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현재다-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에 대하여
타리크 알리-올리버 스톤 대담. 박영록 옮김. 오월의봄
두 사람의 대담이지만, 주로 스톤이 묻고 타리크 알리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돼 있다. 스톤의 작품을 본 적이 없는데다 그의 아내가 한국계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대담은 재미있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알리의 신랄한 증언 혹은 비평이 콕콕 박힌다. 20세기를 관찰해온 두 사람의 대담은 흥미진진하다.
과거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 제목처럼 '역사는 현재다.' 사건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을 믿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과거의 억압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레오폴드 왕은 다른 식민국 지도지들과는 달리 본인의 이름으로 콩고를 접수했어요. 콩고를 소유했던 건 벨기에가 아니라 레오폴드 왕이었던 거죠. 벨기에 왕가 소유였어요. 사람들은 20세기에 유대인 600만명이 사망했다고 얘기하죠. 하지만 콩고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요. (47쪽)
아프가니스탄의 아마눌라 왕-그의 부인은 소라야 왕비였지요-은 1919년 러시아 혁명에 깊은 인상을 받아 영국에서 독립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는지 레닌과 협상을 벌였어요. 소라야 왕비는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와 터키의 길을 따라야 하고, 여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에서 1919년에 기초된 새 헌법은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하고 있었어요. 이 헌법이 시행됐다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미국이나 유럽 여성보다도 먼저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을 거예요. 영국은 이 헌법이 매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왕과 왕비를 제거하기 위한 부족 반란을 사주했죠. (50쪽)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된 뒤, 인도의 민족주의자들 특히 간디와 네루는 인도 독립에 대한 협상을영국이 아닌 일본과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간디는 처음으로 전략상 혹은 전술상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는 영국에게 당장 인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어요. 그리고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라고 불리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졌어요.
간디는 진심으로 영국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은 델리로 진격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일본군이 생포한 많은 인도군 병사들이 인도 국민군( Indian National Army: 1942년 일본군 포로였던 인도인 중 전향자들을 주축으 로 창설한 특렵 균사 단체 4만 3,000명 정도의 규모였다)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 Subhas Chandra Bose라는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민족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도쿄와 베를린을 방문하여 인도에 남아 있는 영국인들을 군사 공격 해줄 수 있는지 히틀러나 일본인들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죠. 이것이 인도 국민군이었어요. 당시 대중적 인기가 매우 높았죠. (79쪽)
중국혁명 세력이 승리한 이후 인도네시아의 많은 중국인이 혁명에 공감했습니다. 당연히 인도네시아 공산당에도 공감하게 되었겠죠. 이런 현상은 자카르타와 중국인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나타났어요. 심지어 베트남, 특히 사이공에서도 그랬고요. 그런데 미국은 이 사실을 소수 민족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증을 조장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주목적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정치 세력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공산화된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이었거든요.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이기도 하지요. (119쪽)
미국은 인도에서 자와할랄 네루를 제거할 준비는 하지 않았어요. 당시 인도는 많은 존경을 받던 나라였으니까요. 특히 유럽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죠. 또 인도 군대는 독립되어 있었죠. 인도 군대를 조종하는 건 미국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인도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1958년 10월 파키스탄을 기지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쿠데타 세력을 조직해서, 파키스탄 군부가 자신들에게 심하게 의존하도록 만들었죠. (121쪽)
제가 북베트남에 있었을 때, 매일같이 폭탄이 떨어지던 게 기억나요. 한번은 제가 베트남인에게 정말 기분이 엉망이라고 말했어요. 그때 전 20대였어요. “당신들을 도울 만한 일이 없을까요? 대공부대에서 할 일은 없을까요?"
그러자 베트남군 장군이었던 팡반동이 저를 옆으로 데려가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네 이야기에 진심으로 감동했어. 하지만 이 전쟁은 외국 사람들이 찾아와 전투를 벌이고 목숨을 잃곤 하던 스페인 내전이 아니야. 우리와 세계에서 가장 기술이 발달한 나라 사이의 전쟁이야. 외국인들이 와서 우리와 함께 싸우는 걸 허용하면, 그네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야 할 거야. 그러면 이 전쟁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질 테지.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요청을 하지 말아줘.” (131쪽)
그리스 내전은 사실상 그리스 내 모든 가족이 연루된, 잔인하고 지독한 전쟁이었어요. 가족들마저 나뉘고, 분열되었지요.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그 전쟁을 ‘처칠의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처칠은 그리스 우익 세력, 왕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 나라가 전쟁 이후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이에요.
그리스의 독립운동가 모임 -이들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스탈린보다는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더욱 동조하고 있었죠-은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했어요. 전설적인 지도자 아리스 벨루키오티스가 이끄는 모임이었습니다. 처칠은 개입하고야 말았죠. 공산주의자들을 무너뜨릴 때까지 정말로 포악스러운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어요.
이런 사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 있죠. 사람들이 기억하니까요.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건은 반복해서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역사는 곧 현재라고 말해주곤 해요.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은 과거의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138쪽)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0행으로 된 시의 형태로 훌륭한 편지를 적어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냈어요. 시의 제목은 〈해결책〉이에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동지들에게, 내 눈에는 국민이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국민을 해산하고 새로운 국민을 찾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142쪽)
자신을 옥죄고 통제하는 권력에 맞서 무슨 일이든 도모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한 사람은 그 방법을 찾기 마련입니다. (157쪽)
첫 번째 도전은 홍미롭게도 남미, 즉 신자유주의를 실험했던 대륙에서 다가왔어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 대학 교수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칠레로 돌아가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적용한 칠레의 경제학자 그룹)는 신자유주의를 영국에서 먼저 시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피노체트 정권하의 칠레에서, 그 다음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시도했죠. 그로 인해 여러 남미 국가-볼리비아,에콰도르, 베네수엘라-에서 사회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61쪽)
차베스가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닙니다. 베네수엘라 군대는 자국민을 학살했죠. 차베스와 전체 하급 장교 무리가 모여 군이 창설된 이유는 이런 게 아니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베네수엘라 군조직 안에 반대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남미의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어요.볼리비아에선 신자유주의 정부가 코차밤바의 수도사업 운영권을 미국 벡텔의 자회사에 넘겼습니다. 수도사업이 민영화된 뒤 정부에선 가난한 사람들이 지붕에 대야를 놓아 빗물을 모으는 것까지 규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어요. 수도사업의 독점을 방해한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봉기가, 폭동이 벌어졌어요. 군이 개입해서 총을 발사하여 한 아이가 숨지고 여러 사람이 다쳤죠. 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고,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어요.
남미에서 거둔 이러한 승리들은 구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상황이 변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첫 번째 중요한 징후였어요. 이러한 사회운동으로 인해 여러 정치 지도자가 나타났고, 그들은 민주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남미 정치는 게릴라전 단계에서 이제는 민중의 민주주의 참여 단계로 커다란 변화를 이뤄낸 것입니다. (164쪽)
파키스탄은 국가구조를 유지한 채 더 큰 연합의 일부가 될 겁니다.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과 함께하는 남아시아연합은 정말 그럴듯합니다. 이스라엘인들도 어느 단계에서는 계속 이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팔레스타인인들도 제대로 된 독립국가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될 거고요. 그러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단일 국가를 형성하는 쪽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거예요. 그 나라에서 유대인도, 이슬람교인도, 기독교인도, 그 밖의 소수인들도 함께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 외에 다른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173쪽)
사실 파키스탄인들은 태형을 결코 기꺼워한 적 없습니다. 공개 태형은 모두 지아 울 하크 군사독재 기간 동안 시작된 겁니다. 그 전엔 시행된 적이 없습니다. 이젠 여성들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지만요. 법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207쪽)
남미에서 새로 온 이민자들은 남미와 미국을 연결해주고 있지요. 그들은 멕시코의 치아파스 주에서 벌어진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들은 볼리바르 진영에도 대부분의 사안에 긍정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플로리다주의 젊은 세대 쿠바인들은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버린, 혁명에 반대했던 쿠바인들이 좋은 집을 찾아 플로리다를 비롯한 몇몇 지역으로 넘어와 보금자리를 마련하던 때와는 다릅니다.
남미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미국의 히스패닉 국민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언어적으로 미국 남부의 많은 도시에서 영어의 지배력이 도전받고 있는 건 확실한 사실입니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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