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그들이 온 이후

딸기21 2012. 5. 2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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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에 딸과 함께 도쿄 우에노의 국립과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잉카 제국展>에 다녀왔다. 잉카 문명의 여러 면모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잉카 유물도 구경시켜주는 전시회였다. 재미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열리는 '무슨무슨 문명 전시회'와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일본의 전시 수준은 그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일본인 학자의 해설 동영상은 물론이고 3D입체 영상까지 있어서 초등학교 5학년 딸도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전시회의 부제는 '마추피추(우리식 표기는 마추픽추) 발견 100년'이었고, 전시품 중에는 유골(두개골)과 미라도 있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의 처형 장면을 담은 1분여 짜리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스페인 침략자들의 잔인한 원주민 학살을 비중 있게 조명했다는 점이었다. 


아타우알파는 내겐 잊지 못할 이름이다. 어릴 때 읽었던 ABE 시리즈 중에는 야나기야 케이코라는 일본 작가가 쓴 <먼 황금나라>라는 책이 있었다. 황금나라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가 어떻게 제국주의자들의 먹이가 되는지, 제국의 몰락을 지켜 본 한 귀족 청년의 눈을 통해 그린 작품이었다. 책은 너무 슬펐고, 충격적이었고, 나는 엉엉 울면서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읽었다. 


생각의나무에서 나온 <놀랍다 탐험과 항해의 세계사>라는 책 시리즈를 가지고 있다. 아이 선물로 받은 책이다. 시리즈 구성을 보니 '마르코 폴로와 동양의 탐험', '콜럼버스와 아메리카 항해', '바스코 다 가마와 인도로 가는 길', '코르테스와 아스텍 제국의 몰락', '피사로와 잉카 제국의 정복' 이런 식으로 돼 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요즘의 서양 학자들이 무지몽매하게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설파하고 있지야 않겠지만 어쩐지 제목을 훑어보다 보면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스페인에서보다도 더, 미국에서보다도 더,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라는 주입된 공식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빙빙 둘러 왔는데, 얼마전에 읽은 <그들이 온 이후(From a Native Son)>(워드 처칠 저 | 황건 역 | 당대 | 2002)라는 책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지은이 워드 처칠은 미국 토착민 즉 '인디언' 혈통의 학자이자 저술가이며 토착민 권리운동가다.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고 1960년대 말에는 당시를 휩쓴 급진 운동에도 동참했다 한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는 토착민 권리에 천착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부터 콜로라도대학 아메리칸인디언학과(이런 이름의 학과가 있다는 게 더 인상적이다) 교수로 재직하다가 9.11 테러범들을 편든 에세이,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원죄를 고발하면서 테러범들의 입장을 옹호한 에세이를 쓴 게 문제가 돼 해임됐다 한다. 


<그들이 온 이후>는 워드 처칠이라는 토착민 운동가의 눈으로 본 '콜럼버스 이후의 세상'이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이스라엘의 건국이 '알 나크바' 즉 '대재앙'이 된 것처럼 아메리카 토착민들에게 콜럼버스를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도래는 '재앙'이었다. 


그걸 이제와서 말해 무엇하냐고? 실상 우리는 그들이 겪은 재앙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비토착민'들 대부분이 알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부제는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다. 미국인들이 토착민 절멸사를 알지 못하는 것은 토착민 대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학살당하고, 외지인들이 가져온 병균에 감염돼 죽고, 땅 잃고 힘 잃고 살 방법을 잃고 죽어 없어졌다. 


책은 그 멸종의 과정, 과거와 현재에 대한 13개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다. 맨 앞에 나온 것은 콜럼버스라는 '신화'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492년 이후의 북미 상황을 개관하고 이후 수백년 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원주민 탄압의 역사를 간추린다. 과거 '서부개척시대'의 일들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실상 미국 토착민 공동체들이 붕괴한 것은 우리가 아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난 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역사의 과정 중 어느 시기에 미국은 토착민들에게서 땅을 '구입'하는 시늉을 했고, 자기네끼리 만든 '법률'과 사유재산제라는 '제도'로 토착민들의 땅을 가져가버리곤 했다. 지금도 미국 중동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토착민 대 미국 정부 혹은 토착민 대 주정부의 땅 소송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책의 일부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됐는지, 시대가 바뀌면서 인디언에 대한 묘사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실상을 조명해 보인다. 더불어 그런 틀을 깨는 토착민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런 예술가들에 대해서 접해본 적이 없어 아쉽다. 


미국 토착민들의 이야기를 남의 일로만 들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먼저, 남의 일이든 나의 일이든 간에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앎'이 올바른 행동의 기반이기 때문에. 두번째는 누구나 얘기하듯이 '세상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어져 있는 세상에서 토착민 절멸의 메카니즘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유령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줄루족과 여러 아랍 민족들과 전쟁을 벌일 때 편들어 주었고 미국이 필리핀의 모로족과 싸울 때, 프랑스가 알제리나 인도차이나와 싸울 때, 벨기에가 콩고에서 싸울 때 그리고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싸울 때도 그들을 편들어 주었다. 콜럼버스 유령은 아편전쟁과 캄보디아 '비밀폭격’ 때도 나타났고 19세기에 캘리포니아 토착민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할 때나 1980년대의 과테말라 마야족 학살 때도 나타났다. 물론 이 유령은 나치 권력의 핵심부에게도, 소비보르나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지휘관이나 간수들에게도 그리고 동부전선의 아인자츠그루펜(나치독일의 학살특무부대) 대원들에게도 나타났다. 요컨대 제3제국도 콜럼버스가 시범을 보였던 유럽 문화의 주요 테마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치즘은 결코 독특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콜럼버스의 ‘발견’에서 시작된 ‘신세계 질서’의 끝없는 연속체의 하나에 불과했다." (28쪽)


이렇게 해서 저자의 비판은 '미국'을 넘어 여전히 제국주의의 정신적/물질적 유산 위에서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명 전반을 향해 나아간다. 이른바 제3세계의 역사적 문화적 성취는 모두 '인류학'이나 '민족지학'의 연구대상 정도로 격하시키면서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역사만을 '역사'로 만들어온 체제 전체를 비판한다. 그의 목소리는 역사를 빼앗긴 전세계 모든 토착민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히틀러의 나치즘이 미국의 토착민 절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음을 밝히면서 미국 토착민 잔혹사를 홀로코스트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묘사한다. 그렇게 비교해보는 목적은 분명하다. 토착민을 몰살시킨 미국이라는 정치체제는 대량학살 반인도범죄자다. 그런데 나치 지도부는 처벌받은 반면 미국은 건재하다. 아니, 세상에서 제일 막강한 권력으로 이제는 토착민이 아닌 더 많은 이들에게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


여전히 미국인들, 상식 있고 진보적인 백인들조차도 원주민 절멸사를 '대량학살'이라 부르길 꺼린다. 미국 정부는 '우리는 그들을 죽이고 빼앗은 게 아니라 그들에게서 땅을 구입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처칠의 대답은 이렇다. "문자 그대로 아우슈비츠의 검은 연기를 보았어야만 홀로코스트인가. 너희들은 미국 전역에서 우리의 땅을 에이커 당 1달러 수준의 헐값에 '사갔다'. 그것도 우리를 죽이거나 죽이겠다고 윽박지르거나 한 곳으로 몰아내면서." 


책에는 미국 정부가 20세기까지도 계속해서 추진해왔던 '토착민 디아스포라' 즉 토착민들을 자기네 고향 땅에서 뿌리 뽑아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정책과 그로 인해 파괴된 토착민 사회의 비극도 담겨 있다. 책의 한 장은 뉘른베르크 재판(독일 나치 지도부에 대한 전범 재판)의 판례에 비춰 미국의 행위를 조명해보는 데 할애돼 있다. 

하지만 처칠의 비판은 종횡무진 전방위를 향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나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유대인들, 적어도 시온주의를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에게 나치에게 겪은 유례없는 '역사적 고통’은 자기들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성서적 예언을 완성하는 사건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본질적으로 이 같은 해석은 유대인 대학살 피해지들이 이제는 자기들을 희생시켰던 바로 그 체제에 동등하게 참여하도록 허용되어야 하며 또한 그 체제의 약탈물을 공평하게 차지해야 한다는 요구로 나타난다.


이 목적을 위해 어빙 루이스 호로비츠와 엘리 위젤 같은 시온주의 학자들은 집단학살(genocide)이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나치의 만행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같은 어의론은 이해를 돕는 도구라기보다 자기 민족의 경험을 다른 민족들의 경험과 차별화하는 방편적 수단으로서 기능해 왔다. 다른 방식으로 사태에 접근하면 자기들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땅에 이스라엘 정착민 국가를 세울 ‘도덕적 권리’를 깍아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15쪽)


정확한 지적이다. 시온주의자들 일부의 주장이기도 하고, 지금의 이스라엘이 어거지로 우겨대는 입장이기도 하다. 워드 처칠은 저런 유대인들처럼 '우리는 한번 당했으니 이제 우리도 너희같이 한번 (팔레스타인 것을) 빼앗아서 누려보자'는 주장을 배격하고 체제를 넘어선 무언가를 꿈꾼다. 


여기서 그가 비판하는 체제는 '콜럼버스의 유령'으로 상징되는, 그가 '유럽 중심의 체제'라고 부른 현 세계체제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이후의 체제'는 가부장제나 사유재산제나 자연에 대한 약탈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아닌 그 무엇이다. 미국 토착민들이 가졌던 생태적 가치관과 '어머니들의 지혜'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그는 말한다.


"지난 5세기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소멸시켜 온 바로 그 약탈체제가 지금은 갈수록 그 땅 자체를 잠식하고 있다. 토착민들뿐 아니라 그틀의 땅도 죽어가고 있다. 땅이 죽으면 어떤 인간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당면한 투쟁은 우리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우리의 집단적 거주지를 보존하여 생존가능한 환경으로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마침내 우리는 토착민과 비토착민 간 이해관계의 실체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합류점에 도달하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유럽 중심적 상태가 지닌 약탈적 성격에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존속 가능한 사회문회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45쪽) 


그는 미국의 수많은 운동가들, 젠더운동과 환경운동과 민주주의 운동 등등 모든 활동들보다 우선해서 토착민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란 대체로 성차별, 인종차별, 동성애 공포증, 계급 불평등, 군국주의, 환경문제 등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과연 토지문제보다 더 중요할까? (미국의 운동가들이 주장해온) 모든 것이 이루어지더라도, 이 시나리오에서 귀착되는 미국 사회는 변함없이 식민주의/제국주의 사회로 남을 것이다. 모든 변화가 남(토착민)의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토지에 대한 남의 권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71쪽)


환경이 중요하다고? 우리 토착민들의 생태적 지혜에서 배워라. 여성들의 목소리가 언제나 컸고 할머니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지혜가 공동체의 삶에 배어있던 우리 토착민들의 삶의 양식을 배워라. 가장 가혹하게 빼앗긴 미국의 토착민들에게 눈 감아온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토착민들에게로 눈을 돌려라. 


처칠은 이른바 '제3세계'조차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적에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 배제된 채 '내부의 외부인'으로 살아온 자신과 같은 토착민들을 '제4세계'라 칭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토착민주의자'라 선언한다.


"제4세계란 한 나라 원주민들의 후손으로서 오늘날 자신의 영토와 부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박탈당한 토착민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제4세계 인민들은 [현재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국민국가에서 제한적인 영향력만 갖거나 또는 전연 갖지 못하고 있다." (364쪽)


처칠은 신랄하고, 근본주의적이다. 래디칼하다. 그는 토착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에서 훨씬 더 나아가 미국이라는 연방국가 자체를 종국엔 해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1989년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이 해체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 줄 알았다.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간다고 그는 말한다. 어느 급진적인 토착민의 주장이라 듣고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절박하다. 구구절절이 옳다. 책이 던져주는 주제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져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 없는 생각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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