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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로런스와 짐머먼 사건, '제도적 인종주의'

딸기21 2013. 7. 2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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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로런스는 18세의 흑인 학생이었는데, 1993년 4월 22일 저녁 영국 런던 남부 엘덤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백인 젊은이 5명에게 흉기로 찔려 숨졌다. 경찰은 범인들을 모두 붙잡았지만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 나중에 기소가 됐지만 2명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로런스의 죽음은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둘러싼 논란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오랜 기간 식민지를 운용하고 그 결과 수많은 유색인종을 국민으로 받아들이게 된 영국에서, 인종차별은 해묵은 주제였다. 영국은 전세계에 흑인 ‘노예’들을 퍼뜨린 주범이지만 동시에 인종차별이나 노예 매매를 옛 열강 중 가장 먼저 종식시킨 나라라는 자부심 또한 갖고 있었다.

 

로런스 사건은 식민통치가 끝난 지 반세기도 더 지나 벌어진 일이었기에 영국 사회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영국의 경찰과 사법당국이라는 ‘국가기구’에 의한 인종차별이라는 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93년 백인 청년들에게 살해된 영국 소년 스티븐 로런스. 사진 영국 미러(mirror.co.uk)



파장이 커지자 영국 정부가 조사에 나섰다. 1999년 윌리엄 맥퍼슨이 이끄는 ‘맥퍼슨 위원회’가 만들어져, 사건 자체와 이후의 수사과정을 조사했다. 위원회는 로런스 살인사건이 철저하게 인종적인 동기에 의해 이뤄진 범행이었으며, 소년은 단순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됐음을 밝혀냈다. 또 경찰 수사와 기소 결정 과정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맥퍼슨은 보고서에서 런던 경찰청을 ‘제도적인 인종주의자’(institutionally racist)라 규정하면서 “이 사건은 현대 영국의 형사 정의의 역사에 남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 이후 국가기관이나 제도에 의한 구조적 차별을 가리키는 ‘제도적 인종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퍼졌다.

 

사건이 벌어진 지 20년이 지났지만 이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범인 2명이 기소됐으나 이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해 1월에 이르러서였다. 얼마 전에는 경찰이 로런스 사건 당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주변을 뒷조사했던 사실이 폭로됐다. 피터 프랜시스라는 비밀경찰이 로런스의 친척과 친구들을 감시하고 이들에게서 오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프랜시스는 당시 로런스의 주변 사람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스티븐 로런스 캠페인’에 잠입해 이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정보를 수집해오라는 지시를 받고 활동했다고 털어놨다. 이 ‘캠페인’은 로런스 사건에 대한 축소수사에 항의하고 공정한 조사를 촉구하는 그룹이었다.


로런스를 살해한 백인청년들을 ‘살인자’로 규정하며 사법당국을 비판한 데일리 메일의 기사. 사진 데일리메일



프랜시스의 고백이 가디언 등을 통해 보도되자, 로런스의 가족들은 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의 어머니 도린 로런스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만나 경찰의 뒷조사에 대해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캐머런 총리는 테레사 메이 내무장관을 통해 경찰 ‘자체조사’를 지시했지만, 미온적인 대응에 대한 반발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캐머런 총리는 지난달 26일 “사건을 다시 조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로런스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것은 미국에서 최근 벌어진 ‘짐머먼 평결’ 파동이다. 지난해 2월 미국 플로리다주 샌포드에서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당시 17세)이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먼(29)의 총에 사살됐다. 조사 결과 당시 마틴은 ‘후드티’를 입고 있었으며 아이스티가 든 음료수캔을 들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사탕과 40달러가 들어있었을 뿐, 범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짐머먼은 흑인 소년을 범죄자로 오인해 뒤쫓다가 격투를 벌이게 됐고,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껴 ‘정당방위’로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숨진 사람은 흑인 소년이었고, 사살한 사람은 히스패닉계 백인이었다. 검찰은 짐머먼의 진술이 여러차례 번복됐고 증인들의 증언도 엇갈린다고 주장했지만, 백인 5명과 히스패닉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지난 13일 짐머먼에게 무죄평결을 내리고 석방했다. 흑인 소년이 억울하게 살해됐지만 백인 살인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로런스 사건이 20년만에 바다 건너에서 재연된 셈이다.


조지 짐머먼이 13일 미국 플로리다주 샌포드 순회법원에서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평결을 받은 뒤 법정을 떠나고 있다. AP



미국에서 ‘제도적 인종주의’를 뒷받침한 것은 2005년 플로리다주에 도입된 ‘정당방위법’이었다. 이 법은 직접적으로 신체에 위해를 당하지 않더라도 ‘심리적 위협’을 느낄 만한 상황이라면 총기 등 살상 무기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강력범죄를 줄인다’는 취지로 이 법안이 도입될 때부터 흑인 등 소수계가 이 법 때문에 피해를 볼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플로리다를 포함해 30개 주에 정당방위법이 도입돼 있는데 당초 우려대로 무고한 흑인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 조사에 따르면 2005~2009년 흑인을 사살한 백인이 정당방위를 인정받은 경우는 34%인 반면 백인을 사살한 흑인이 정당방위로 무죄판결 받은 것은 3.35%에 불과했다.


비판론자들은 이 법이 ‘심리적 위협’만으로 상대를 사살하는 것을 정당화한데다 ‘자택 침입’ 등의 조건조차 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지나치게 넓은 범위에서 자의적으로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 있게 돼있다는 것이다. 에릭 홀더 법무장관조차도 정당방위법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짐머먼이 풀려난 뒤 미국 주요 도시에서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적 충돌로 이어졌다. 유색인종 단체와 인권운동가들은 연방정부가 나서서 민권법에 따라 짐머먼을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한 총기사고가 아닌 ‘인종차별적 범죄’라는 것이다.


짐머먼 무죄 평결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트레이본 마틴의 사진을 담은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AFP



지난해 마틴이 숨진 뒤 그에게 동정을 표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평결 뒤에는 오히려 사건과 거리를 두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바마는 “많은 이들이 분노했겠지만 미국은 법치국가”라며 평결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논란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다음달 28일은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흑인 사회는 이날 대규모 기념행사를 벌일 예정인데, 짐머먼 평결이 불러일으킨 동요가 이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 사회는 민권운동 이후 반세기가 지나 벌어진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까. 영국의 경우처럼, 20년이 지난 뒤의 미국도 짐머먼 평결의 잘잘못을 곱씹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주간경향 10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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