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1921-1941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형성된 유고슬라비아
아 정말 미치겠어요. 언제 또 석달이 지나간 걸까요. 이 연재는 점점 '계간물'이 되어가고 있군요. 기다리고 계셨을 독자는 아마도 없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간만에 또 올려봅니다.
'요즘 발칸이 이주민 문제로 아주 시끄럽습니다.' 라며 이야기를 시작할까 했지만, 사실 발칸 혹은 동유럽이라는 지역은 대체 시끄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습니다. 어느새 1차 대전도 끝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른바 '전간기'에 일어났던 일들 중에서 한때 '유고슬라비아'라 불렸던 지역에 대해 돌아볼까 합니다.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건국에 합의
유고슬라비아 건국의 주인공들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크로아티아의 정치지도자였던 안테 트룸비치 Ante Trumbić 라는 사람입니다. (달마시안 개로 더 유명한) 달마치아의 세르보-크로아티아 정치조직을 이끌고 있던 트룸비치는 1917년 7월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 Nikola Pašić를 그리스의 코르푸 섬에서 만나 1차 대전이 끝나는대로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건국하기로 약속합니다. 이들의 약속은 '코르푸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지요.
1차 대전 뒤 유고슬라비아 통합국가의 틀을 세운 크로아티아 지도자 안테 트룸비치와 '코르푸 선언문'. 사진 WIKIPEDIA
물론 당시 합의된 새로운 나라는 훗날의 유고연방과는 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이었지만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나라가 될 것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측이 새로 세울 나라의 기본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도 세르비아의 속내는 '대 세르비아'였습니다만, 고집을 내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지못해 받아들인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세르비아는 숙적인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 군에 점령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 세르비아’를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한 러시아의 지지를 얻기도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차르 체제가 전복돼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뒤늦게 1차 대전에 뛰어든 미국은 크로아티아가 참여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국가안을 지지했습니다.
파시치는 이런 이유들로 해서 트룸비치와 약속을 체결했지만 세르비아 극우파들은 대 세르비아를 향한 야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낼 때까지 내내 유고 건국안에 반대했습니다. 유고연방의 또 다른 축이 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쪽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커졌습니다.
세르비아의 야심, 얼마 못 간 통합
1918년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자 남슬라브 지역에서는 다양한 ‘유고슬라브’ 민족들의 독립 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대표도 그 해 12월 베오그라드에 모여 통합 왕국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1919년 2월 미국은 열강들 중 가장 먼저 신생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베르사유의 승전국들도 앞다퉈 미국을 따랐습니다. 신생국의 이름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었습니다.
1920년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알렉산드르1세의 모습. WIKIPEDIA
두 명의 알렉산드르... 세르비아의 알렉산드르1세(가운데 왼쪽)가 그리스의 알렉산드르 국왕과 1918년 마케도니아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WIKIPEDIA
하지만 세르비아가 건국 파트너인 다른 민족들과의 약속을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곧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1920년 슬로베니아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포괄하는 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신생 독립왕국으로 가지 않고 오스트리아 영토 안에 남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독일화’되어 독일에 대한 소속감이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남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슬로베니아계 일부와 크로아티아계 또한, 세르비아가 제휴 때 맺은 약속을 지킬 마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어느 틈에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나라로 연방왕국을 조직하고 있었던 겁니다.
좀더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지방분권적, 폭넓은 자치를 허용하는 정치구조를 꿈꿨던 크로아티아계와 슬로베니아계는 세르비아계의 움직임에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더욱이 크로아티아계와 슬로베니아계는 세르비아계를 문화적으로 열등하게 봤습니다. 세르비아가 자랑하는 '왕실'에 대해서도, 역사가 길지도 않으면서 암살·분란으로 점철됐던, 별로 영광스럽지 못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1세기 전만 해도 '돼지 상인'에 불과했던 세르비아 왕실, 즉 카라조르제의 가문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이 형성되는 게 불쾌했던 것이죠.
연방 안에서 세르비아와 지역적으로 한 다리 건너 떨어져 있던 슬로베니아계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세르비아와 바로 이웃한 크로아티아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라도 세르비아계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적극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20년대 베오그라드의 모습을 담은 우편엽서. www.etsy.com
세르비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알렉산드르1세 Aleksandr I Karadjordjević (1921-34년 재위)가 극단적인 정책을 앞세워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하자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은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1924년 크로아티아계는 총선을 보이콧하면서 세르비아계에 권력분점을 요구했으나 좌절당했습니다. 그러자 스체판 라디치 Stijepan Radić가 이끄는 크로아티아계는 전략을 바꿔 베오그라드 정치에 직접 뛰어들어 의회와 내각에 자리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라디치는 1928년 의회에서 세르비아 급진주의자의 총에 맞아 암살됐습니다.
★스체판 라디치(1871-1928년)
크로아티아 정치인으로서 1905년 크로아티아농민당(CPP·Hrvatska seljacka stranka)을 창당했습니다. 정치·경제적으로 낙후됐던 크로아티아 농촌지역을 계몽해 정치의식을 북돋운 농민지도자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전신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시절 세르비아의 헤게모니에 맞선 싸움을 벌였습니다.
1928년 두브로브니크에서 연설하는 스체판 라디치. 사진 WIKIPEDIA (hr.wikipedia.org/wiki/Stjepan_Radić)
수차례 체포와 옥고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세르비아 측과의 타협으로 연방왕국 의회에 진출했으나 회기 도중 세르비아 극단주의자 푸니샤 라치치 Puniša Račić 에게 암살됐습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계의 만행과 야욕에 대한 분노의 상징으로 지금도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크로아티아계는 결국 세르비아와의 정치적 협력을 철회하고,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에 독립 정부를 세웠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듬해 알렉산드르는 전제군주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을 해산했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여담입니다만, 1930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첫 월드컵 대회가 열렸지요. 정국은 불안정했지만 유고 축구대표팀은 당시 4위를 차지했다능... )
알렉산드르는 1934년 국가의 이름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바꾸고, 민족적-역사적 자취를 없애기 위해 철저하게 지리를 바탕으로 한 체제로 행정시스템을 개편했습니다. 1931년에는 새로운 헌법을 반포해 세르비아계가 정부 운영을 독식하도록 했으며 크로아티아계나 슬로베니아계의 정치지도자들을 계속 구금했습니다.
억눌린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선 파시즘 발흥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지자 크로아티아혁명운동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 이라 불리는 극우파 테러조직이 생겨났습니다. 흔히 우스타셰 Ustaše 로 불렸던 이들 크로아티아 극우파는 헝가리·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나 불가리아·마케도니아 테러리스트들과 연계돼 있었습니다. (뒷날 유고연방이 해체됐을 때 동유럽의 극우파 테러조직이 다시 부상하지요.)
1918년, 자그레브로 들어오는 세르비아 기병대. WIKIPEDIA
1934년 헝가리에 본부를 두고있던 우스타셰는 프랑스 마르세유를 방문하고 있던 알렉산드르를 암살했습니다. 온건파 크로아티아인들은 왕이 죽자 그 아들이자 계승자인 페트르2세 Petr II (1934-41년 재위)의 섭정인 파벨 대공 Prince Pavel 에게 화해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페트르는 크로아티아인들이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고, 크로아티아 온건 민족주의자들은 결국 강경 극우파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여기에 정교-가톨릭 갈등까지 겹쳐졌습니다. 1937년 파벨 대공은 세르비아 정교세력과 급진주의자들의 반대를 빌미로 로마가톨릭 신자들에게 폭넓은 혜택을 주기 위해 바티칸과 체결했던 콩코르다트(concordat·로마 교황과 국왕[정부] 사이의 협약)를 깨버렸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인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계 사이에서 반 세르비아 경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1941년 독일을 방문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와 악수하는 아돌프 히틀러. WIKIPEDIA
크로아티아의 반발이 심해지고 세르비아 내에서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주장이 커지자 왕실은 1938년과 1939년 사이에 정치적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화해조치들을 검토했습니다. 전제군주정을 끝내고 봉건적 분권화에 기반을 둔 유고슬라비아 연방국가로의 이행을 모색한 것입니다.
크로아티아계는 문화적, 경제적 권리를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크로아티아 정치 지도자들은 다시 정부로 돌아와 내각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3월 파벨 대공과 그의 친 게르만 정책에 반대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섭정 뒤에 가려져 있던 젊은 페트르가 실권을 쥐게 됨으로써 이런 민족 간 화해 조치들은 끝나버렸습니다.
그 열흘 뒤 히틀러가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동맹을 맺고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2주도 못 버티고 무너졌습니다.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소련 침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이 곳에 자신과 친밀한 우스타셰 정부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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