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동유럽 상상 여행

47. 2차 대전과 동유럽

딸기21 2016. 2. 2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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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1938-1944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동유럽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시리즈, 어느새 해가 바뀌었습니다. 이러다가 5년에 걸친 연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시간은 흐르는 법. 어느새 2차 세계대전 시기로 넘어왔군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 분할해 동유럽 공격의 장애물을 제거한 히틀러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들어갔습니다. 나치 독일은 여러 동유럽 국가들 간의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조건들을 활용해 동유럽을 공략합니다. 당시 헝가리와 불가리아는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불이익을 본 패전국들이었고, 국가사회주의 파시즘이 잘 먹혀들고 있었습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1927년 이래로 히틀러와 강력한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헝가리 내부에서도 화살십자가당이라는 파시스트 운동이 성장했습니다. 




불가리아 왕 보리스3세. 사진 위키피디아


불가리아 왕 보리스3세 Boris III (1918-42년 재위)는 독일계 혈통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독일이 주도하는 ‘반 베르사유’ 정서에 공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베르사유의 수혜자인 루마니아에서도 반유대주의와 ‘철의 수호대’ 같은 초기 파시스트 운동 같은 내부적인 문제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베르사유의 또 다른 승자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국왕의 섭정인 친독일계 파벨 대공이 세르비아계에 대한 크로아티아계의 반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부질없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업에 의존하던 이 나라들은 대공황으로 경제에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히틀러는 이들에게 물물교환에 바탕을 둔 매력적인 교역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독일의 산업생산품과 이들 나라들의 농산품·원자재를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 나라들의 경제가 독일에 종속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향후 치를 대규모 전쟁의 인력·물자 공급기지가 될 헝가리에겐 특히 큰 당근을 제공했습니다. 바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잘라 한 덩어리 내주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1939년 7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Joachim von Ribbentrop 와 소련 외무장관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 Vyacheslav M. Molotov 는 ‘리벤트로프-몰로토프 협정’으로 알려진 상호불가침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협정에는 동유럽을 둘로 갈라 나눠 갖는다는 비밀 조항도 들어있었습니다. 소련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해 독립 국가들을 차지하기로 했으며 루마니아 영토였던 베사라비아(몰도바)도 갖기로 했습니다. 또 폴란드가 1921년 리가(현 라트비아 수도) 협정 때 얻어냈던, 베르사유에서 정해진 ‘커즌 라인’ 동쪽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도 러시아가 병합하기로 했습니다. 


독일은 폴란드의 대부분을 비롯한 중·동부 유럽에 대한 백지위임장을 받았습니다. 이 협정으로 히틀러는 폴란드 점령·침공을 위한 장애물을 모두 치운 셈이었습니다.


★리벤트로프-몰로토프 협정


1939년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를 방문, 독-소 불가침 협정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는 소련이 나치 독일에 ‘폴란드 공격 승인’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가 됐습니다. 2차 대전이 벌어지자 폴란드는 가장 먼저 독일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2009년 9월 1일, 폴란드 그단스크에 유럽 각국 정상·대표들이 모여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대전 70주년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Lech Kaczyński 대통령은 “독-소 불가침 조약이 결국 2차 대전을 촉발시켰다”며 “소련은 폴란드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누구든 히틀러의 나치 세력과 거래한 것은 잘못”이라면서도 폴란드에 ‘사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본토와 독일령 프로이센 사이에는 ‘폴란드 회랑’이라 불리는 가느다란 땅이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승전국들은 이 땅을 폴란드에 넘겨 발트 해 접근권을 보장해줬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과 프로이센은 지리적으로 갈라지게 됐습니다. 


1939년 무렵, '폴란드 회랑'을 둘러싼 상황. 지도 edu-geography.com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 회랑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서쪽과 북쪽에서 압도적인 독일 군사력에 당하고, 밀약으로 보장받은 땅을 차지하려는 소련의 침공까지 연달아 받은 폴란드는 속수무책이었지요.


나치는 독일 내부의 전쟁 지지여론을 끌어올리기 위해 슬라브계인 폴란드 민족은 하등 민족이라는 식의 선전전을 벌였습니다. 독일 점령 4년 간 폴란드에서 인종말살이 벌어졌지만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최소 300만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2차 대전 기간 처형됐고, 간신히 죽음을 면한 이들도 혹독한 처우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나치는 유럽의 미래에서 ‘인간 해충’이라 자신들이 규정한 유대인, 동유럽 슬라브인, 집시, 정치적 반대자들 등등을 절멸시키고자 했습니다. 독일은 이를 위한 인종말살 작업장으로 폴란드를 택한 겁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에 서명하는 스탈린. AP 자료사진



전쟁 첫 해인 1940년 독일은 북부와 서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헝가리는 공식적으로 추축국 Axis Alliance 에 들어왔고, 2차 비엔나 협정을 통해 루마니아로부터 빼앗은 트란실바니아의 너른 땅이 헝가리 손에 건네졌습니다. 루마니아는 또 남부 도브루자도 크라이오바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에 넘겨야 했습니다. 루마니아는 남아있는 땅들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히틀러의 보장을 받고서야 누그러져 추축국에 가담했습니다.


히틀러가 루마니아를 끌어들인 것은, 러시아가 발칸반도 특히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마니아는 전쟁에 꼭 필요한 석유의 공급처였고, 독일은 석유가 부족했습니다. 소련이 루마니아를 손에 넣었더라면 히틀러에게는 몹시 버거운 상황이 됐을 것입니다. 남쪽의 불가리아는 상대적으로 독일에 우호적이었으며, 지중해로 나아가려는 소련의 움직임에 대한 반감도 있었습니다. 스탈린 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 은 발칸에서 손을 떼라는 독일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는 히틀러가 1941년 소련을 침공하게 만든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1940년 3월 6일, 폐허가 된 바르샤바 시내. AP 자료사진


그러나 전쟁은 히틀러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1940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1883-1945년)가 그리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면서 독일의 전쟁계획은 당초 계획에서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아드리아해 해안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스를 공격했지만 이듬해 그리스의 반격을 받았고, 이탈리아군은 억지로 보호령을 삼은 알바니아에 고립된 처지가 됐습니다.


히틀러는 동맹인 무솔리니 군을 돕기 위해 알바니아로 병력을 보냈습니다. 독일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추축국 가입을 결정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벨 대공은 세르비아계의 내부적 반발에 밀려났습니다. 섭정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국왕 페트르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쿠데타와 페트르의 집권을 용인하는 대신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동시에 침공, 한달도 못 되어 두 나라를 모두 무너뜨렸습니다.


그리스는 독일 군에 점령됐고, 유고슬라비아는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조직의 영향을 받는 우스타셰 정부가 다스리는 지역과 독일령 세르비아로 분리됐습니다. 그 덕에 헝가리는 보이보디나 지역의 일부를 할양받았고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대부분 지역과 세르비아 땅 한 조각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는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의 일부와 몬테네그로를 손에 넣었습니다. 



1941년의 유럽. 지도 astro.temple.edu



곧 이들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에 대한 축적된 반감이 폭발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크로아티아계 출신인 티토 Josip Broz Tito (1892-1980년)가 이끄는 공산당이 힘을 얻었고 세르비아에서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Dragoljub (Draža) Mihajlović (1893-1946년)가 주도하는 체트니크 Četnik 반군이 결성돼 1944년 독일 점령통치를 끝내고 발칸의 해방을 이룰 때까지 투쟁을 벌였습니다.


세르비아의 야심, 얼마 못 간 통합


히틀러는 발칸 공격을 끝내고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파시스트 조직 ‘철의 수호대’에 장악된 루마니아는 히틀러에게 병사들과 석유를 내주고 그 대가로 베사라비아를 얻었습니다. 또 흑해 항구 오데사로 이어지는 트란스드니스트리아라는 회랑지대도 손에 넣었습니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유고슬라비아 군 장교 출신으로, 1941년 4월 독일군에 점령된 뒤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왕당파 반군조직인 체트니크를 조직했습니다. 체트니크와 티토의 공산당 유격대는 함께 독일 점령군에 저항했지만 정치적 입장차가 커져 결국엔 무력충돌까지 빚었습니다. 



미하일로비치는 한때 반독일 투쟁의 영웅으로 부상했으나 세르비아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해 나중에는 항쟁에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섰습니다. 연합군은 전쟁 막바지 이탈리아 점령지역에서 체트니크가 추축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고 미하일로비치 대신에 티토를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전후 티토가 집권하자 반역죄로 기소돼 결국 처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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