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그리고 '피클'

딸기21 2006. 7. 1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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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로드무비님 서재에서 EIDF 방송스케줄...을 보면서 이게 대체 뭔가 궁금했었는데. 
집에 가서 테레비를 켰더니 바로 그걸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알고보니 EBS 국제다큐페스티벌이었다~~ 

피클스'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중간부터 보았는데, 처음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은 끝까지 보고나서도, '감독과의 대화'가 부록으로 나올 때까지 이게 어디서 만들어졌고 어디를 배경으로 한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왜냐? 나는 한국식 다큐에만 익숙해서 그런지, 화면만 보고서는 잘 모르고 나른한 목소리로 나레이션 깔려줘야 이해를 하기 때문인 듯. 
그런데 '피클스'는 나레이션이 한개도 없어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무슬림인 것이 분명한 아줌마들이 피클을 만들고 있었는데, 제목이 자막으로 깔리는 것을 보니 피클에 대한 다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몇분 지켜보다보니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과부들로 보이는 나이든 아줌마들이 피클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보아하니 공동으로 경영하고 공동으로 일하는 공장이고, 동네 분위기로 봐서 완전히 가난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았던 아라빅 동네 분위기와 비슷한 것이, 거기로 당장 놀러(일하는 아주머니들께는 죄송;;)가고 싶어졌다. 바닷가가 보이는데 대체 저기는 어딜까.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하는 걸로 봐서 아랍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아랍이건 아시안이건 아메리칸이건, 나이든 아줌마 몇몇이 모여 사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일리는 없다. 이 아줌마들은 열심히 오이를 다듬고 콜리플라워를 잘라 피클을 만들어 병에 넣은 뒤 상표를 붙이고 주문을 받고 배달을 한다. 운전할 줄 아는 아줌마가 한 명 뿐이라서 그 아줌마가 격무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마케팅 담당'이라는 아줌마를 하나 영입하긴 했는데 자기 월급은 많이 챙겨가면서 아줌마들에게는 수입을 투명하게 밝히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주문을 크게 늘린 것은 내 공'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 창업을 주도했던 아줌마(실상은 할머니)는 자기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농땡이 부리는 다른 아줌마들이 얄미워 때려치워버린다. 다른 아줌마들은 어서 돌아오라고 하지만 "날 헌신짝 보듯 할 땐 언제고!" 하면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이 아줌마의 아들이 뭔지 모를 사고로 죽게 되면서, 함께 일했던 아줌마들이 위로를 하러 찾아가 얼싸안고 울며 마음을 연다. 
물론 아줌마는 돌아오지는 않는다. 왜냐? 아들이 죽었으니 손주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이 아줌마가 완존 한 끗발 하게 생겼다. 젊었을 때 바닷가에 가서 앉아 노는데 남자들이 손가락질한다고 옆에 있던 친구가 다른 데로 가자고 했단다. "우리가 뭔 잘못이 있다고? 쳐다볼테면 쳐다보라지." 
다 늙어 할머니가 되어서도 사업을 할 정도였으니 여장부다. 여장부할머니는 과부가 된 스물여섯살 얌전하게 생긴 며느리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한다.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라, 네 부모가 뭐라고 하면 듣지 말아라, 나도 예전에 내 부모의 말은 듣지 않았다." 할머니, 멋쟁이...! 
근데 아무튼 장사는 잘 안 됐고, 2년 가까이 ‘무보수 노동’을 하면서 빚더미에 휘둘리는 처지가 됐다. 투자 파트너를 찾아야하는데 워낙 영세하다보니 그것도 잘 안 된다. 공장은 안타깝게도 문을 닫는다. 

감독의 전화인터뷰가 나오는 걸 보니까 배경은 갈릴리였다. 아마도 이스라엘 내 아랍계 마을인 듯. EBS 홈페이지에는 팔레스타인 아줌마들로 나와 있는데 여러 가지로 보아서 이스라엘 영토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정확히 말하면 아랍계 이스라엘인들)로 봐야 할 것 같다. 갈릴리는 오래전에 이스라엘이 차지했고 그 너머 골란고원까지 점령하고 있다. 
이 다큐를 만든 이스라엘 여성 감독 달릿 키모르는 신문에서 ‘아줌마 여덟 명이 피클공장을 차렸다’라는 짤막한 기사를 보고 찾아가봤단다.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다큐를 찍었다고 하는데 너무나 다큐스러운지라;; 그 흔한 자장가 분위기 나레이션 하나 없고 (근데 하나 궁금한 건 왜 울나라에서는 시사다큐에서는 남자가 나레이터하고 인물다큐에서는 여자가 나레이터하고 동물다큐에서는 남자가 존대말로 나레이터할까) 꾸밈이라곤 전혀 없다. 사람들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은 꾸미지 않아도 재미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다큐였다. 

이스라엘이건 팔레스타인이건 기독교도건 무슬림이건 간에, 사람들 사는 모습은 거개 비슷하다. 그런데 일하고 먹고 자고 하는 98%는 같고 2%가 다르다면 그 차이를 강조해야 나와 남, 너와 우리의 구분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점만을 들여다보고 왜 다른지 분석하고 왜 달라야하는지를 주장한다. 
이 다큐는 ‘같은 98%’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랍인 아줌마들이라서 우리랑 종교나 생김새가 다르고, 이스라엘에 살고 있으니 분쟁도 많고 전쟁이니 테러니 해서 남편도 죽고, 여자들이 사업한다고 주변에서들 꼽게 보고 한다. 우리랑 다르다면 다르지만, 같다면 같다. 이스라엘 여자가 아랍 아줌마를 들여다봐도, 한국의 아줌마가 아랍 아줌마를 들여다봐도, 아줌마들 사업하기 힘든 것은 똑같다. 집안 식구들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것도 똑같고, 힘들고 아픈 것 삭이면서 세상 살아가고 늙어가는 것도 똑같다. 그것이 내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고 돌아보게 만드니 진정 다큐의 힘이런가, 삶의 힘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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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스 소개 http://www.eidf.org/2006/fall/sub/program_view.htm?prog_no=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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