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전능합니다!" 설교자가 외쳤다. “인간들은 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맺어집니다. 돈은 모든 것을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정신을 물질로,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며 돌을 빵으로 만들고, 무에서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돈은 스스로 영원히 자기증식을 합니다. 돈은 전능하며, 돈은 신이 우리에게 강림한 모습이며, 돈은 신입니다!
(중략) 이 모든 부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부는 돈 자체가 지닌 미래의 수익에서 옵니다. 돈 자체가 지닌 미래의 이익을 지금 우리가 당겨서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미래의 수익은 커지고, 미래의 수익이 클수록 ‘지금’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많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의 채권자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채무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빚을 스스로 탕감하는 것입니다. 아멘!" (미하엘 엔데, <거울 속의 거울>에서 인용, 63쪽)
미하엘 엔데의 책은 제법 많이 읽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나는 그동안 그의 글을 '어떻게' 읽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로 시작해서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 <모모>, <끝없는 이야기>, <마법학교> 등을 읽었다. 위에 인용해 놓은 <거울 속의 거울>도 분명 엄청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도대체 저 구절은 기억에 없을뿐더러,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ㅠㅠ
날씨는 꽤나 쌀쌀해졌어도 아직 올해가 끝나려면 두 달 가까이 남았다. 하지만 얼마 전 읽은 <엔데의 유언>(카와무라 아츠노리, 그룹 현대. 김경인 옮김. 갈라파고스)이 아무래도 내겐 '올해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일본 NHK 방송 프로그램 제작팀이 독일에 살던 엔데를 찾아가 1988년 인터뷰를 했다. 엔데가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알았다(아니 실은 예전에도 알았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작팀은 당초에는 엔데가 등장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는데, 인터뷰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엔데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장시간에 걸쳐 녹음해놓은 테이프는 있는데 엔데의 쓸만한 영상도 없고, 엔데는 타계했고. 해서, 엔데가 남긴 말들을 곱씹고 엔데에게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들의 흔적들을 따라가보면서 문자 기록으로 남긴 것이 이 책이다.
몇 달 전 유럽연합 금융당국이 '마이너스 이자'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미 돈은 풀릴 만큼 풀렸는데 돈이 돌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돈이 돌게 하기 위해(즉 돈이 '돈이게' 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다 못해 마이너스로 하는 방안도 생각중이라는 얘기였다. 앞으로는 은행에 돈 맡기면서 돈 내야하는 세상이 올 지도 모르겠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돈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이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쉬이 상하는 음식이건 옷이건 기계설비건, 세상 모든 물건은 그대로 두면 상한다. 그런데 유독 돈만은 감가상각이 없다. 돈이 원래는 상품과 상품(혹은 노동)을 바꿀 때 다리 노릇을 해 주는 교환수단이었다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 지금 돈은 그 자체로 상품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상품 중에 유독 돈만은 갖고 있을수록 이자가 붙어 불어난다(가지고만 있어도 지대 수입을 내는 토지도 비슷하지만 이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그래서 다른 상품을 가진 것보다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 경제가 돌지 않고 일자리가 사라지는데 누군가는 돈을 싸짊어진 채로 더욱 돈을 버는 비참한 현실의 문제는 바로 이런 '상품으로서의 돈'이 가진 우월한 지위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가 타계하고 고작 2년 뒤, 세계는 신흥국을 급습한 무시무시한 ‘돈의 폭력’을 목격했다. 1997년 5월부터 두 달 동안 국제투기집단인 헤지펀드와 아시아 나라들 사이에 벌어진 통화공방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어떤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돈이었다. 사실 헤지펀드가 지나치게 높은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세계에 온갖 종류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규제 격차, 실물경제와 환율과의 괴리를 포함한 환율 격차, 가격 차, 세율 격차, 그리고 무엇보다 빈부의 격차. 즉 사람들의 생활의 격차이자 나라와 나라를 벌려놓는 ‘격차',그 틈새를 공략하는 것이다. 이로써 돈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한없이 많아진다. (9쪽)
엔데는 한때는 과거의 문화와 역사를 배움으로써 현대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돈 의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과거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미래를 상정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언적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의 해결 방법을 과거가 아닌 미래에서 추구한다, 그것이 엔데가 말하는 판타지의 힘이다.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의 허무와 『모모』의 시간도둑에 담긴 상상력이 호소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22쪽)
비양심적 행동이 보상을 받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면 경제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지금의 경제시스템 입니다. 이 경제시스템은 그 자체가 비윤리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날의 화폐,즉 맘껏 찍어낼 수 있는 지폐가 여전히 노동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대상이라 착각하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화폐는 노동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화폐는 독자적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빵집에서 빵을 사는 구입대금으로서의 돈과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자본으로서의 돈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돈이라는 인식입니다. (35쪽)
자유화폐는 단순히 화폐나 시장, 이자를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화폐는 원래 교환수단으로서 인간을 보필하는 심부름꾼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에서는 반대로 인간이 섬기는 주인이 되어버렸다.(151쪽)
이것이 엔데의 생각이었고, 그의 소설들 곳곳에 돈에 대한 문제제기를 심어놨다고 한다. 엔데의 유언을 따라가는 저자들은, 엔데가 교류를 했거나 책으로 찾아 읽었던 경제사상가들의 궤적을 좇는다. 뮌헨 교외의 도서관에는 엔데가 모아 기증한 책들이 있다고 한다. 엔데의 장서들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이들은 스위스의 경제학자인 한스 크리스토프 빈스방어, 친환경 건축을 하다가 결국 돈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독일의 건축가 마르그리트 케네디, 독일의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 등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엔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돈의 사상가'는 케인스도 인용했다고 하는 실비오 게젤이다. 책은 게젤의 사상, 늙어 쪼그라드는 돈의 개념,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던 1930년대 오스트리아 작은 도시의 실험 등을 쭉 따라간다.
늙어가는 돈. 나이를 먹으며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지는 돈.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감가상각되기 때문에 이고지고 있다 해서 불어나지 않는 돈. 이자가 붙기는커녕 생산에 쓰이지 않으면 값이 점점 떨어지는 돈. 빨리 써서 유통시켜 두루두루 혜택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돈. 이것이 게젤이 생각한 자유화폐의 개념이다.
게젤의 자유화폐는 한 달에 한 번씩 액면가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는 구조를 통해 유통을 촉진하려는 돈이다. 그에 비해 슈타이너의 노화하는 화폐는 돈에 25년 정도의 기한을 설정하고 가치의 높낮이를 정해 결제, 융자, 증여와 같은 영역에서 화폐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조정되어 경제가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게젤과 슈타이너가 제창한 화폐는 경제학에서 ‘에이징머니(노화화폐)’ 라고 한다. (85쪽)
상상을 하려 해도 쉽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멋진 상상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에 대한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돈에 대해 상상을 해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얼토당토 않은 뜬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런 시도가 세상에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는 슈타이너 사상에 기초한 은행이 존재한다. GLS은행은 독일의 지방도시인 보훔에 본점을 둔 정식은행이다. 증여하고 빌려주기 위한 공동체라는 신비로운 이름을 가진 이 은행의 특징은 예금자가 자신이 투자할 프로젝트를 직접 선택하고 스스로 이율을 정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기농법 프로젝트를 촉진하고 싶으면 은행이 선정한 유기농업 펀드에 투자한다. 그때 최소 무이자, 즉 이율 제로에서 최대 시중은행의 평균이율까지 자유롭게 설정할수 있다. (94쪽)
독일의 슈바넨키르헨은 오스트리아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1932년, 스위스 국경과 가까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근교 도시인 뵈르글에서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 오스트리아에서는 관광산업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뵈르글
도 시의 미래를 관광산업으로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공황은 이 오스트리아의 지방도시에도 심각한 불황을 몰고 왔다.생산은 정체되고 실업자는 넘쳐났다.뵈르글에
는 오랜 기간 게젤 이론을 신봉해온 운터구겐베르거라는 철도공이 있었다. 그는 시장에 선출되자 1932년 8월 1일, 게젤이론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당시뵈르글
의 인구는 4,300명이었는데, 시에서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그중 1,500명을 고용하였다. 도로정비와 다리 건설, 스키 점프대 등 뵈르글을 관광지로 부활시키기 위한 사업이었다. 그 대신 실업수당지급은 중단하였다. 그리고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독자적인 지역통화인 1실링, 5실링, 10실링짜리 노동증명서를 발행한다. 공공사업에 종사한 노동자뿐만 아니라 시장을 비롯해 다른 모든 직원들이 급여의 반을 이것으로 받았다. 노동증명서는 엄청난 기세로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원리는 이렇다. 화폐에 드는 초과보유 비용, 즉 스탬프가격은 일종의 세금인데 이것은 돈을 사용해 버리면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지권을 수령한 사람은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실링보다 먼저 사용하려고 한다. 지권은 맹렬한 속도로 순환하고, 순환하는 만큼 거래를 성립시켰다. 시에는 세금이 납부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빨리 세금납부라는 형식으로 노동증명서가 돌아오기 때문에, 시의 회계담당자는 누군가 위조 증명서를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당연히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뵈르글
의 기적이다. 호평은 오스트리아 내에만 그치지 않았다. 마치 순례지나 되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경제학자들이 찾아왔다. 지금도뵈르글에는 실비오 게젤의 이름이 붙은 거리나 그때 만들어진 다리와 스키점프대 등이 남아 있다.
노동증명서는 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은 지권발행의 독점을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중앙은행의 승리로 끝났다. 1년 정도 만에 개혁은 끝나고 말았다. 완전고용에 가까웠던 뵈르글은 노동증명서가 금지되자 다시 30퍼센트에 가까운 실업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170쪽)
사실 인류에게는 좋은 기회가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내다보고 새로운 국제경제질서를 구축하려는 협의의 장이 브레튼우즈에서 열렸다. 거기에서 케인스는 마이너스 이자 이념에 근거한 국제청산동맹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전 세계 금의 70퍼센트를 긁어모을 정도로 강대해진 미국이 내놓은 화이트안案(1943년 4월 5일에 공포된 미국의 국제안정기금안으로 IMF의 모체가 됨)이 채용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 전에 게젤에 의해 시작된 이념은 완전히 지하세계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한때 성공을 거뒀던 화폐개혁운동은 오랜 냉전기를 거치는 동안 경제사에서 잊힌 한 장면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지하세계에 숨어 있던 운동가들이 지상으로 복귀한다. 그것은 단지 게젤의 사상에 그치지 않았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공상적이며 이단적이라고 매장되었던 로버트 오웬의 사상과 그가 실천한 공정노동교환소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르크스주의의 최대 라이벌이자 자유로운 사회주의를 주장한 사회혁명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사상 등에 기초한 교환은행 대책 등에 대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칼 폴라니 등의 경제사 연구는 그러한 사상의 부활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였다. (175쪽)
책의 뒷부분에서는 게젤의 '늙어가는 돈'을 다시 부활시킨 지역화폐의 다양한 실험들을 소개한다. 미국 이타카의 이타카아워는 말 그대로 시간(hour)를 돈으로 환산한 것이다. 지금은 달러가 세상 최고 권력같지만 실상 미국에서는 1930년대까지 지역마다 다양한 돈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들이 국가권력 안에서 통합되면서 단 하나의 화폐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됐다고 하지만, 돈은 사실 그렇게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옛 동독을 비롯한 유럽에는 '교환링'이라는 게 있어서, 가상의 장부를 통해 서로의 노동력을 교환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고대 이집트에서 썼던 돈도 지금과는 다른 '감가하는 돈의 시스템'이었단다.
엔데의 유언이 던지는 메시지는 돈의 절대권력을 의심해보고, 돈이 주인이 되어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경제시스템을 바꿔나가자는 것이다. 그 시작점은 돈에 대한 우리의 의문, 거기서부터 뻗어나가는 상상력이다.
이자율이 제로인 지점은 모모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진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깨닫게 된 장소였다. 지금 지역통화가 그 제로지점을 만들자는 의도로 각지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 존재만으로도 플러스 이자라는 맞바람을극복할 수 있다. 모모가 멈춰 섰던 것처럼 우리도 멈춰 서서 앞으로 나아갈 참된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이너스 이자라는 진정한 방향을 향해 시간이 나아갈 길이 보이고 그 끝에 호라 박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36쪽)
화폐시스템의 개혁은 화폐가 가진 권력 때문에 궁지에 몰린 인간과 자연을 해방시키고, 문화의 신장과 개인이나 민족의 발전 등 사회질서의 존재방식을 바꿀 것이다.그러면 자연히 화폐만이 인간사회의 장애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의 화폐가 지닌 보장기능이 시장의 문을 닫고 교환을 방해하고 있다면, 현재의 토지제도는 자연의 기회를 막고 생산을 방해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화폐의 권력을 보장하는 것은 이자다. 화폐에서 이자를 제외하면 남는 교환에 대한 권리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의 권력을 보장하는 지대(地代)를 제외한 생산에 대한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다. (151쪽)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앙드레 지드의 콩고 여행 (1) | 2014.11.30 |
---|---|
뒤늦게 읽은 '대국굴기' (0) | 2014.11.04 |
역사는 현재다 (0) | 2014.10.14 |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2) | 2014.10.13 |
<위험한 여행> 역시 토베 얀손! (0) | 2014.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