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카푸시친스키, SHAH OF SHAHS

딸기21 2014. 12. 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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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젖어 나는 생각했다. 공포를 내 안으로 가져감으로써 나는 본의 아니게 공포에 기반을 둔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리라는 것을. 끔찍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관계, 일종의 병리학적인 공생관계가 나와 독재자 사이에 스스로 똬리를 트는 것이다. 공포심을 통해 나는 내가 증오하는 이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었다. (95)

 

리샤르트 카푸시친스키(Ryszard Kapuściński). 폴란드 출신 저널리스트다. 세계의 분쟁과 혁명을 지켜본 그는 <샤 중의 샤(SHAH OF SHAHS)>(VINTAGE INTERNATIONAL)이라는 제목의 책에 이란 혁명을 담았다. 이란 혁명 발생 과정을 저널리스트답게 정보 위주로 소개하거나 추적한 것이 아니다. 샤의 폭압 체제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그 속의 사람들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면서 공포정치의 한 요소로 전락하는지, 폭군들은 무지몽매한 대중들 위에 군림하며 어떤 착각에 빠지는지, 그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체제는 어떤 순간에 깨져나가는지, 혁명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또 어떤 좌절감과 무력감이 찾아오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명을 지탱해주는 힘은 무엇인지, 숱한 혁명을 지켜본 관찰자는 20세기 후반부의 가장 극적인 혁명 전후에 벌어진 풍경을 보며 그 속에서 얻은 통찰을 책 속에 펼쳐보인다. 혁명은 격정적이며 문체는 시니컬하고 통찰은 날카롭다.



혁명을 일으키는 요인을 전반적인 빈곤이나 억압이나 학대 같은 객관적인 조건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비록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각은 한쪽 면만을 본 것이다. 그런 조건들을 갖춘 나라들은 수없이 많으나 혁명은 드물게 일어난다. 혁명에 필요한 것은 빈곤에 대한 자각, 압제에 대한 자각, 빈곤과 압제가 세계의 자연적인 질서는 아니라는 믿음이다. 가장 중요한 촉매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생각과 말이다. 도화선이나 단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 통제되지 않은 말, 자유롭게 떠도는 말이다. 지하에서, 반역을 담아,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공인되지 않은 채 떠도는 말이 폭군을 두려움에 젖게 만든다. (103)

 

35년 전의 혁명은 세계를 '이란 대 나머지 세상'으로 만들었다. 냉전 체제, 미-소 양 진영으로 나뉘어 두 강대국 앞에 서던 나라들에게 이란은 '이슬람혁명'이라는 제3의 길을 통해 종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책은 국제정치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인 공포심과 그 공포심이 사람들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지를 적고 있다.


한 민족 전체가 이주를 해버릴 수는 없으니, 이주는 공간 속에서라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이뤄지게 된다. 주위를 둘러싼 고통과 실존의 위협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과거로 돌아간다. 아주 오래되고 신성한, 그래서 당국도 맞서기를 꺼리는 관습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 것이다. 오래된 것이 새로운 감각과 새롭고 선동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어떤 이들은 이를 중세로의 후퇴라고 부른다. 그럴 지도 모르지만, 많은 경우에 이것이 민중들이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잊었던 조상들의 세계를 다시 불러내려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해서 정치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발심이 점점 커져가는 가운데, 그런 오래된 의식이 갑자기 정치적인 행위로 변형된다. 40일 뒤에 망자를 다시 추모하는 의식이 그렇게 해서 가족과 이웃들이 모이는 저항의 자리로 바뀌었다. 쿰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40일 뒤, 사람들은 이란 곳곳의 모스크에 모여 희생자들을 기억했다. 타브리즈에서는 긴장이 고조돼 봉기가 일어났다. 군중들이 거리로 행진하며 샤에게 죽음을이라 외쳤다. 군대가 들어와 도시를 피로 물들였다. 40일 뒤, 다시 마을들은 애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타브리즈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스파한에서는 좌절하고 분노한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군대가 시위대를 둘러싸고 발포했다. 더 많은 이들이 숨졌다. 또 다시 40일이 지나갔고, 이번에는 이스파한에서 쓰러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수십 곳에 사람들이 모였다. 다시 시위와 학살이 벌어졌다. 40일 뒤 똑같은 일이 메셰드에서 되풀이됐다. 그 다음은 테헤란, 그리고 테헤란에서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났다. 결국 모든 도시, 모든 마을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113~114)

 

카푸시친스키가 써내려간 것들은 지금껏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혁명의 단면들을 담고 있다.


내가 보았던 한 장면을 기억한다.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병원 옆을 지날 때 그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환자들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소년들이 행렬의 맨 마지막을 따라가면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고 있었다. 시위대가 지나간 길은 깨끗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상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총탄이 날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군인들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있다. 아이들은 공책을 찢어 도로 위에 갓 흘려진 피를 종이에 적신 뒤 거리를 달리며 행인들에게 경고의 표시로 보여준다. 주의하세요! 저쪽에서 총을 쏘고 있어요! 이스파한에서 찍힌 영상이다. (125)

 

그러나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혁명의 '모멘트'에 대한 그의 관찰이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온다. 이 나라의, 샤의, 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순간이. 경찰 한 명이 초소에서 나와 군중들 중 맨 끝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이 그 순간이다. 경찰은 목소리를 높여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경찰과 시위대 끝에 선 사람은 익명의 보통 사람들일 뿐이지만 그 둘의 대면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띈다. 경찰은 경험을 통해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곤봉을 치켜들면 저 사람은 두려움에 얼어붙을 것이고, 발걸음을 옮기겠지. 시위대 끝에 선 사람의 경험은 이렇게 말한다.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기 시작할 거야.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세한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다. 경찰이 소리치고, 시위자는 달아나고, 다른 사람들도 도주하고, 광장은 텅 빈다


경찰과 시위대가, 억압적인 체제와 시민이 1대 1로 맞서는 그 순간 '과거의 질서'는 깨져나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돌아간다. 경찰이 소리를 지르지만 시위대 끝의 사람은 달아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서서 경찰을 지켜본다. 경계심을 담아, 여전히 두려움의 흔적이 묻은 채로, 그러나 강력하고 도발적인 시선이다. 시위대 끝 사람은 제복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이들의 얼굴에서 같은 시선을 읽는다. 모두의 얼굴은 경계심과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가차 없는 굳건함을 담고 있다. 경찰이 소리치지만 아무도 달아나지 않는다. 결국 경찰은 고함을 멈춘다. 잠시 침묵의 순간이 온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 경찰과 시위대 끝 사람이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시위대 끝 사람은 두려워하기를 멈췄고, 정확하게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전까지 시위대와 경찰이 마주 설 때면 늘 제3자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제 3의 존재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경찰의 편이고, 시위대의 적이었다. 두려움이 규칙을 만들고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제 두 사람은 자신들만 있다는 것을 둘이서만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두려움은 증발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109~110)

 

혁명. 그 뒤에는 반혁명이 온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꿈꿨던 이란의 인텔리겐차들은 거대한 문명의, 기나긴 역사의, 장구한 전통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샤에 맞서던 때에는 모두가 하나였으나 혁명 뒤의 혼란 속에서 가장 먼저 찢겨나가고 힘을 잃은 것은 그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 뒤에는 보수적인 신정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란 여성 인권변호사이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시린 에바디는 저서 <깨어나는 이란(IRAN AWAKENING)>(국내에서는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택했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다)에서 혁명이 어떻게 배신했는지를 적었다. 그의 책 속에 나온 일화가 기억난다. 여성 법관으로서 파흘라비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에 참여했던 그에게, 한 성직자가 묻는다. 이 혁명은 당신 같은 사람들을 내몰 것이 분명한데 왜 뛰어들었냐고. 에바디의 대답은? 정확히 적혀 있지는 않았으나, 혁명 이후의 결과에 상관없이 일어났어야만 하는 혁명이었기에 뛰어들었다는 쪽이었다.


혁명은 일어났고, 샤는 쫓겨났다. 어떤 이들은 권력을 잡았고 어떤 이들은 성공한 혁명에 배신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어찌 아무런 의미가 없겠는가. 하지만 역사에서 오직 한 가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책은 이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 가슴 속에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들 자신이자 영혼이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스스로를 북돋고 싶을 때면 나는 페르도우시 씨가 페르시아 카펫을 팔고 있는 페르도우시 거리로 간다. 그는 이 나라가 모든 것을 이겨내고 지속될 것이라고, 아름다움은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기억해둬야 할 것이, 그는 내게 말을 하면서 늘 카펫을 펼쳐놓는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카펫을 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 보여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렇게 한다. 페르시아인들이 2500년 동안 스스로를 지켜올 수 있게 해준 것, 숱한 전쟁과 침략과 점령 속에서도 우리 자신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준 것은 물질적인 힘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라고, 기술이 아닌 시(), 공장이 아닌 종교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준 게 무엇인가? 시와, 세밀화와, 카펫이었다. 알다시피 이 것들은 모두 생산의 견지에서 보면 무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우리를 표현한다. 우리는 세상에 이 마법 같고 독특한 무용함을 선사했다. 


적막하고 황폐한 사막에서도 카펫을 펼쳐놓고 그 위에 누우면 당신은 푸른 초원에 누워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래, 우리의 카펫은 우리에게 꽃 핀 초원을 상기시킨다. 카펫 위에서 우리는 꽃을 보고, 정원을 보고, 저수지와 샘물을 본다. 공작들이 수풀 사이를 거닌다. 카펫은 오래 남는다. 좋은 카펫은 몇 세기가 지나도 색채를 유지한다. 이렇게 해서, 단조로운 황무지 사막에 살면서도 당신은 빛깔도 신선함도 시들지 않는 영원한 정원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정원의 향기를 상상할 수 있고,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소리와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온전하고 영원한, 바로 옆의 파라다이스를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시인이다. (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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