크바’와 잇단 중동 전쟁 

1949년 이스라엘은 유엔에 가입함으로써 명실상부 독립국가가 됐다. 유엔은  예루살렘을 국제 관할 하에 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스라엘 동쪽, 요르단강 동안에 위치한 트랜스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요르단 하솀 왕국으로 변경됐다. 오늘날의 요르단이다. 

알아둬야 할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야금야금 빼앗아간 것이 이스라엘만은 아니란 사실이다. 1950년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 대부분 지역을 병합해버렸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빼앗은 뒤 그 위쪽에 있는 가자지구를 지배하에 두었다. 뒤에 이집트가 가자지구를 토해내긴 했지만, 이집트와 요르단 역시 이스라엘과 결탁해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아간 사실만은 분명하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는 나중에 사실상의 국가인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두 지역이 물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이스라엘은 툭하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서안과 가자 사이의 소통을 막는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끼리도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스라엘이 개입된 여러 차례의 전쟁이 일어난다.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결과를 불러온 이른바 ‘독립전쟁’(1차 중동전쟁) 이후 두번째 중동전쟁이 발발한 때는 1956년이다.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이른바 ‘수에즈 위기’가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영국, 프랑스와 함께 이집트를 공격하고 이집트 땅이던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중동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압력을 넣어 점령군은 물러났으며 이스라엘군은 이듬해 시나이에서 철수했고, 가자지구는 다시 유엔 통치령으로 돌아갔다. 

1964년 아랍연맹의 지원 아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설됐다. 그 3년 뒤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3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바르구티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뇌 속에 각인됐다고 한 숫자 ‘67’, 바로 그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참혹 그 자체였다. 팔레스타인 땅은 두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두 조각났고, 전쟁에 개입했던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빼앗겼고, 이집트는 뒤에 되찾긴 했지만 시나이 반도를 잠시 점령당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중에 떨어졌고, 팔레스타인을 떠나있던 이들은 귀환이 불가능해져, 이스라엘 건국 때 생겨난 ‘1차 난민’에 이은 ‘2차 난민’이 됐다.


이스라엘의 '땅 빼앗기'에 편승했던 아랍국들


팔레스타인 난민·망명자 그룹은 팔레스타인 밖에서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거세게 펼친다. 1969년이 되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집행위원장에 취임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저항운동 진영 내 좌파그룹에 해당되는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같은 분파들이 항공기 납치 등을 일으키며 테러를 결합한 전술로 독자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아랍국들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도 복잡해졌다.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자국 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했다. 명분은 팔레스타인 무장집단인 ‘검은 9월단’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변변한 자원이 없는 요르단은 독립 이후의 짧은 혼란 뒤 후세인 국왕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기틀을 닦았다. 


후세인은 이른바 ‘줄타기 외교’의 달인으로서, 팔레스타인 출신들을 억압하고, 이스라엘과 협상하고, 그러면서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냈다. 후세인 시절 요르단이 중동정세의 지렛대 역할을 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인 역량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팔레스타인 문제는 요르단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이슈다. 요르단 국민의 55%가 요르단강을 건너온 팔레스타인인이다). 


요르단강 주변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가자지구에서는 난민촌 지도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이 PLO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반대하고 나섰다. 야신은 훗날 가자지구에서 무장정치조직 하마스를 창설한 인물이다. 일각에선 숱한 신체적 장애를 안고 있던 야신이 직접 하마스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보기도 한다. 야신은 2004년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표적 암살’로 무참히 살해됐다. 


요르단 정부의 탄압으로 세력이 악화되긴 했지만, ‘검은 9월단’ 게릴라들은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의 숙소를 공격하는 테러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에 ’테러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덧씌운 계기가 됐다. 


이듬해 라마단 달인 10월(유대력 ‘욤키푸르’)에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초반엔 이집트-시리아 연합군이 우세를 보였다.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에도 이 전쟁 초반부 아랍권의 섣부른 승리감 등에 대한 기억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쟁은 이번에도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아랍국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영향이 없지 않았다. 걸프의 산유국들이 서방에 맞서 석유 수출을 끊으면서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세계적인 충격을 안겼다. 미국과 서방은 그 후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역내 분쟁’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중동 석유지정학이라는 구도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오슬로에서 캠프데이비드까지


“지금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다. 내 손이 올리브 가지를 놓지 않게 해 달라.” 아라파트가 1974년 유엔에서 했던 유명한 연설이다. 아라파트와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역내 상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레바논 특유의 기독교 일파인 마론파는 레바논 내에서 PLO가 세력을 확대하자 불안감을 느끼고 1975년 공격을 시작했다. 이로써 레바논 내전이 벌어지고, 이스라엘-시리아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레바논 땅에서 사실상 대리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30년 가까이 레바논은 사실상 시리아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이 점령은 2004년 레바논의 ‘백향목 혁명’ 뒤에야 끝났다. 


나세르의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이 된 안와르 사다트는 미국의 원조를 노리고 점점 이스라엘과 밀착하더니, 예루살렘을 방문해 크네세트(이스라엘의 의회)에서 연설하기까지 한다. 아랍권 전역에선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에 거센 반발이 일었다. 하지만 사다트는 끝내 1978년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와 손을 잡는다. 미국 캠프데이비드의 대통령 별장에서 지미 카터 미 대통령 중재로 평화협상을 타결시킨 것이다. 


이듬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집트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PLO 등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바르구티 같은 체류민들조차 모두 쫓겨나게 된 것이 이 평화협정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일이다. 


사다트는 1981년 이집트 군부 내 이슬람 과격파에 암살됐으며 호스니 무바라크 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한다. 사다트는 죽었으나 무바라크 역시 팔레스타인계에 대한 가혹한 추방과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1980년대 내내 레바논, 튀니지, 이집트 등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은 현지 당국의 탄압과 이스라엘의 공격, 내전 등으로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87년이다. 바깥이 아닌 팔레스타인 안에서,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10대, 20대들이 돌을 들고 거리로 나선 섯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1차 인티파다(민중봉기)다. 이전까지의 해방운동 주도세력이 아라파트 같은 ‘난민 1세대’였다면, 이 때부터는 한번도 나라를 가져보지 못한 새로운 세대가 저항의 주충으로 나선다. 여기에 힘입어 가자지구에서는 1988년 하마스가 창설됐다.


아라파트의 PLO는 10대들의 목숨 건 싸움의 승리를 고스란히 가져갔다. PLO가 주축이 된 팔레스타인국민협의회(PNC)는 1988년 11월에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고, 25개국이 팔레스타인 망명정부를 승인했다. 그 대신 아라파트는 유엔 총회 제네바 특별회의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뜻을 함축한 결의안을 받아들였다. 일각에선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목숨값을 자치정부 정권과 맞바꿨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1993년 중동평화 구상의 결절점으로 평가받는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고, 1994년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 라빈 총리가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라말라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탄생했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은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인정받고 있다(유엔에서는 공식 독립국으로 승인받지 못했으며 지금도 유엔 총회 상정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 해 라빈과 아라파트, 그리고 이스라엘 부총리였던 시몬 페레스(올 7월말 이스라엘 대통령에서 퇴임)는 나란히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라빈은 이듬해 유대 극우파 카흐네차이에 암살됐다. 아라파트는 1996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됐다.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이 2001년 총리가 됐다. 샤론은 1980년대 초반 레바논을 공격하면서 아랍권 전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군인 출신이다. 국방부 장관을 지내다가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을 지원했던 사실이 드러나 사임하기도 했다. 주택부 장관을 역임할 때에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공세적으로 세워 점령을 계속했다. 총리가 되기 직전 2000년 말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를 일부러 방문, 팔레스타인의 ‘제2 인티파다’를 촉발시켰고, 이렇게 갈등을 자극하는 수법으로 이듬해 선거에서 승리, 집권했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사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등지에서 유혈 살상을 계속했다. 수년에 걸친 2차 인티파다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 4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2004년 아라파트가 숨지고 카리스마가 약한 마흐무드 압바스가 대통령이 됐다. 가자지구에서는 하마스가 득세하면서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도 가속화했다. 


이스라엘군은 1967년 전쟁 이래 사실상 점령하고 있던 가자지구에서 2005년 철수하는 제스처를 보였지만 식량도 의약품도 오가지 못하게 막는 가혹한 봉쇄와 탄압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2008년 말 가자지구를 공습하면서 ‘가자전쟁’을 시작했다. 명분은 팔레스타인 측의 로켓포 공격을 중단시키겠다는 것이었지만, 공포효과를 노린 끔찍한 전쟁이자 가자지구 주민 전체에 대한 ‘집단 징벌’이었다. 2009년 1월 지상군까지 투입해 가자를 침공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유엔본부까지 공격했으며 생화학무기인 백린탄을 쓰는 등 국제법상 금지된 온갖 공격을 저질렀다.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가 초토화된 것은 물론이지만, 이스라엘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스라엘 하레츠 등 유력언론들은 ‘비정상 국가’가 되어 혼자만의 성에 고립돼버린 이스라엘의 현실을 개탄했고, 이스라엘의 정신적·물질적 지주인 뉴욕 유대인들, 이른바 ‘브루클린 유대인들(돈 있고 교육받은 미국의 유대인 그룹)’마저 이스라엘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2010년 2월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에서 하마스 지도자를 ‘표적 암살’해 도마에 올랐고, 5월에는 가자지구로 향하던 터키 선적 구호선박을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공격해 9명을 사살했다. 2012년 하마스 무력화를 내세워 가자를 공습했고, 2014년 다시 침공했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악순환은 언제나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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