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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영 노동당 ‘제3의 길’ 버리나... 당대표 선거 좌파 코빈 유력  

딸기21 2015. 8. 1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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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토니 블레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정치인과 ‘스코틀랜드의 천재 좌파’ 고든 브라운이 짝을 이뤄 ‘신노동당’을 주창하고 나섰다. 몰락한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힘을 잃어가는 유럽 사민주의와도 선을 그으며 제3의 길을 외친 블레어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유럽의 새 흐름을 주도했고, 1997년부터 10년 동안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을 지켰다.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난 20년간 영국 노동당은 ‘블레어리즘’에 지배돼 왔다.

 

제3의 길 시대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노동당이 ‘좌파 본류’로 회귀하는 것일까. 14일 시작되는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정통 좌파로 분류되는 제러미 코빈(66)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보인다. 블레어 집권 이래 노동당의 실책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적극 가담하고 복지를 후퇴시킨 정책들 때문에 오랜 지지층이 등을 돌리면서 노동당은 최근 몇년 간 선거에서 참패를 거듭했다. 코빈 돌풍이 일자, 그간의 정책 방향에 대한 쌓이고 쌓인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라는 지적과 한물 간 좌파 노선으로의 복귀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영국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좌파 정치인 제러미 코빈이 지난달 22일 런던 북부의 선거사무소를 나서고 있다. 런던/AP연합뉴스


1983년 의회에 진출한 코빈은 하원의원 8선째이지만 노동당 안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사회주의운동그룹(SCG), 팔레스타인 연대 캠페인, 국제앰네스티, 반핵 캠페인, ‘스톱 더 워 연대(이라크전 반대운동그룹)’ 같은 단체들과 활동하며 노동당의 전체 당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비주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반빈곤 운동을 펼쳐온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당 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노동당은 허리케인에 휘말렸다. 안팎의 예상을 뒤엎고 코빈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싸움에서 인지도 낮은 좌파 후보 버니 샌더스가 바람몰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코빈은 선명한 주장과 풀뿌리 캠페인으로 대세를 굳혔다. 그는 긴축 대신 대규모 경기부양을 해야 하며, 주요 산업의 민영화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하면 부유세를 올리고 무상교육을 늘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풀고, ‘노동자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노동당’이 돼야 한다고도 했다. 

 

노동당의 보수화에 반대해온 골수 당원들과 청년당원들은 열광했고, 코빈의 정책에는 벌써부터 ‘코비노믹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11일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코빈은 5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2등 후보 앤디 번햄은 21%로 한참 뒤쳐져 있다.

 

이번 노동당 대표 선거는 단순히 당의 얼굴을 바꾸는 행사가 아니라,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장이다. 그러자 한동안 국내정치와 거리를 뒀던 블레어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지난달 “좌파의 편한 담요로 다시 몸을 감싸려는 것”이라며 코빈을 비판했다. 블레어의 공보수석을 지낸 앨러스테어 캠벨은 노동당원들에게 “코빈만 아니면 된다”며 설득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동당 지도자였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지난달 22일 런던에서 열린 노동당 지지자 행사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런던/AFP연합뉴스


블레어는 12일에는 가디언에 공개서한을 보내 “코빈이 이기면 노동당은 절멸을 맞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에 나를 지지했든 미워했든, 좌이든 우이든 중도이든, 노동당이 지금 눈 감고 절벽 아래 험준한 바위 위로 떨어지려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했다. 


코빈을 공격하는 이들은 ‘낡은 좌파’로 돌아갈 경우 노동당이 회생 불능으로 떨어질 것으로 본다. 노동당은 지난 5월 총선 때 30.40%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보수당에 대한 반발이 노동당 지지로 이어지는 대신 극우파 영국독립당(UKIP)이 12.60%의 표를 가져갔다. 일각에선 “코빈의 노동당은 그리스 집권 시리자처럼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반면 코빈 지지자들은 과거 블레어가 당권을 거머쥐었던 것이 오히려 ‘쿠데타’였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미처 전 노동장관은 “1990년대 블레어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걸 시장에 맡기고 국가는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보수당 이데올로기로 노동당을 몰아갔다”고 말했다. 좌파 언론 인디펜던트는 코빈 지지자들과 반대파들 사이에선 노동당 웹사이트를 무대로 사이버공격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노동당 대표 경선은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하위권 후보를 빼고 재투표해 승자를 가려낸다. 코빈 바람 덕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5월 총선 전 20만명이던 당내 선거 유권자(당원과 제휴 노조원 등) 수는 61만명으로 늘었다. 선거 결과는 다음달 12일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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